▲ 소년원을 출소한 뒤의 어느 날 고향의 선배 그리고 후배들과 오배이골 병풍바위 위에서. 고인돌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후 이 오배이골은 현재 습지공원으로 조성되었고, 고창군에서는 이 습지를 별도로 유네스코에 등재하는 방안을 찾고 있는 중이다.
김수복
양말을 훔쳐 양말 장사를 하면 돈을 엄청 벌겠다고 생각했지만한 달 정도 지나서 양말 도매상의 구조를 어지간히 알게 되었을 즈음 고향 아저씨가 말했다. 많은 말들이 있었지만 주제는 단 하나, 돈이었다. 돈을 벌어야 한다. 서울에서는 돈이 있어야 사람 구실을 한다. 고향을 가더라도 돈이 없으면 손가질밖에 안 받는다. 그러니 너도 이제부터 돈 벌 생각을 해라. 돈을 어떻게 벌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저씨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된다.
등등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문득 눈물이 나왔다. 눈물 나게 고마웠다. 일찍이 그 누가 그렇게 눈물이 나올 정도로 나를 걱정해준 사람이 있었던가. 그리하여 나는 매일 저녁 무렵 그 아저씨의 양말 행상 보따리 속에 한 뭉치씩 혹은 두세 뭉치씩 양말을 넣어놓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런 정도는 사실 일도 아니었다. 매일 수천 뭉치씩 나가고 들어오는 양말 더미들 속에서 한두 뭉치 정도는 눈에 띄지도 않았다. 게다가 사장님이 다방 여자들과 어울려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탓에 집안이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거의 매일 부인과 여자 문제로 말다툼을 하면서도 사장님은 오후 서너 시만 되면 "야 문단속 잘 해야 한다" 그렇게 한 마디 남기고 퇴근해 버리기 일쑤였다.
고향 아저씨가 사장님의 그런 가정사를 소상히 꿰뚫고 나를 그렇게 '심어놓았던' 것이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도둑질을 하면서도 도둑질을 한다는 생각이 전혀 안 들 정도로 그렇게 자연스럽게 도둑질을 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여건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꼬리가 길면 잡힌다는 속담을 고향 아저씨는 아마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때문에 큰 욕심 부리지 않고 3개월 만에 그만두기로 했다. 3개월 만에 그만두고 다시 아침이면 똥덩어리가 둥둥 떠내려가는 중랑천변의 그 삼형제가 얻어놓은 월세방으로 돌아와서 양말 행상에 나섰다. 그동안 훔쳐낸 양말 가운데 일부를 상자에 담아서 그것을 다시 보자기로 싸서 어깨에 둘러매고 다니며 양말이요, 양말 사세요,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별로 신명이 나지를 않았다. 팔면 파는 대로, 벌면 버는 대로 다 내 것이 되는 명실상부한 사업가로서의 길을 걷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재미가 없는 것이었다. 때문에 양말 한 켤레를 팔기가 무섭게 그 돈을 들고 만화가게 같은 데로 들어가서 시간을 죽이기 일쑤였다. 그런 어느 하루 월세방 주인들인 삼형제의 돈이 통째로 없어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즈음에 삼형제는 똑같이 각자 하나씩의 적금을 들고 있었다. 양말 장사를 하는 이유가 사실은 그 적금을 들기 위함이었다. 만기가 몇 년이고 얼마짜리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하여튼 납입 기일이 다가오면 서로가 돈을 꾸러 다니는 등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때문에 그들은 하루 세 끼를 굵은 우동국수에 검은 간장 그리고 대파 몇 쪽으로 해결하고 있었다. 매일 양말을 팔아서 남은 이익금은 국수 살 돈과 연탄 살 돈을 제외한 전액을 천장 속에 보관해 두었다.
상표가 아마 비사표였던가 그랬을 것이다. 비사표 당성냥 통을 종이로 겹겹이 발라서 구멍을 뚫고 그 안에 돈을 넣어서 천장에 두었다가 적금 납입일 전날 밤에 칼로 잘라서 돈을 빼고 다시 종이로 바르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비사표 당성냥 통으로 된 일인금고 세 개가 통째로 사라져 버렸다.
도둑의 증거를 잡으려다 도둑이 되고 보니돈이 없어졌다는 말을 듣는 순간 눈앞이 캄캄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속담이 그렇게도 실감날 수 없었다. 남의 월세방에 더부살이로 끼어든 내가 아니면 누가 그 돈을 가져갔을 것인가. 게다가 나는 이미 도둑질을 한 경험도 있었다. 그것도 한두 차례가 아니라 무려 석 달 동안을 하루도 빠짐없이 도둑질을 해 왔다. 하지만 나는 그들 삼형제의 돈에 눈독을 들인 적은 없었다. 천장 속에 그들의 금고가 있다는 것은 알아도 거기에 손을 대본 적은 없었다.
