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프트 장관님, 루즈벨트 대통령을 좀 만나게..."

[박용만과 그의 시대 20] 포츠머스회담과 순진한 윤병구

등록 2010.10.15 11:54수정 2010.10.15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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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박용만

박용만 ⓒ 독립기념관

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 3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이었다. 1912년 정치학 전공으로 네브래스카주립대학을 졸업했고,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지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해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20년 북경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1928년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올해는 국치(國恥) 100년으로 잉걸불과 같은 그의 삶과 투쟁을 재조명하고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 시대>를 엮는다... 기자 말

윤병구가 하와이에 건너간 것은 1903년 10월. 이민 배를 탄 것은 통역으로였다. 그는 사탕수수밭에서 노동하는 동포들에게 복음을 전도했다. 반년 후에는 부인과 아들도 하와이에 도착했다.

a  윤병구(1880-1949)

윤병구(1880-1949) ⓒ 독립기념관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가정에 등한했듯이 그 역시 사명이 주어지면 처자식을 떠나 객지를 떠돌았다. 미국 대통령을 면담하기 위해 대양을 넘고 대륙 끝까지 찾아가야 했으며 헤이그 밀사들과 유럽을 순방하느라 1년씩 집을 비우는 때도 있었다. 박용만 역시 15년 동안 처자식을 떠나 독립운동에 몸을 바치지 않았던가.  

처음 이주한 한인들은 감리교 신자들이 많아 윤병구는 감리교 감리사 피어슨을 보좌하며 전도활동을 했다. 일본에서 16년 동안 선교사를 지냈던 와드만이 피어슨의 후임으로 감리사가 되자 그의 통역이 돼 일했다.

윤병구가 미국 국방장관 태프트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와드만 감리사 덕분이었다. 와드만 감리사가 하와이 총독대리 애트킨슨에게 줄을 대서 성사를 시킨 것이었다. 1905년 7월 7일 태프트를 태운 배가 호놀룰루에 기항했다.


배에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딸 앨리스도 타고 있었다. 딸을 맡길 만큼 두 사람의 사이는 친밀했다. 실제 루즈벨트는 태프트를 후계자로 양성했다. 덕분에 태프트는 차기 대통령에 힘 안 들이고 당선됐다. 태프트는 일본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앨리스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한가한 여행객 차림으로 일본을 향하고 있었다.

a  윌리엄 태프트(1857-1930)

윌리엄 태프트(1857-1930) ⓒ Harris & Ewing

태프트의 몸집은 우람했다. 곰 중에서도 백곰 크기였다. 실제 그는 미국 대통령 중 가장 근수가 나갔다. 나이도 아버지뻘이어서 우선 주눅이 들었다.


"저... 태프트 장관님, 루즈벨트 대통령을 좀... 만나게...해 주십시오."

떠듬거리는 윤병구를 태프트는 이윽히 쳐다보았다. 인자한 인상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쌀쌀한 표정도 아니었다. 1901년서부터 1903년까지 그는 필리핀 총독을 해서 그런지 동양인에 대해 나름의 이해심을 가진 듯 했다. 바람 앞의 등잔불 같은 조국의 운명을 생각하면 가릴 것이 무엇 있겠는가. 윤병구는 모자란 침을 삼킨 다음 나머지 말을 이어갔다. 틀린 영어라도 개의치 않았다.

"대통령의 중재로 포츠머스에서 러일강화회담이 열린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대통령을 한 번 만나게 해주십시오. 한국의 독립청원서를 대통령께 전달할 수 있도록 소개장을 하나 써주십시오."

태프트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알 수 없는 계산이 그의 두뇌 속에서 이뤄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무엇 보다 자기는 일본에 가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한가한 여행객 차림이지만 국방장관으로서 천황도 예방하고 총리도 만나게 되는 것 아닌가. 러일강화회담에 대해서도 대화를 나눌 것이 아닌가. 

"그래요? 대통령이 워낙 바빠서 면담을 허락할 수 있을지 의문이군요. 면담을 할 수 없다면 그 먼 길을 가는 게 헛수고가 아닐까요? "

두 사람 사이에는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윤병구는 그 침묵을 깨뜨릴 기력마저 없었다.

"We can't...just sit back... and do nothing.(우리는... 주저앉아... 있을 수만... 없습니다)"

띄엄띄엄 윤병구는 같은 말을 두 번 계속했다. 떨리는 목소리였다. 7월 15일 한인들은 호놀룰루 인근의 에와 사탕수수 농장에 모였다. 윤병구가 태프트 장관의 소개장을 받았다는 소문을 듣고서였다. 회의에서 그를 하와이 동포 7천 명을 대표하는 총대로 뽑았다. 그리고 당장 주머니를 털어 5백 달러를 모았다.

