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조카에게 서글픈 조언밖에 할 수 없었다

일찍부터 공무원을 꿈으로 정한 큰 조카와의 대화

등록 2011.02.07 10:53수정 2011.02.07 10:54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설 연휴를 맞아 고향에 내려갔다. 고향에 가면 부모님말고도 나를 반기는 이들이 있는데, 바로 조카들이다. 늦둥이로 태어나다 보니 큰조카하고는 8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위로 띠동갑인 언니보다는 아래로 8살인 큰조카가 내게는 오히려 더 자매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이런 큰조카가 올 해에 드디어 고3이 된다. 한국에서 태어나 고3을 거쳐 본 사람들은 그 말만 들어도 '고생하렴'하고 격려 해 줄 바로 그 고3이다. 나 역시 고3이 된 조카에게 격려의 말을 해 주었다. 그렇지만 대학만 가면 저절로 살이 빠진다는 다이어트설이나 모든 것이 가능할 것 같은 유토피아설은 거짓이라고 알려주었다. 덧붙여, 입학과 동시에 토익과 취업준비로 스펙쌓는 일상이 오히려 더 현실에 가까운 대학생활이라고도 일러주었다. 혹시나 대학생이 되었을 때 크게 실망하지 않도록 말이다.  

 

몇 년 전만 해도 나는 조카의 아버지인 우리 오빠의 교육지침에 불만이 많았다. 오빠는 일찍부터 현실적으로 힘든 것은 단념하도록 교육시켰다. '네가 해야 할 것은 공무원이다. 이 지역 외의 대학으로 갈 생각은 하지 말아라.' 애초에 갖을 수 있는 꿈을 제한하는 오빠의 방식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럴 때면 나는 조카에게 네가 원한다면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식으로 용기를 주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난 지금, 나는 조카에게 무작정 그렇게 말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오빠는 이미 작은 소도시의 아파트 관리소장의 능력으로 3남매를 키운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첫째는 공무원, 둘째는 아직 미정, 셋째는 경찰로 꿈꾸는 과제를 내주었을 것이다. 그것을 이해하게 된 것은 꿈만 갖고 문예창작학과를 택한 내가 대학을 졸업하면서부터였다.

 

간판을 따기 위해서 우리 과에 들어왔다는 친구가 있었다. 드물게 우리 과에서 취업준비에 열심이던 그 친구는 현재 대기업에 들어가 있다. 그리고 나처럼 꿈꾸기를 우기던 친구들의 다수가 여전히 막막한 미래와 싸우고 있다. 등단을 한 친구들도 이름 석 자가 잠깐 신문에 찍혔다는 것 외에는 거의 비슷하다. 이것이 어쩌면 '리얼'인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취업준비도 마다하고 박박 꿈을 우기던 이들에게 놓인 막막한 현실.

 

그래서 차마 말 할 수 없었다. 꿈만 있다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라도 모든 걸 할 수 있다고 하기엔 최저임금도 잘 지켜지지 않는 아르바이트와 일 년에 천만 원인 미친 등록금의 현실을 알고 있었다. 그건 마치 있지도 않은 갑옷을 원래 보이지 않는 것이라며 입혀놓고 정글로 들여보내는 것처럼 가혹할 듯 했다.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더라도 가치있는 일은 할 수 있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조카에게 나는 복지에 관련된 공무원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세상에 이로운 일은 여러 방식으로 할 수 있다고. 그것은 다만 자신이 어떤 신념을 갖고 있느냐에 달린 것이라고 말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이 상황에서는 서글픈 조언임을 나는 알았다. 이미 정해진 꿈 밖에 꿀 수 없는 아이에게 먹기 쓴 약을 삼키기 쉽도록, 그리고 예뻐 보이게 알록달록한 캡슐에 담아주는 것이었다.  

 

마가렛 딜란드는 '인간은 살아있기 위해 무언가에 대한 열망을 간직해야 한다'고 했다. 내가 한 일은 그나마 열망의 불씨라도 생겨 덜 힘들게 하기 위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본래의 그 열망이란 이미 누군가가 대신 정해 준 꿈에서 오는 것이 아님을 어른인 우리는 모두 다 안다.

2011.02.07 10:53 ⓒ 2011 OhmyNews
#청소년 진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캐나다서 본 한국어 마스크 봉투... "수치스럽다"
  2. 2 100만 해병전우회 "군 통수권" 언급하며 윤 대통령 압박
  3. 3 300만명이 매달 '월급 20만원'을 도둑맞고 있습니다
  4. 4 시속 370km, 한국형 고속철도... '전국 2시간 생활권' 곧 온다
  5. 5 "일본정치가 큰 위험에 빠질 것 우려해..." 역대급 내부고발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