도대체 이 사건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눈앞이 캄캄해서 아무 의욕도 나지를 않았다. 모두들 장사를 나갔지만 나중에 나간다는 핑계를 대고 방안에 웅크리고 앉아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데 문득 한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바로 옆방에 세들어 살고 있는 홀아비 한 사람을 나는 평소에도 수상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도대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 수도 없거니와 거의 매일 방안에만 처박혀 있는 것 같은데도 사흘이 멀다고 고기 굽는 냄새를 풍기는 사람이었다. 비라도 내려서 우리가 장사를 못 나가는 날이면 화투를 들고 찾아오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한 번도 우리를 자기 방으로 들인 적이 없었다.
어쩌면, 어쩌면 그 홀아비가 범인인지도 모른다. 아니 확실히 그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는 순간부터 나는 아마 탐정이 되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숨소리 한 번 크게 내지 않고, 발자국 소리 한 번 크게 내지 않고 하루 종일 방 안에 웅크리고 옆방의 동정에 귀를 기울였다. 내가 만일 운이 좋다면 그가 한 번은 밖으로 나가줄 터이었다.
운이 좋았다. 그가 밖으로 나왔다. 연탄을 갈러 나온 것 같았다. 연탄이 떨어졌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나는 빌었다. 당시에 연탄은 누구나 없이 새끼줄에 두 장씩 꿰어놓은 것을 사다 쓰고 있었다. 한 번에 네 장씩 사다가 이틀 정도 버티는 것이었다. 나는 정말로 운이 좋았다. 그가 마침내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문을 살짝 열고 내다보니 연탄을 사러 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직 안심할 수 없어서 그의 뒤를 밟았다. 그가 계단을 올라 연탄가게 쪽으로 향하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내려와서 그의 방으로 스며들었다. 그날의 나는 정말로 운이 좋았다. 그의 방으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 베개가 눈을 채웠다. 베개를 보는 순간 저것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근거로 그런 생각이 들었는가는 지금도 알 수 없지만 하여튼 그랬다.
그리하여 베개를 마치 누군가로부터 빼앗듯이 거칠게 움켜잡고 치켜들었는데, 그 순간의 무게감이 벌써 달랐다. 그렇게 나는 아마 눈이 뒤집히고 있었을 것이다. 베개를 어떻게 뜯어내서 그 안의 돈을 확인하게 되었는지는 지금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든 돈이 쏟아져 나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동전 소리를 내며 양말 한 짝이 떨어졌다. 양말 속에 지폐와 동전이 섞인 채로 들어 있었다.
그때 돈이 들어 있는 그 양말을 차라리 들고 나왔더라면 들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들고 나간다는 생각은 전혀 해볼 수 없었다. 돈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확인한 뒤로 나는 겁에 질려 있었다. 왜 그렇게 겁을 먹고 덜덜 떨어야 했는가는 지금도 알 수 없지만 하여튼 그랬다. 겁에 질린 채로 덜덜 떨고만 있었을 뿐 그 방에서 빨리 나가야 한다는 생각은 도무지 해보지를 못했다.
마침내 주인이 들어왔고, 거친 욕지거리와 함께 커다란 주먹으로 귀뺨을 몇 대나 얻어맞았는지 코피를 질질 흘려가며 파출소로 끌려갔다. 파출소에서 한나절을 있다가 저녁 12시 즈음에 경찰서로 갔고, 며칠 뒤에 다시 구치소로, 그리고 다시 며칠 뒤에 소년원으로 갔다.
돌아보면 잘못된 만남은 아니었다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도둑이 아닌 것 같았지만, 그런데도 나는 도둑이 아니다, 하는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구치소에서나 소년원에서나 이런저런 절차를 거치면서 무수하게 구타를 당했지만, 그런데 어쩐 일인지 아프다거나 억울하다거나 괴롭다는 느낌은 거의 없었다.
그것은 뭐랄까, 다른 사람은 전혀 모르고 알 수도 없는 거대한 어떤 비밀을 나 혼자만 알고 있다는 묘한 자긍심 같은 것이 내 안에서 나를 강하게 키워주고 있다는 느낌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사실로 그 사건은 이후 내 인생에 훌륭한 지침이 되어 주었다. 그래서인지 나로 하여금 양말을 훔쳐 양말 장사를 할 수 있는 길도 있다는 것을 알려준 그 아저씨와의 만남을 한 번도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따라서 이 글은 <오마이뉴스>의 '잘못된 만남' 글 공모 취지와는 다소 어긋난 것일 수도 있다.
덧붙이는 글 | '잘못된 만남'응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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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이 일이고 공부인, 공부가 일이고 사는 것이 되는,이 황홀한 경지는 누가 내게 선물하는 정원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우주의 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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