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김일성 사망' 대형오보와 천안함

세계적 특종에서 세계적 오보로 전락한 그 때를 돌아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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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환(bangzza)등록 2010.11.27 20:51
세계적 오보도 1등이었다. 주인공은 <조선일보>. 1986년 11월 16일, <조선>은 '김일성 피살설'이란 제목으로 북한 김일성이 암살됐다는 소문이 일본 동경에서 나돌고 있다고 보도했다. 김일성 암살설을 전파한 제1보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조선>의 입장은 신중했다. "현재 김일성이 암살됐다고 판단할 만한 북한 내 어떤 변화도 없다"는 일본 정부 관계자의 말을 함께 전하면서 균형 있는 자세를 견지했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한 것은 다음날인 17일부터였다.

<조선일보>의 자화자찬 "세계 최초로 특종보도했다"

1986년 11월 17일자 <조선일보> 호외 1면 ⓒ 조선일보 PDF


국방부가 "북괴가 16일 전방지역에서 대남 확성기 방송을 통해 김일성이 총격으로 사망했다는 방송을 실시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비록 "북한의 모든 보도기관은 공식발표나 논평을 일체 하지 않고 있다"는 '단서'를 덧붙였지만, 이는 <조선> 보도에 완전히 힘을 실어주는 꼴이었다.

기다렸다는 듯, 같은 날 '김일성 총 맞아 피살'이란 단정적인 제목의 <조선> 호외가 뿌려졌다. <조선>은 "북괴 김일성이 총 맞아 피살됐다거나 심각한 사고가 발생, 그의 사망이 확실시된다"면서, 군부 불만세력 저격설, 열차 습격설 등을 대대적으로 전파했다. 자화자찬도 빼놓지 않았다.

"조선일보사는 16일자에서 김일성의 피격설을 세계 최초로 특종 보도했다. 김의 피살설이 처음 들어온 것은 15일 오후 9시 30분께였다. 본사 김윤곤 특파원은 일본 정보 소식통으로부터 김이 피살된 것 같다는 첩보를 입수, 이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여러 증상이 나타나 이를 긴급 본사에 송고, 세계적인 특종을 하게 된 것이다."

그때야 통했는지 모르지만, 분명 <조선>이 전날 보도한 것은 '설'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마치 자신들이 피살 사실, 곧 '팩트'를 가장 먼저 전달한 것 마냥 '오버'를 한 것이다. 어쨌든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음은 물론이다.

하루만에 세계적 오보로 전락, 어떤 사과도 하지 않은 <조선>

1986년 11월 17일자 <조선일보> 호외 2면 ⓒ 조선일보 PDF


<중앙일보>를 제외한 대부분 언론사가 '조선일보식 블러핑'에 동참하면서 김일성 사망은 기정사실이 됐다. "북한 어느 지역을 열차로 이동 중, 김일성-김정일 세습체제 등에 반발한 반김 세력에게 피살된 것으로 보인다"는 구체적인 정황도 전파됐다. 김정일도 다쳤다고 했다.

그러나 이 모든 보도들은 단 하루만에 뒤집혔다. 죽었다던 김일성이 평양공항에서 외국 손님을 맞이하는 장면이 북한 TV를 통해 방영된 것이다. 동시에 <조선>의 세계적 특종은 세계적 오보로 '변태'를 완료한다.

허나 <조선>은 그 어떤 사과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북한 쪽에 책임을 돌렸다. "그들 수령의 죽음까지 고의적으로 유포하면서 그 무엇을 노리는 북괴의 작태에 서방 언론들은 정말 놀라고 있다. 정상적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집단이란 것을 다시 한 번 세계적으로 알린 셈이 됐다"면서 말이다.

찔리기는 마찬가지였던 여타 언론도 <조선>에 장단을 맞췄다. "북한이 대남 확성기 방송을 통해 김일성이 피살됐다고 한 것은 체제 내 반대세력을 노출시키기 위한 시도"였다느니, "막바지에 들어선 부자 세습체제 문제와 관련, 김정일이 실적을 쌓기 위해 꾸며낸 것"이란 등의 분석이 꼬리를 물었다.

