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수봉 정상, 돌탑 너머 구름에 가려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숲.
성낙선
문수봉에 다다랐을 때는 하늘이 온통 잿빛이다. 구름이 바람을 타고 봉우리 위에 쌓아놓은 돌탑 사이를 재빠르게 지나간다. 바람이 어찌나 심하게 불던지 바위 위에서 중심을 잡고 서 있기가 힘들 정도다. 사방에서 눈보라가 휘몰아치는데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문수봉은 봉우리가 온통 너덜바위로 덮여 있다. 너덜바위 건너편으로 얼핏 천제단으로 가는 등산로 표시가 보인다. 천제단으로 가려면 어쨌든 이 너덜바위를 지나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너덜바위 지대를 통과하는 일조차 엄두가 나지 않는다. 낭패다. 태백산에 와서 천제단 대신 문수봉에 눈도장을 찍고 내려가야 하는 발생한 것이다.
문수봉 정상에 서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돌탑 뒤에 몸을 숨겨 바람을 피하고 있는 사이에 앞서 만났던 가족들이 다가온다. 두 아이를 데리고 매서운 바람 속을 걸어 천제단까지 가는 게 쉽지 않아 보인다. 그들에게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더니 가던 길을 계속 가겠다는 답변이 돌아온다. 의외다.
하지만 나는 너덜바위를 지나 문수봉을 몇 십 미터 내려가지 못해서 발을 돌린다. 등산로 위로 눈이 발목 깊이로 쌓인 데다, 경사가 심해 아이젠을 차고도 발이 죽죽 미끄러지기 때문이다. 너무 위험하다 싶어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때 갑자기 눈 앞에 두꺼비 같은 마누라와 청개구리 같은 새끼들이 떠오른 건 왜일까?
그렇게 해서 결국 천제단을 포기하고 문수봉을 내려오는데, 대적하기 힘든 상대를 만나 먼저 꼬리를 내리고 도망치는 듯한 비겁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시간이 어느새 낮 12시를 향해 가고 있다. 이미 천제단에 올라갔다 내려왔어야 할 시간이다. 마음이 몹시 무겁다. 처음부터 태백산을 너무 만만히 본 게 잘못이다.

▲ 눈조각전시장. 한창 작품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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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 눈꽃 구경 2차 시도 : 천제단

▲ 눈조각 전시장 앞의 이정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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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문수봉을 내려올 때까지만 해도 이날로 천제단을 다시 올라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실 깨끗이 포기했다. 그런데 문수봉을 내려와 당골광장으로 돌아오는 길에 비로소 천제단으로 가는 이정표가 눈에 들어온다. 당골광장 북쪽의 눈조각전시장 앞에 천제단과 문수봉으로 갈라지는 길을 알려주는 푯말이 서 있는 게 보인다.
오전에 문수봉을 오르면서, 이 팻말을 보지 못하고 지나친 게 실수였다. 오전에 이 앞을 지날 때, 아마도 눈조각전시장에서 사람들이 거대한 눈더미 위에 올라서서 작품을 만들고 있는 광경에 정신이 팔려 이 푯말을 보지 못하고 지나친 게 분명하다. 그 푯말 앞에 서서, 이대로 태백산을 떠나야 할지 아니면 천제단을 다시 올라야 할지 고민에 빠진다.
천제단까지 4.4km, 거리상으로 문수봉에 올랐던 것과 큰 차이가 없다. 한 번 더 시도를 해봄직 하다. 무엇보다 민족의 영산이라고 불리는 태백산에 와서 해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천제단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는 게 너무 아쉽다. 언제 또 이곳을 찾아오게 될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슬금슬금 걸음을 옮긴다.

▲ 천제단 올라가는 등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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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제단 올라가는 길. 길이 넓고 쾌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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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만 해도 조금만 올라가 보다 길이 험하다 싶으면 다시 내려올 생각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등산로 옆으로 깎아지른 듯 서 있는 암벽을 올려다 보면서 걸어올라가는 사이, 나도 모르게 계곡 안으로 점점 더 깊이 들어간다. 계곡 위로 암벽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곧추서 있는 광경이 장관이다.
그쯤에서 이대로 되돌아 내려가느니, 천제단까지 다시 한 번 더 올라가 보자는 오기가 발동한다. 등산로도 등산로라기보다는 오히려 산책로라고 하는 게 더 타당해 보인다. 걷기 편하게 만들어져 있다.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다. 사실 이 등산로는 태백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길이다. 문수봉 쪽으로 올라가는 길과는 달리 등산객들도 꽤 많이 눈에 띈다.
태백산을 찾는 등산객들은 보통 산의 북쪽에 있는 유일사매표소를 거쳐 태백산 정상인 장군봉(1567m)과 천제단에 오른 다음, 산에서 내려올 때 주로 이 길을 이용한다. 길이 넓고 경사가 급하지 않아, 큰 힘 들이지 않고 오르내릴 수 있다. 태백산을 설명하면서 가족 단위의 등산객들이 많이 찾는 산이라는 말을 쓰곤 하는데, 아마도 그 표현은 이 등산로를 두고 하는 말인 듯싶다.