그들에게 '독립'은 신앙이었다. 그 신앙을 위해서 주머니 속의 동전까지 아낌없이  털어낸 것이다. 그것은 담배 값마저 줄여야 하는 고통을 의미했다.

a  시오도어 루즈벨트(1858-1919)

시오도어 루즈벨트(1858-1919) ⓒ 미국회도서관

윤병구는 '하와이 거주 한인들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드리는 청원서(Petition from the Koreans of Hawaii to President Roosevelt)'를 움켜쥐고 장장 2만리나 되는 먼 길을 떠났다. 그 먼 길을 마다않고 떠난 윤병구나 또 지푸라기 같은 희망 때문에 5백 불의 큰돈을 모아준 동포들이나 비장한 결심은 마찬가지였다.

떠나기 전 윤병구는 워싱턴에 있는 이승만에게 전보를 쳤다. 7월 31일 두 사람은 워싱턴에서 만났다. 다시 필라델피아로 가 서재필을 만났고 셋은 청원서의 문장을 다듬었다.

루즈벨트는 뉴욕 롱아일랜드의 오이스터 베이에 있는 자택에 머물고 있었다. 그 집을 새거모어 힐(Sagamore Hill)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국가 사적지가 됐다. 그 역사적인 저택에 두 사람이 발을 디딘 것은 속옷도 흠뻑 땀에 젖는 8월 4일 늦은 오후였다.

a  새거모어힐. 시오도어 루즈벨트가 살다 죽은 저택. 현재 국가사적지

새거모어힐. 시오도어 루즈벨트가 살다 죽은 저택. 현재 국가사적지 ⓒ Marsky01


한편 일본에 도착한 태프트는 7월 29일 동경에서 일본 총리 가쓰라를 만났다. 가쓰라는 일본이 필리핀을 침략할 의사가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한국 정부의 태도 때문에 러일전쟁이 일어난 만큼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지 않으면 유사한 사태가 또 일어날 것임을 지적했다.

태프트는 한국이 일본의 보호령이 되는 것이 동아시아의 안정에 좋을 것이라는 말에 동의한다며 루즈벨트 대통령도 수긍할 것이라고 말했다. 태프트는 국무장관이 아닌 만큼 두 사람은 조약 대신 각서를 교환했다.

이승만과 윤병구는 간신히 루즈벨트를 면접할 수 있었다. 면접이 이뤄진 건 태프트의 소개장 때문이었다. 루즈벨트는 청원서를 대충 훑어 본 다음 워싱턴에 있는 한국 공사관을 통해 국무성에 제출해 달라고 말했다. 국무장관을 통하지 않은 사안에 자기는 어떤 대답도 줄 수 없다는 거였다.

워싱턴에 되돌아온 두 사람은 대리공사 김윤정을 찾아갔다. 그러나 그는 이미 대한제국의 외교관이 아니었다. 외교권이 일본으로 넘어갔다며 청원서 제출을 거부했다.

수륙 2만리를 달려온 윤병구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톱날 같은 사탕수수 잎에 얼굴을 찢기며 모은 노동자들의 피땀 어린 돈도 몽땅 공중에 날리고 말았다. 그 보다도 지푸라기 같은 독립의 꿈이 암흑 속으로 사라지고 만 것이 더 절통스러웠다.

결국 일이 꼬인 건 태프트 때문이 아닌가. 국무장관이 아니고 한가한 여행객 차림으로 일본을 향한 건 밀약을 맺기 위한 행차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위치쯤 되면 이미 국제정세를 파악하고 정책의 흐름도 훤히 꿰고 있지 않았겠는가. 즉흥적으로 각서를 주고받을 개연성은 따라서 없는 것 아닐까. 그런데도 친절하게 소개장을 써 줌으로서 윤병구를 결과적으로 우롱하고 만 것 아닌가.

소위 태프트 가쓰라 밀약이 7월 29일 이뤄지자 루즈벨트는 이틀 후인 31일 재가한다는 전보를 발신했다. 그러고서 그 나흘 후인 8월 4일 찾아온 윤병구에게 청원서를 국무부에 제출하라고 천연덕스럽게 권유한 것이다. 두 사람의 친절은 가면이었다. 순진한 윤병구는 그 친절의 덫에 걸려 쓰러지고 말았다.

덧붙이는 글 | 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이래 캐나다 토론토에서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모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카페(다음)의 모든 자료들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안형주 저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신한국보, 국민보, 공립신보, 신한민보, 단산시보 등 1백 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종 자료들.

독립운동가 열전(한국일보사) 등등.


덧붙이는 글 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이래 캐나다 토론토에서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모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카페(다음)의 모든 자료들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안형주 저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신한국보, 국민보, 공립신보, 신한민보, 단산시보 등 1백 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종 자료들.

독립운동가 열전(한국일보사) 등등.
#박용만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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