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재해지원 열풍 지나친 면이 있다

아첨의 의미는 없는지 반성의 계기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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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모(smlihm)등록 2011.03.20 17:07

일본 재해지원 열풍 앞에서

 

1) 과거의 만행 먼저 떠올라

 

일본의 침략전쟁 때 일본군이 선량한 우리 백성을 끌어다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장면의 사진이 있다. 소총과 니뽄도로 무장한 일본군이 흰옷 입은 백성 수백 수천명을 끌어다 줄 맞춰 앉혀놓았다. 아무 죄도 없는 이 백의의 우리 백성들은 두 손이 모두 뒤로 결박 지어져 있다. 곧이어 이들은 구제역에 걸린 가축보다 못한 신세로 저들의 군홧발에 마구 짓밟힌다.

 

사진 1의 장면, 둘 또는 셋 넷씩 앞으로 끌려 나가 무릎 꿇린다.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수많은 동포들이 보는 앞에서 눈도 가려지지 않은 채 목이 일본도에 의해 목이 댕강 날아간다.

 

사진 2의 장면, 독립군에 협조했다는 누명을 씌워 한 젊은이에게 사나운 사냥개 몇 마리가 달려들어 물어뜯는다. 일본군은 이 모습을 보며 낄낄 웃어댄다. 이 젊은이도 곧 숨을 거둔다.

 

사진 3의 장면, 우리 부녀자들의 옷을 모두 벗긴 나체를 향하여 일본도로 갖은 못된 짓을 하다가 역시 목을 날린다.

 

사진 4의 장면, 우리의 백성을 수백 명 나란히 뉘여 놓고 머리를 가지런히 하게 한 다음 망치로 차례차례 정수리를.....그리고 또 사진 5, 6, 7,..... 아 글로서는 더 이상 소상하게 표현할 수 없다. 일본이나 한국과는 무관한 제삼국인이 본대도 살이 떨리고 치가 떨릴 일이다.

 

이 같은 장면은 사진 속의 사건만은 아니었다. 도처에서 그러한 참상이 벌어졌던 것이다.  이 생생한 장면의 사진이 모두 조작된 것일까. 요즘, 여배우 고 장자연 양이 썼다는 구체적인 내용의 50통 230쪽에 달하는 유서 편지를 SBS가 민간업체에 감정을 의뢰하여 받은 결과는 모두 친필로 확인되었다는 보도(2011년 3월6일)가 있었다.

 

이를 수사하기 위해 경찰이 다시 국과수에 의뢰하여 얻은 결과는 모두 가짜라는 것으로 발표(3월16일)되었다. 그 같은 방식으로 역사를 말하려 한다면 이 학살 장면 또한 가짜일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하게 된다. 국민에게 알려야 할 것은 편지의 위변조 과정이나 사진의 진위를 따지는데 에너지를 소비하는 모습이 아니라 그로부터 발생된 사건과 행적의 진실이다.

 

히틀러가 유태인 육백만 명을 학살한 사진이 조작된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 백성이 학살당한 역사적 사실 또한 거짓일 수 있다. 매일이다 싶게 일본 대사관 앞에서 사죄를 요구하는 살아있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절규가 근거 없는 망령된 행위라고 한다면 그 사실 또한 조작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히틀러의 유태인 학살이 사실이듯이, 폴포트에 의한 이백만 명의 캄보디아 양민 학살이 사실이듯이, 위안부 할머니들이 절규하는 역사가 사실이듯이 일본군의 한국인에 대한  야만적 학살은 변질되지 않는 사진속의 모습 그대로 사실인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수백 년 동안 일본에 의해 짓밟히고 아무 방비 없이 희생되어 왔다.

 

그리고 1905년 이후 지금도 일본은 근거 없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며 우리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다. 언젠가는 이 문제로 한일 간에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예상이 일반의 우려이기도 하다. 고 노무현 대통령은 부시 미 대통령과의 회담석상에서 '일본과 함께 살아야 하는 세계인은 불행하다'고까지 말했다. 이는 일본의 끈질긴 침략 근성은 절대로 개선되지 못할 것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삼아 나온 말이기도 하다. 이것이 우리가 일본에 대해 경계해왔고 앞으로도 경계를 늦출 수 없는 이유다.

