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님이 코끼리 만진 거였나......"
라이즈는 시가의 양끝을 잡고 돌리면서 중얼거렸다. 라이즈는 팔로어와 주고받은 서로의 과거사와 근황으로 유니트와 로빙, 미아라를 둘러싼 배경과 사일런스 그룹의 간교한 책략을 알게 되었다. 그를 팔아먹은 건 얍삽한 워들링. 너무나 엄청난 전모(全貌)는 황당한 소설 같아 믿기지 않을 정도였고 그간 미아라의 태도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살도시와 유니티의 비사(祕史)는 몇 날이고 지면(紙面)을 꽉 채울 기사감이지만 셀프 존에 있으면 가꾸지 못할 정물화의 난초일 뿐이다. 나갈 수만 있다면 일생일대의 호기(好機)인데. 시간을 사재기할 수 있다면. 라이즈는 빠져나갈 뾰족한 수가 없어 헛숨만 씨근거렸다.
"우리가 더듬은 건 코끼리였어. 다만 어느 부위인지 몰랐을 뿐이지. 몸통이 여실히 맞춰진 건 우연인가 아니면 지략가의 정교한 짜맞추기일까. 우연이라기엔 기막히게 들어맞는 구성이라 허무하네. 신이 작가로 등단해서 탈고(脫稿)했다는 게 그럴듯하지 않아? 그리고 우리를 적시적소에 염료나 향료로 징발한 거구."
라이즈가 자조적으로 말했다. 그는 사건의 전말(顚末)에 허탈했지만 출세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는 용렬(庸劣)한 셈을 하고 있었다. 팔로어는 라이즈의 속을 뻔히 안다는 듯 독백을 흘렸는데 라이즈는 청동 동상처럼 굳은 그의 반응에 뜨끔했다. 또다시 기회주의자로 환승한, 사악한 음지로 기우뚱한 자신이 야속했다.
"원인이 있었을 거야. 아주 작은 발단도 누군가 선택을 하면서 연쇄적으로 일어나고 지층이 쌓이면서 피라미드가 된 게 아닐까. 이 세계는 인간들의 선택이 상호작용을 하는 박물관 같아."
"선택이라...... 강요된 선택이라는 게 맞겠지. 민족 통합 전쟁. 그때부터 비뚤어졌고 그게 화근이었어. 섣불리 뛰어드는 게 아니었는데."
"일차 폴리스 전쟁을 말하는 거야? 그 전쟁이 우리랑 무슨 상관인데. 중국과 인도에서 터진 내전(內戰)이 왜?"
라이즈의 의구심이 발동했다. 팔로어가 네버폴리스의 정사(正史)와는 다른 외전(外傳)을 아는듯했다.
"역대 정부가 발간한 공문서에야 그렇게 써있지. 유니트와 나는 그 전쟁에 참가한 산증인이야...... 이상과 이념은 감미로운 전쟁이었지. 모든 인종이 동등해지자는 사해동포주의(四海同胞主義)에 도취해서 민족주의를 박멸(撲滅)하자는 전선(戰線)에 들어갔는데 그건 세계통합주의자의 간계였어. 민족이 사라져야 할 유물이지만 발전적으로 해체시켜야 했는데 쇼비니즘(chauvinism)과 분류하지도 못하고 이상에 혹해서 동색(同色)으로 염색해버렸네. 당시 양대 민족국가였던 중국과 인도를 이간질하고 분파(分派)를 부채질해서 자국의 내전으로 유도했는데...... 모두가 농락당하고 잡종이 된 패전이었지. 중국과 인도가 패망하면서 기타 민족국가들은 네버폴리스 체제로 복속됐구. 이차 폴리스 전쟁은 네버폴리스의 주도권 쟁탈전이었고 그 후로 레믹스폴리스 동맹과 골드폴리스 동맹으로 갈린 네버폴리스가 성립한 거야."
"역사책을 새로 써야할 어질어질한 야사(野史)네. 그게 진실인들 어쩌겠어. 자살도시에 고이 묻어두면 몇 만년 뒤에 고고학자들이 캐내줄까. 그런데 유니트는 셀프 존에서 무슨 일을 꾸미는 거지? 아기가 있기는 한 거야?"
"그의 의중은 나도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 유니트는 체제 내부에서 그 체제를 교화(敎化)하려다 실패했어. 역사적으로도 새로운 이데올로기와 접근방식만이 기존의 사회 틀을 엎을 수 있었고 체제 내부에 발을 담그면서 도입한 경우는 대개 변질되고 말았지. 그나마 영국의 명예혁명을 성공 사례로 꼽지만 왕정(王政) 집단과 결탁한 위장 혁명이야. 그래서 유니트는 현 체제에 동화되지 않고 오뚝이처럼 일어날 수 있는 거족적인 쇄신을 추구하려는 것 같아. 그건 아마도......"
아아앙. 아아아앙. 앙앙앙.
회랑쪽에서 절규에 가까운 메아리가 울리며 광장으로 하강했다. 아기 울음이었다. 그 소리는 방사능이 퍼지듯 초음속으로 광장을 가로질러 동굴 밖으로 번져나갔다. 고막을 터지게 할 격음(激音)이었고 장내의 신도들과 현존자들은 귀를 막고 뒹굴며 고통스러워했다. 일찍이 겪어보지 못한 음력(音力)에 경황없이 손바닥으로 귀를 억세게 누르는데 급급했고 전신이 흙투성이가 되도록 굴렀다. 한순간 울음이 그치고 다시 고요한 적막이 뒤덮었다.
동굴 천장이 흔들리며 돌가루가 부석부석 떨어졌고 그제야 하나둘씩 바닥에서 일어났다. 귀가 터져 피를 흘리는 사람들이 과반(過半)이고 멀쩡해보여도 약물을 과다하게 주입해서 흐느적거리는 공수병(恐水病)환자 같았다. 라이즈도 어렵사리 몸을 추스르고 주변을 둘러봤다. 어느새 팔로어는 불전(佛殿)의 신상(神像)처럼 떡하니 등을 보이며 위를 보고 있었다. 라이즈는 그의 등에서 예사롭지 않는 파고(波高)를 읽어냈고 팔로어의 얼굴을 보는 것이 무섭게 느껴졌다.
"시작이야. 그날이 왔어......"
팔로어는 낮게 읊조리며 배수의 진을 친 장수처럼 회랑으로 갔다. 라이즈는 감히 물을 수가 없었다. 군신(軍神) 마르스(Mars)로 화한 것 같은 팔로어가 낯설었고 신도들과 현존자들도 영묘(靈妙)한 자석에 끌리는 듯 회랑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라이즈도 쪼물쪼물하다 그들을 쫓아갔다. 혹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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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10.22 11:00 | ⓒ 2010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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