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 전 과정을 꼼꼼이 기록한 한인 밀정

[박용만과 그의 시대 22]

등록 2010.10.20 11:53수정 2010.10.20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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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박용만

박용만 ⓒ 독립기념관

박용만 ⓒ 독립기념관

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 3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이었다. 1912년 정치학 전공으로 네브래스카주립대학을 졸업했고,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지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해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20년 북경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1928년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올해는 국치(國恥) 100년으로 잉걸불과 같은 그의 삶과 투쟁을 재조명하고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 시대>를 엮는다. - 기자 말

 

7월 11일 토요일에는 아침부터 종일 회의가 열렸다. 덴버에는 '로키마운틴 데일리 뉴스'와 '덴버타임즈' 두 영문신문이 있었다. 두 신문 다 회의 때마다 기자를 보내 취재했다. 7월 12일자 '덴버타임즈'에 기사가 실렸다. 제목은 "한국의 아들들은 전쟁을 준비한다".

 

a  회의장이었던 덴버의 그레이스 감리교회. 지금은 철거되고 없다.

회의장이었던 덴버의 그레이스 감리교회. 지금은 철거되고 없다. ⓒ 독립기념관

회의장이었던 덴버의 그레이스 감리교회. 지금은 철거되고 없다. ⓒ 독립기념관

 

"오늘 오전 그레이스 감리교회에서 열린 대표자회는 일본의 한국 점령을 비난하는 애국적 연설들이 특징이었다. 이들 연설에 따르면 한국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일본을 한국에서 축출하는 것이다. 토론 내용의 대부분은 그 방법론으로 채워졌다.

 

연설은 모두 한국어로 이루어져 참석한 동포들의 애국심을 북돋웠다. 다음 월요일의 회의는 오전 10시에 영어로 열릴 것이다. 이번 대표자회에는 해외 한인 거주지에서 온 50명가량의 대표자들이 모였다.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그 지역 대표자들과 더불어 다른 나라 동포들을 대리하는 대표자들이 참석했다."

 

이 기사에서 눈에 띄는 오류는 캐나다에서도 대표자들이 참석했다고 한 것이다.

 

7월 14일자 기사는 "한인들은 일본 첩자들을 피해 다녔다"는 제목과 "대표자회는 일본인들이 참가할 수 없는 비공개 집회를 가졌다"는 부제를 달았다.

 

"한국에서 한인들이 압박자 일본인들을 증오하고 두려워하는 것처럼 자유의 땅 미국에서도 한인들은 일본인들을 증오하고 두려워한다. 일본 정탐꾼이 일본에 저항하는 투쟁 연설들을 본국 정부에 보고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한 탓에 소수의 한인 애국자들은 그레이스 감리교회에서 모이는 것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어제 대회에 참석한 이들을 조심스럽게 지켜보았으나 일본 첩자 같은 사람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인들은 불필요한 적대감을 피하고 안전한 진행을 하기 위해 오늘 아침 모임을 아라파회(Arapahoe)가에 있는 회관(박용만의 직업소개소 겸 숙박소를 가리킴)에서 가졌다. 회의장 입구는 엄격히 통제됐고 증명서가 없는 사람은 출입이 금지됐다."

 

"일본 첩자 같은 사람은 찾을 수 없었다"는 건 헛다리 짚은 관찰이었다. 증명서가 없는 사람은 출입을 금지시키면 된다는 주최측의 대책도 허가 찔렸다. 증명서를 가지고 회의에 참석한 밀정은 마치 녹음기처럼 모든 회의의 진행을 낱낱이 기록, 일본측에 넘겼다. 바로 한인 밀정의 짓이었다.

 

나라를 팔아먹는 사람은 이완용에 그치지 않았다. 돈 몇 푼을 받고 샌프란시스코에 주재하는 일본 영사에게 국문과 일부 일문으로 자세한 보고를 보낸 자는 바로 한인 유학생이었다. 그 자는 상항주재 일본영사관에서 쓰는 공문서 용지에 회의 때마다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를 빼놓지 않고 기록했다.

 

당시 미국에는 1천명도 채 안 되는 한인들이 있었는데 벌써 민족을 배반하는 밀정이 나타난 것이다. 역설적으로 그 밀정은 왕조의 실록을 기록한 사관에 견줄 수도 있다. 그의 꼼꼼한 기록이 없었다면 애국동지대표회의의 회의록이 온전한 역사의 기록물로 보존될 수 없었기에 말이다.

 

"7월 11일 상오 9시 반에 개회할 때 애국가를 노래하고 간단한 기도로 개회한 후 회장 이승만이 개회 취지를 설명. 다시 각 대표가 위임장을 낭독하다. 이날은 특별히 각 대표와 각 동포의 의견을 듣기 위하여 연설회를 열고 여러 사람들이 차례로 연설을 하였는데 (중략) 미국사람의 고명한 부인 신사들과 각 신문기자들이 한 모퉁이에 자리를 차지하여 모든 일을 영문서기에게 물어 기록하고 또한 일반회원의 사진을 찍어가기에 분주하더라."

