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귀한 대구의 '귀한 눈' 이야기

등록 2010.12.28 17:25수정 2010.12.28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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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째 오시는 눈을 보다가

해돋이가 늦어져 일곱 시가 지났는데도 창밖이 어슴푸레하다. 어제(27일)도 눈이 오셔서 승용차를 두고 버스로 길을 나섰더랬다. 고작 2.7cm가 왔다는데, 버스고 트럭이고 간에 설설 기어가는 폼이 여간 우습지 않다. 몇 미터씩 눈이 오시는 북해도나 모스크바 같은 곳에서 그 정도 눈은 눈이라 부르기도 민망할 터. 역시 인간은 습관의 동물인가 보다.


오늘 아침 텔레비전을 보다가 대구에 눈이 오고 있다는 전갈을 본다. 대도시의 일기상태를 알려주는 화면 오른쪽 아래로 대구의 현재기온과 눈사람이 보인 것이다. 베란다로 나가 창밖을 내다보니 승용차 지나간 자국이 하얀 눈 위에 선명하다. 흐뭇하다. 아, 다시 눈이 오시는구나. 오늘도 재미난 하루가 되리란 생각에.

아침 먹고 잠깐 시든다는 게 두 시간 넘게 잠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크고 흉악한 개한테 인체의 중요한 부분을 물리고 나서야 잠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창밖에는 여전히 눈발이 날리고 있다. '군고구마장수' 모자를 쓰고, 목도리를 하고, 반코트를 입고, 등산용 반장화를 신고 어깨를 으쓱하며 문을 나선다. 흐릿한 하늘이 사뭇 반갑다.(오시라, 폭설이여!)

대구 사람들은 눈을 반가워하지 않는다. 적어도 내가 만난 어른들의 구할 이상은 눈을 싫어한다. 하기야 어떤 친구는 대구가 살기 좋은 이유로 눈이 오지 않는 마른 겨울을 꼽기도 했으니까, 이야기는 끝난 게 아닌가. 눈이 오시지 않는 겨울이 얼마나 건조하고, 딱딱하며, 지루한지 그는 모른다. 그것이 그이의 생활습관이고 이곳의 익숙한 환경이므로.

야아, 눈이다!

경산에서 시지, 정확히 말하면 시지 고등학교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경북대 정문까지 가는 937번 버스를 타기 위함이다. 술 마실 일이 있거나, 걷기 좋은 계절이 오면 나는 그렇게 학교에 가곤 한다. 25분 남짓 걸리는 여정에서 마주치는 여러 대상이 선사하는 다채로움은 늘 경이롭다. 그것도 사계절의 양상이 언제나 사뭇 다르니 얼마나 큰 축복인가!


우방 아파트를 지나는 길에 "야아, 눈이다!"하는 맑고 투명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당연히 어린 아해들이다. 초등학교 4~5학년이나 되었을까. 녀석들의 눈 반기는 소리가 마음을 따뜻하게 데운다. 환한 얼굴로 뛰어오르는 놈들의 모양이 새삼 귀엽다. 눈발은 시간과 더불어 점점 굵어진다. 모자에도, 코트에도 눈이 자꾸만 쌓인다. 그렇게 길을 걷는다.

경산과 시지 경계에 '모레아 장례식장'이 있다. 그들은 '장례예식장'이라는 상호를 내걸고  있는데, 이것은 '경북대대학교'처럼 우스꽝스러운 표현이다. 장례가 이미 망자에 대한 예의를 의미하는데, 거기에 예식을 덧붙이는 꼴이라니 (뱀사족이라고 할까!). 이런 이중삼중의 오기가 한국어를 무참하게 만든다.(5% 할인 되시구요, 연말에 정산도 되시니까...)


'모레아 장례식장' 옆에 작은 저수지가 있고, 몇 마리 청둥오리가 텃새처럼 언제나 그곳을 지킨다. 눈으로 하얗게 덮인 저수지에 하염없이 다시 눈이 내리건만 오리들은 오리무중이다. 모여서 단체로 군고구마라도 구워 먹고 있는 것일까. 녀석들의 안부가 궁금하다. 눈길을 돌려 바라본 성암산의 꿩이며, 멧돼지들은 어제오늘 또 뭘 먹었을까, 생각한다.

나의 유년시절 눈에 대하여

동생들과 지난날에 대해 말하다 보면 더러 놀랄 때가 있다, 서로가. 그들은 놀랄 정도로 기억하지 못하고, 나는 놀랄 정도로 많은 기억을 품고 있는 때문이다. 너무나도 선연해서 마치 어제 일처럼 생각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몇몇 독자들은 "기억력 자랑하려고 이런 글을 쓰나"하고 오해할지도 모르지만, 이건 사실이다). 그 가운데 하나만.

눈을 기억하는 것은 내 나이 세 살 무렵이다. 그때 엄마는 나를 거의 포기할 뻔했다고 하신다. 아픈 치레를 하도 많이 해서 해를 넘기지 못할 거란 생각을 언제나 하셨다고 한다. 그런 세 살 때 부안에 큰 눈이 오셨다. 아버지는 나를 무동 태워 한의원으로 데려 가셨다. 부안군 주산면 돈계리에 양의가 있었겠는가. 있다 한들 치료비나 온전히 있었을까.

