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 사회의 인간존중 표지 책표지 입니다.
알라딘
새해부터 줄기차게 들리는 말 중의 하나가 복지 포퓰리즘이다. 야당에서 내놓은 보편적 복지 이른바 무상복지에 대해 보수진영이 평가하기를 복지 포퓰리즘이라 평하고 이에 대해서 아주 가열차게 공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몇 십조의 예산이 든다. 이에 대해서 생각해 봤는가? 또한 무상급식이나 무상의료를 시행하게 되면 부자들이 국민의 세금으로 혜택을 보는 것이 아니냐? 그러니 선별적인 복지를 시행해야한다는 것이 보수진영의 주장이다. 이러한 대립은 갈수록 번지고 있어 심지어 얼마 전 대학생들이 자주 가는 이른바 스펙 쌓기를 위한 카페에는 복지 포퓰리즘에 대한 칼럼이나 표어를 공모하는 공모전이 뜨기도 했다.
사회적 안전망이 미흡한 우리 사회에서 복지정책을 생각하고 이를 실현시키는 일은 선진국으로 가는 단계 중의 하나라는 주장과 남미와 남유럽이 바로 그 복지 때문에 경제적 위기에 처한 것이다, 보편적으로 시행하는 복지는 국가경제 파탄의 지름길이다, 그러니 이것이 바로 복지 포퓰리즘이라고 하는 주장 사이에서 슬그머니 리처드 세넷의 <불평등 사회의 인간존중>을 꺼내어 본다.
이미 전작 <신자유주의와 인간성 파괴>라는 책에서 지극히 휴머니즘의 시각으로 신자유주의를 바라보고 비판했던 그가 이번에는 복지정책에 있어서 인간존중에 대해서 말한다. 실제로 리처드 세넷은 스스로 한때 복지정책의 수혜자였다. 이 책에서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그는 전쟁에 참전한 아버지로 인해서 어린 시절 가난을 맛봐야했고 그로 인해 당시 인종차별 완화 정책의 일환으로 백인에게 허용되었던 카브리니 그린(Cabrini Green)이라는 공영주택단지에서 어린 시절의 한때를 보내야 했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이곳에서 백인이 거주한다는 것은 사회적 신분의 하락을 의미했다.
흑인과 어울려 지내야 하는 이곳에서 생활하고자 하는 백인은 거의 없었으며 이곳에 들어온 백인들은 이곳을 벗어나기 위해 무척이나 노력했다는 것이다. 그는 그런 공영주택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그의 어머니가 사회복지사로 일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복지정책에 대해서 알게 되고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 책은 그런 개인적인 배경과 그가 사회학자가 되면서 가지게 된 학문적 성과가 잘 드러나 있는 책이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카브리니의 문제점을 존중 결여에서 찾는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행해지는 혜택적 복지는 성인들의 의존상태로 만들고 자신의 궁핍을 쳐다보기만 하는 방관자이자 당국이 제공하는 보살핌의 소비자에 불과한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공영주택에서 사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존재, 완전한 인간으로 간주되지 않는 존재로서 그와 같은 독특한 존중의 결여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 1960년대 미국에서 있었던 베트남 전쟁시기 복지혜택을 받는 흑인에 대한 백인의 공격을 살펴보면 복지혜택을 받는 사람들이 느끼는 모멸감이나 좌절은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당시의 백인들은 공공연히 흑인빈민들에게 사회의 기생충이자 복지정책을 악용하는 사기꾼으로 공격했기 때문이다. 즉, 복지정책에 의존한다는 것은 사회적 계급의 추락을 의미하는 것이고, 자기결정권, 통제권에 어느 정도 침해를 감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점에서 리처드 세넷은 이렇게 행해지는 의존의 복지가 공산주의와 다를 바가 없다고 강하게 비판한다. 집단이데올로기에 의해 방관을 하게 하므로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일부 복지국가에서 행하는 혜택을 줄이고 그들에게 자립하기를 요구하는 것 역시 방책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말한다.
이러한 방법들은 의존의 사적측면과 공적측면이 가지고 오는 분할의 당혹성을 깊게 만들어줄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세넷은 의존하는 자들이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도록 복지가 행해져야 함을 로크와 칸트의 입을 빌려서 설명한다. 로크와 칸트는 인간의 미성숙함에 대해서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칸트는 성인의 미성숙함은 스스로 초래한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로크는 인간의 미성숙함은 정치, 사회적 조건으로 인해서 태어난다고 보았다. 허나 두 근대 철학자는 동일하게 미성숙함을 처방하기 위해서는 개인행동에서 가능한 합리적인 자기 주권을 행사하고 단지 힘이 있는 자들에게 의존한다는 이유로 그들의 말을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데 있으며 스스로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의존에서 오는 수치를 이기고 성숙한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의존의 존엄성이다. 의존의 대상과 의존 자체도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 두 철학자의 생각이고 리처드 세넷이 동의하는 바이다.
또한 리처드 세넷은 자유주의 국가에서 그동안 의존의 존엄성이 얼마나 무시당하였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복지정책에서 행해졌던 여러 가지 방법론들을 살펴본다. 동정이라거나 배려, 혹은 탈기관화와 같은 그간의 복지정책이 가지고 있던 방법들은 국가적 시혜라는 측면을 확고히 함으로써 혜택을 받는 사람들로 하여금 혜택을 받기 때문에 불평등을 참아야 하고 자유의 제한을 참아내야 했다는 것이다.
결국 리처드 세넷의 책은 복지를 행하되 어떻게 존중의 복지를 행할 것인가? 의 고민이다. 반면에 우리는, 복지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가지고 고민을 하고 있으며 심지어 보편적으로 충분히 행할만한 가치가 있다 여겨지는 복지에도 포퓰리즘이라는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 예산의 문제, 형님예산이나 4대강 예산 등 이 복지 표퓰리즘에 대해서는 제기 할 수 있는 부분이 너무나도 많다. 그러나 참고 넘어가서 리처드 세넷의 기준으로 복지 표퓰리즘이라 폄하하는 이들의 주장에 대해서 살펴보자. 그 어디에 인간의 존엄에 대한 고민이 있는지 말이다.
우리사회에서 포퓰리즘이라는 말이 들려오기 시작한 것이 불과 10여년 밖에 되지 않았다. 대중영합주의로 풀이되는 표퓰리즘은 대중에게 인기를 얻기 위한 정책이란 의미이기도 하다. 기존의 정치적 기득권에서 지지를 얻지 못했던 정부가 등장하자 줄기차게 등장했던 말이 이 포퓰리즘이다. 포퓰리즘이란 말 앞에 나는 근대 철학자 로크를 다시 떠올린다. 미성숙한 인간을 만드는 것은 정치이고 사회적 환경이라는 그의 말은 어쩌면 여전히 통용되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보편적 복지인지 아니면 그저 복지 포퓰리즘에 지나지 않는지는 성숙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지속적으로 포퓰리즘이라 단정 짓고 말하고 대중이 선동당하고 있다고 우기는 것은 대중을 미성숙한 인간으로 보는 것과 동일하다.
복지에서 의존의 존중을 어떻게 실현해야 할지를 생각하는 시대에 복지를 행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혹은 부자 아이 하나가 공짜 밥을 먹을까봐 노심초사하는 현재의 모습은 리처드 세넷에게 비웃음사기 딱 알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