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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모르는 그것, 할머니는 다 안다

영화 속의 노년(131) : 50년 전 첫사랑 찾아 떠나는 할머니 이야기 <레터스 투 줄리엣>

10.10.21 11:02최종업데이트10.10.21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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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레터스 투 줄리엣> 포스터 ⓒ NEW

할머니는 멋있고 예쁘다.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입가도 조금은 호물호물하지만, 그래도 멋있고 예쁘다. 50년 전 아무 말도 못하고 도망쳐 버렸던 그때, 영문도 모르고 남겨졌던 그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꼭 하고 싶은 할머니. 그 사랑을, 그 사람을 찾아나선 할머니는 용감하기까지 하다.

 

작가 지망생인 소피는 약혼자와 떠난 여행지인 '줄리엣의 도시'에서 사랑 고민을 담은 편지에 답장 쓰는 일을 하게 되고, 우연히 50년 전에 쓰여진 편지를 발견해 답장을 보낸다. 그런데 글쎄 그 답장을 받은 클레어 할머니가 손자와 함께 소피가 있는 곳으로 날아온 것. 그때부터 할머니의 첫사랑을 찾는 세 사람의 동행이 시작된다. 

 

할머니는 부드럽고 속이 깊다. 소피는 물론이고, 소피에게 쓸데 없는 짓을 했다며 난리를 피우는 까칠한 손자까지도 할머니는 부드럽게 다독인다. 사람을 대할 때 기본적으로 부드럽고 너그럽다. 유연하지 못하다는 나이듦의 특성을 찾아볼 수 없다. 인생의 구비구비를 넘어오면서 모서리가 둥글게 깎인 결과가 아닐까. 다만 첫사랑 찾는 일에는 한 치의 양보도 없다. 할머니 인생의 마지막 목표니까.

 

할머니는 강인하다. 겉보기에는 평범하게 살아온 것 같지만 오래 전에 아들 부부를 잃고 손자를 길러낸 할머니는 강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강함은 첫사랑에 대한 미안함을 인정하고 사과할 기회를 찾는 일에 적극적인 것으로도 나타난다. 이미 지난 일이라고, 나이 많으니까, 다 잊어버렸을 테니까, 하고 덮어두지 않으려 하는 그 마음에 그대로 담겨있다.

 

▲ 영화 <레터스 투 줄리엣> 클레어 할머니와 소피 ⓒ NEW

할머니는 기쁨도 슬픔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표현할 줄 안다. 첫사랑과 동명이인인 할아버지들을 수없이 만나면서 할머니는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고, 망설이기도 하고, 부끄러워하기도 하고, 피하고 싶어하기도 한다. 아닌 척하지 않는다. 나이 들어 내 안에 이는 모든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고 받아들이고 표현하는 일, 아무나 하지 못한다.

 

할머니는 인생을 안다.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 본의 아니게 흘러가는 인생, 오르막과 내리막이 고르게 있는 인생, 뒤늦은 후회도 있고 운명 같은 만남도 있는 인생, 아프고 힘들어도 끝까지 살아낸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그 모든 인생의 갈피들을 할머니는 안다. 어린시절의 아픈 상처를 가지고 있는 소피를 진심으로 안아주고 가여워해줄 수 있는 것도 그런 인생의 숨은 결을 잘 알기 때문이다.

 

▲ 영화 <레터스 투 줄리엣> 50년 만에 다시 만난 로렌조 할아버지와 클레어 할머니 ⓒ NEW

할머니는 사랑을 안다. 어린 시절 두렵고 자신이 없어 인사 한 마디 하지 못하고 그 사랑을 떠나왔지만, 가슴 속에 새겨진 사랑은 50년 넘는 세월에도 화인(火印)으로 고스란히 남아 할머니의 가슴을 따뜻하게 혹은 아프게 혹은 슬프게 혹은 행복하게 만들어준다.

 

결혼을 해 가정을 이루고 함께 자식을 낳아 기른 남편이 나쁘거나 싫어서가 아니라, 사랑은 사랑으로 남아 가슴을 울리는 것을 어쩌랴. 이걸 모르는 젊은 손자는 항의를 한다. '그럼, 할아버지는 뭐냐'고. 그러나 나는 손자와 달리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시절의 사랑도, 살아온 일상도, 가슴에 깊이 새겨져 지금도 여전히 잊히지 않는 그 사랑도, 모두가 진실이고 진정이라고.  

 

50년 만에 각자 홀로 되어 다시 만났으니 운명이라는 로렌조 할아버지의 말대로 할머니의 얼굴은 행복으로 가득하고, 두 노인의 입맞춤은 그럴 수 없이 달콤하고 다정하다. 젊은이들의 사랑과 갈등과 고민은 그러니 내 눈에는 그저 경쾌하고 가벼울 뿐, 할머니 할아버지의 사랑에 가슴 뭉클하다.

 

중간에 낀 나이여서, 위아래로 각각 20년 정도씩 차이나는 것 같은데 왜 나는 젊은 사람들의 사랑보다 노인들에 사랑에 마음이 가는 걸까. 내 분수를 이미 충분히 잘 알기 때문일까. 나는 오래도록 로렌조 할아버지와 클레어 할머니의 사랑을 부러워하리.

덧붙이는 글 | <레터스 투 줄리엣, Letters to Juliet (2010, 미국)>(감독 게리 위닉 / 출연 아만다 사이프리드, 바네사 레드그레이브 등) 

2010.10.21 11:02 ⓒ 2010 OhmyNews
덧붙이는 글 <레터스 투 줄리엣, Letters to Juliet (2010, 미국)>(감독 게리 위닉 / 출연 아만다 사이프리드, 바네사 레드그레이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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