이상한 국방부, 이상한 대통령 "처음부터 믿지 않아"

1986년 8월 18일자 <경향신문> ⓒ 네이버 디지털뉴스 아카이브 캡쳐


비록 24년 전 일이긴 하지만, 그 과정을 살펴보면 의문점은 여전하다. 무엇보다 왜 국방부가 정확한 사실을 확인하지 않고 <조선>의 '세계적 오보'에 힘을 실어줬는지가 의문이다. 당시 <조선>이 '김일성 사망'의 근거로 제시했던 것이 북한군의 선전방송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 휴전선 이북 선전마을에 조기가 게양됐다.
2. 휴전선 북괴군 GP 2개소에서 "김일성이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고 방송했다.
3. 4개소에서는 "김정일을 수령으로 모시자"고 했다.
4. 서부전선 북괴군 GP에서 "김일성이 열차사고를 당했다"고 방송했다.
5. 판문점 북측 지역에도 조기가 게양됐다.
6. 전방 북괴군 영내에도 조기가 게양됐다.
7. 휴전선 일대 대남 방송이 김의 업적을 계속 방송하고 있음이 대남 GP에 의해 확인됐다.

17일자 <조선> 호외를 통해 '여당 관계자' 또는 '정부 소식통'이란 수식어와 함께 <조선>에 보도된 내용들이다. 그럼에도 당시 이기백 국방부 장관은 국회에서 "북괴는 비무장 지대 북방에서 16일부터 18일까지 계속 김일성의 사망에 대한 확성기 방송을 해왔다"는 정도의 해명으로 '무사통과'했다.

의문점은 이 뿐만이 아니다. 1986년 11월 26일자 <경향신문>은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일본 언론을 통해 "처음부터 김일성 사망설을 믿지 않았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미 대남 심리전으로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때는 '역시 위대한 대통령'으로 해석될 여지에 검열을 통과한 모양이다.

남시욱 "우리측 병사가 다른 사람에 대한 추도문을..."

김일성 사망설을 처음부터 믿지 않았다는 전두환 당시 대통령 발언을 전한 1986년 11월 26일자 <경향신문> ⓒ 네이버 디지털뉴스 아카이브 캡쳐


그러나 오늘의 시각에서야 '탄핵감' 아닌가. 사실상 북한 뜻에 국민이 놀아나도록 방치했다는 뜻이 되니 말이다. 그 자신 김일성 사망설을 믿지 않으면서 국방부가 발표하도록 놔뒀고, '여당 관계자' 또는 '정부 소식통'이 <조선>을 통해 소문을 확산하는데도 뒷짐만 지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것도 기사 게재 여부는 물론 '보도 불가', '눈에 띄게', '조그맣게' 등 다양한 지시어를 통해 편집까지 좌우하던 '보도지침'이 기승을 부리던 시절에. 얼마든지 '대남 심리전'을 사전 봉쇄할 수 있는 '최고의 시스템'을 구축했던 그 때 말이다.

자연스레 '대남 심리전'의 실체 여부를 묻게 만든다. 이와 관련 <동아일보> 출신 남시욱 교수는 중요한 '증언'을 하고 있다. 1997년 내놓은 <체험적 기자론>에서 남 교수는 '김일성 오보'를 특종욕이 빚은 오보 사례로 지목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아직 이 오보 사건의 자세한 경위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전해진 바를 종합해 보면, 일선에서 북한군의 선전방송에 나온 다른 사람에 대한 추도문을 들은 우리측 병사가 김일성이 죽어서 추도하는 줄 잘못 판단하여 상부에 보고하자 이것이 김일성 사망으로 확대되었다 한다."

천안함 사건의 결말은?

이쯤이면 '김일성 사망설' 자체가 완전히 허구가 된다. 허나 이와 같은 의혹들은 곧 전국에 불어닥친 평화의 댐 모금 열풍에 '수장'되고 만다. 만약, 이런 일이 '오늘' 일어났다면, 아마 국방부는 물론 <조선>까지도 국감의 칼날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어제(17일) <추적 60분>을 보면서 '김일성 오보 사건'이 떠오른 것도 그래서였다. 천안함과 어뢰에 붙어 있는 흡착물이 폭발로 생겼다고 단정할 수 없는 실험 결과가 공개됐다. 천안함 침몰 상황을 관측할 수 있는 또 다른 초소가 있다고 했고, '물기둥'을 본 사람이 없다는 증언도 보도됐다.

이렇듯 국방부 발표의 실체가 불투명한데도, 그동안 많은 언론은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인 검증 작업을 내팽개친 채 '받아쓰기'에만 급급했다. '김일성 오보'가 탄생한 과정과 닮은 구석이 있는 것이다. 모쪼록 국방부와 언론이 그 때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길 바란다. 그것이야말로 '국격'을 24년 전으로 되돌리고 '카더라 저널리즘'을 부활시키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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