이것은 한인 밀정이 작성한 보고서의 한 부분이다.

 

모두 일어서 애국가를 불렀을 때 그 밀정의 마음이 어땠을까? 망해가는 나라를 생각하며 이역만리에서 부르는 애국가가 그에겐 귓가에만 맴돌다 만 것일까?

 

"성자신손 5백년은 우리 황실이요 /  산고수려 동반도는 우리 본국일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 /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충군하는 열성의기 북악같이 높고 /  애국하는 일편단심 동해같이 깊어  

무궁화 삼천리... "

 

이것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발간되던 공립신보 1908년 3월 11일자에 실린 애국가 가사다. 아직 한일병합이 이뤄지지 않아서인지 지금의 것과 다르다. 그날 회의장에서도 대한제국 시절의 애국가를 비장하게 불렀으리라. 나라를 잃는다는 설움은 울컥 가슴을 메우고 목을 메우고 눈에 이슬이 고이게 하였으리라.  

 

a  그레이스 감리교회 앞에서 찍은 애국동지대표회 참석자들. 둘째줄 왼쪽에서 4번째부터 박용만, 이승만, 윤병구, 그리고 뉴욕에서 온 김헌식.

그레이스 감리교회 앞에서 찍은 애국동지대표회 참석자들. 둘째줄 왼쪽에서 4번째부터 박용만, 이승만, 윤병구, 그리고 뉴욕에서 온 김헌식. ⓒ 독립기념관

그레이스 감리교회 앞에서 찍은 애국동지대표회 참석자들. 둘째줄 왼쪽에서 4번째부터 박용만, 이승만, 윤병구, 그리고 뉴욕에서 온 김헌식. ⓒ 독립기념관

12일은 일요일이어서 휴식한 다음 월요일에 다시 회의를 열었는데 영어로 진행됐다. 이승만의 개회선언이 있은 다음 '됴선(조선)의 영광 잇난(있는) 과거사'라는 제목으로 박용만의 연설이 있었고, 오흔영의 '됴선과 일본의 관계', 리관영의 '물질 대 동양', 윤병구의 '동양에 대한 미국' 연설이 있었다.

 

초청 연사로 온 콜로라도 주의 연방하원의원 얼 크랜스턴은 '정치와 모범시민'을 주제로, 감리교 감독 헨리 워렌은 '국가의 위대함'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다.

 

누구보다도 회의 전 과정을 열심히 그리고 꼼꼼히 기록한 사람은 한인 밀정이었다. 회의의 한 결과물이기도 한 하기군사훈련 실시라는 의결 사항도 빼놓지 않았다. 

 

"(전략) 14일 오후에 제 6차 회의를 열고 박처후, 이종철, 김사형 제씨의 건의서를 받아 무릇 네브래스카에 있는 청년들은 매년 방학에 커니로 모여서 여름학교에 공부하여 또한 기한을 정하고 운동 체조 조련도 연습하기로 가결하다. (중략)

 

개회하는 날에 각처 신문 탐보조에서 어찌하여 낭설이 생겼는지 지방에 전하기를 우리가 전쟁을 준비한다 혹 비밀한 운동이 있다 하여 정탐객도 무수하였으며 혹 자위병으로 쫓기를 원하는 자도 몇이 있었으니 우리는 소문과 같이 못한 것을 한탄하였으나 이 기회를 인연하여 본국의 정치상 정형을 무수히 설명하였으며 본회의 실상주의는 무슨 강경한 태도나 혹 폭동할 의사는 하나도 없고 다만 평화한 뜻으로 각처 한인의 사회를 조직하여 발달하기에 장래 이익을 안 본 자라도 도모할 따름이니 금번 대회가 이 뜻에는 실로 유익함이 많은 줄 믿노라."

 

애국동지대표회는 구체적 성과물의 하나로 하기군사훈련실시를 결의했다. 그것은 박용만이 고대했던 것이다. 회의가 끝나자 직업소개소 겸 숙박소 사업을 윤병구에게 인계하고 그는 곧 네브래스카 주의 링컨 시로 떠났다. 가을학기에 네브래스카 주립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하기군사훈련을 즉시 추진하기 위해서였다.

 

네브래스카 주에는 유명한 군사고등학교들이 있었다. 이미 구한말 군인 출신 몇 명이 재학 중이었다. 또한 고등학교와 대학마다 군사훈련을 실시해서 일반시민들에게 익숙한 풍경이었으므로 하기군사훈련을 실시하기가 용이한 지역이었다.

 

 

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이래 캐나다 토론토에서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모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다음 카페(후손이 꾸민 명작 카페)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안형주 저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신한국보, 국민보, 공립신보, 신한민보, 단산시보 등 1백 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종 자료들.

독립운동가 열전(한국일보사) 등등.  

#박용만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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