▲ 천제단 가는 길, 길 위에서 늦은 점심을 먹는 등산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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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종비각. 비극적인 삶을 살다간 단종의 넋을 기려 비각을 세운 뒤, 태백산 산신령으로 모셨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비각 주위로 바람을 피해 서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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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끝까지 쉬운 길은 아니다. 천제단에 근접하면 길이 조금 가파르다. 천제단을 눈앞에 두고 수백 미터 가량 경사가 급한 길이 나온다. 그 길에서 잠시 숨을 몰아쉰다. 태백산은 확실히 산 아래와 산 위의 세상이 180도 다른 산이다.
이곳 역시 문수봉과 마찬가지로, 능선이 가까워지면서 바람소리가 점점 더 거칠어진다. 이러다 하늘 한 귀퉁이가 무너져내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구름은 한층 더 짙어진다. 그 구름에 가려 백여 미터 거리의 풍경은 숫제 안갯속이다. 그런데 그 풍경이 사뭇 환상적이다. 그리고 천제단이 가까워지면서 눈꽃이 점점 더 선명한 자태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경사가 급한 길을 마저 다 오르고 나면 드디어 천제단이다. 산봉우리에 검은 돌로 쌓아 올린 천제단이 짙은 구름에 가려 희미한 윤곽을 드러낸다. 천제단 위로는 하늘이 온통 잿빛이다. 하지만 산봉우리를 뒤덮고 있는 눈꽃만큼은 어쩐 일인지 눈이 부시게 맑은 빛이다. 마치 스스로 빛을 뿜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 구름에 덮여 희미한 윤곽을 드러내고 있는 만경사. 그 앞에 우리나라 가장 높은 곳에서 샘이 솟는다는 '용정'이 보인다. 천제단에서 쓰는 물을 이곳에서 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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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아래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자리를 뜨기가 힘들다. 하지만 산은 인간의 그런 사정을 세세히 돌보지 않는다. 바람이 몹시 심하게 분다. 몸을 바로 세우고 있기가 힘들다. 그 바람이 자꾸 사람들을 산 밑으로 밀어 내린다. 오래 버틸 수 없다. 그 바람에 맞서려면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어야 하는데 내겐 그럴 용기가 없다.
태백산에 지금 눈꽃이 한창이다. 눈꽃이 얼마나 풍성한지, 태백산에 올랐다 내려오는 사람들의 머리와 눈썹에까지 희고 맑은 꽃이 피어오르는 걸 볼 수 있다. 그 모습이 꽤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산신령이 따로 없다. 그 모습에서 한 순간이나마 신과 인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태백산에는 두 개의 세상이 존재한다. 하나는 태백산 위의 세상이고, 또 하나는 태백산 아래의 세상이다. 태백산에 오르지 않고, 세상을 다 살았다 말하기 힘들다. 한겨울 눈이 내리는 날 태백산에 올라갔다 내려오면, 세상에 이런 세상도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 태백산 천제단.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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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제단 주변에 화사하게 핀 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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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제역 탓에 오는 20일에 개최할 예정이었던 태백산 눈꽃축제가 취소됐다. 하지만 태백산 산행에는 별다른 제약을 두지 않고 있다. 인간이 펼치는 축제가 아니어도 산은 항상 인간들에게 축제를 베풀 준비가 되어 있다. 가서 즐길 마음만 있으면, 준비는 모두 끝난 셈이다.
태백산은 국내에서 가장 눈이 많이 내리는 곳 중 하나다. 당연히 눈꽃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산 중에 하나로 꼽힌다. 그런 까닭에 주말에는 항상 등산객들로 붐빈다. 그때는 등산 소요 시간도 좀 더 길어질 수 있다고 하니 그 점 유의하자. 유일사매표소나 당골광장에서 천제단까지 올라갔다 내려오는 데 보통 3시간 정도 걸린다. 하지만 주말에는 사람들이 산을 줄지어 오르내리는 탓에 1,2시간 정도 더 걸릴 수 있다.
당골광장으로 내려오는 길에 태백석탄박물관에 들러보는 걸 권한다. 상당히 잘 만들어진 박물관이다. 전시중인 광물들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이채롭다. 그 모양과 빛이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다. 그곳에서 우리나라 석탄 채굴의 역사와 광부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도 꽤 훌륭한 공부가 될 수 있다. 뜻밖의 값진 체험을 할 수 있다. 입장은 무료다.

▲ 태백석탄박물관 전시물. 광부들이 채탄을 하는 장면.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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