초록색이 고왔던 아버지의 털조끼와 하얀 무명한복과 허벅지까지 빠지는 길을 걸어가셨던 아버지의 걸음걸이를 지금도 기억한다. 한의원에서 죽어라 울었던 기억과 눈물을 훔치면서 다시 아버지 무동을 타고 돌아왔던 눈 시리도록 하얗고 서럽도록 고왔던 눈길을 지금도 기억한다. 그런 길을 모두 지나고 포도에 면한 더럽고 시끄러운 눈길을 걸어가는 나!

눈에 남다른 애착을 느끼는 것은 아마 이런 추억 때문일지 모르겠다. 하얀 고무신과 댓님으로 행장을 갖추고 몹시도 아팠던 둘째아들을 무동 태워 큰 걸음으로 길을 나섰던 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추억(94년엔가 대구에 제법 눈이 오신 겨울날 두 아이와 함께 아파트 부근에서 눈사람을 함께 만들었던 생각이 난다. 녀석들은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모듬국밥'과 한잔 소주

시지 고등학교에서는 학생들의 괴성과 기성이 난무한다. 눈 오시는 12월 말까지 녀석들을 잡아두는 학교와 국가에 대한 도저한 저항과 기쁨이 어려 있는 소리의 축제가 한창이다. 724번, 649번, 939번 버스들이 비상등을 켠 채 옴짝달싹도 하지 않는다. 나의 937번 버스가 온다. 기사는 아니 가려고 툴툴댄다. 그를 윽박지른다. 담티 고개까진 가야죠!

폭설로 담티 고개를 넘는데 애를 먹는다는 전갈이 온 모양이다(휴대전화는 대단히 위력적이다. 혹여 푸쉬킨의 <눈보라>란 단편소설을 읽으셨는지! 전화가 있었더라면 창작 불가능했을 옛날이야기!). 그래도 가야죠, 거기까지라도. 버스가 움직인다. '달구벌대로'를 설설 기어가는 차의 행렬로 거리는 부산스럽다. 몇 사람을 태우고 버스는 길을 간다.

그러다가 월드컵경기장 입구. 유턴하려는 승합차가 제멋대로 춤을 추고 전진과 후진을 되풀이하고, 좌우로 요동치면서 자못 위태롭다. 고개를 오르는 차나, 내려오는 차나 거북이걸음은 매한가지다. 드디어 문제의 담티 고개. 여기저기 차들이 다시 엉킨다. 멀리 보자니 차들은 그냥 서 있는 성싶다. 기사에게 문을 열어 달래서 버스 밖으로 썩 나선다.

거듭 오시긴 하되 눈발은 어느덧 약해져 있다. 도중에 눈을 몇 차례 뭉쳐 던져본다. 적당히 습기를 머금은 하얀 수류탄이 소리도 없이 허공을 가른다. 15분이나 걸었을까. 길 건너편에 '할매국밥집' 간판이 보인다. 언젠가 야밤에 '따로국밥'을 먹었던 집이다. 시원한 소주 한 병과 '모듬국밥'을 주문한다. 내장을 타고 흐르는 차가운 소주. 아아, 나의 생이여!

눈사람과 눈석임, 그리고 세상살이 

'반월당'에서 1호선 지하철로 바꿔 탄다. 그리고 '신천역'에서 내려 '경대 정문'으로 걷기 시작한다. 다시 걷는 것이다. 버스의 유혹을 떨치고 걷는 길에 목적지로 질주하는 버스를 본다. 이제 길은 눈석임이 한창이다. 여기저기 물보라가 사납게 인다. 크고 작은 차들은 전혀 개의치 않고 속도를 즐긴다.

사람들은 쉬이 잊어버린다. 싫든 좋든 우리는 잊고 산다. 그렇게 그들은 눈석임의 선물을 망각하면서 달려가고 있었다. 여느 때보다 훨씬 고요해진 교정에 들어서서 '일청담'으로 향한다. 두 무리의 학생들이 모여 있다. 공통점은 사진을 찍고 있었다는 것인데, 인원수가 많은 집단 주변에 제법 규모 있는 눈사람이 만들어져 있었다. 따뜻한 장면이었다.

아직 멸종하지 않고 저렇게 보호종이나 희귀종으로 사는 녀석들의 존재는 아직도 우리한테 희망이 있음을 말하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으로 흐뭇하다. 국밥집을 나선 다음 잠시 들렀던 대륜 고등학교에서도 눈사람을 만들려고 했던 녀석은 딱 하나였다. 허나 그놈마저 두 발로 허투루 만들던 눈덩이를 부셔서 친구한테 던지는 바람에 몹시 서운했던 터였다!

이렇게 2010년 겨울은 깊어가고 있다. 그리고 이 시간과 눈 내렸던 공간은 시나브로 잊힐 것이다. 그게 세상살이고, 그게 인생이며, 그게 당연지사라 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 길을 걸으면서, 버스에서 그리고 지하철에서 나는 생각했다.

사라지는 온갖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오늘의 우리가 없다면 우리의 부모와 어린것들의 시공간은 얼마나 쓸쓸할 것인지에 대하여! 우리가 기억함으로 해서 새삼 의미가 반추되는 지나간 관계와 의미에 대하여! 그리하여 다시 생각하나니, 오늘의 눈과 눈석임과 언덕길을 오래도록 추억할 일 아닌가! (여러분 모두에게 따뜻한 시간과 만남이 함께 하기를!..)
#눈 #유년시절 #아버지 #할매국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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