 

2) 일본인도 아플 때가 있다는 것이

 

엊그제, 2011년 3월11일 일본 동북부 태평양 연안 센다이 해안에서 진도 9,0의 지진이 일었다. 이 지진으로 바닷물이 육지를 덮치는 이른바 쓰나미가 밀어닥쳐 해안 3킬로미터의 육지가 바다로 변했다. 또 재해 발생 8일째인 오늘 현재 집계된 숫자에 의하면 7천여 명의 사망자에 1만여 명의 실종자가 발생했다. 몇 군데인지 모를 이재민 대피소에는 28만여 명의 이재민이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들에게는 도로 통신망의 두절로 구호품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수천, 수만의 집과 가족을 잃은 이재민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떨고 가족과 헤어진 아픔 등으로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시달린다고 한다. 이재민 대피소에서는 숨져 나가는 인원이 매일 증가하고 있다는 것으로 미루어 그 참상을 가히 짐작할 만하다.

 

이 재변은 단지 지진해일에 의한 고통으로 끝나지 않고 해안가에 자리해 있던 여러 기의 원자로가 손상을 입어 일본 열도 전체는 말할 것도 없고 태평양 너머 미국까지도 방사능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 실정이다. 일본에 주재하던 외국 공관이 철수하기도 하고 유학생이나 교민들은 서둘러 귀국한다. 지금 일본의 현실이 얼마만큼 참혹한 지경에 있는지를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다.

 

세계 각국에서는 일찍부터 구조대를 파견하고 구호품 보내기에 바쁘다. 2008년의 중국 쓰촨성 지진 때나 2010년 1월에 발생한 아이티 지진, 지난달인 2011년 2월 22일의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지진 때 보았듯이 멀고 가까운 지리적 여건에 관계없이 세계는 구호지원에 동참해 왔다. 글로벌 시대의 인도주의 지원이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일본의 대지진 여파의 참상에도 세계의 인도주의적 지원은 어김없이 줄을 잇는다. 오히려 그들의 역사적 범죄행위와는 무관하게 이전의 어느 지진 참사 때보다도 세계의 지원이 요란스럽지 않나 하는 생각마저 일게 한다. 일본은 세계 제3대 경제대국이다. 일본 국토의 십분의 일 정도에 피해가 있었다 하여 그것을 복구할 경제력이나 각종 인력이 모자란다 할 수 없는 나라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원폭 두 방을 맞고 항복하긴 했지만 그들은 곧바로 전승국인 미국의 동맹국이 되어 전후 복구에 큰 어려움 없이 부국이 될 수 있었다. 게다가 오랜 세월 이웃 나라를 침략하여 수탈한 강자의 면모대로 안정된 정서와 문화를 영위해온 그들이기에, 또 크고 작은 지진에 시달리며 훈련이 된 사람들이기에 아이티나 스촨성 지진 때와 같은 정부에 대한 불만과 호곡소리가 천지에 울리는 모습은 흔히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외부세계에서 더 소란을 피우지 않나 하는 느낌도 든다. 이처럼 냉정한 태도는 그들의 오랜 침략사에 비추어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것도 사실이다. 이 같은 느낌은 필자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더욱 극명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특히 한국에서 유별나다 싶으리만큼 일본 지원에 적극적인 모습을 띠고 있는 것으로 비쳐진다. 이명박 대통령이 국무회의를 소집하면서 대일 지원문제를 지휘하고 있으며 일본 대사관을 방문하여 죽은 이들에 대한 조문과 위문에 앞장섰다. 이러한 대통령의 행보에 대해 일각에서는 그가 일본 태생이어서 각별한 친일 감성의 발로가 아니겠느냐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

 

3) 한국인의 자존 새겨야

 

물론 일본과의 과거 역사가 어떤 갈등구조에 있었건 오늘의 천재지변 앞에서 보복적 감정으로 외면한다면 그것은 과거 일본이 우리의 독립군과 양민에게 저지른 학살의 차원과 다를 바 없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

 

정부 차원의 일본 돕기는 선린 우호를 위한 전략적 조치일 수도 있다. 경제단체들이 나서는 것은 일본과의 뗄 수 없는 무역행위 등 이해관계의 측면을 부정할 수 없어 보인다. 연예인들의 기부행위는 한류열풍의 발원지이기도 한 일본 팬들을 의식한 면이 클 수 있다. 배우 배용준이 거금 10억 원을 쾌척한 것을 필두로 한류 연예인 및 스포츠인들이 경쟁하듯 수억금 씩을 내놓고 있다. 이에 대해 세계 언론들이 다 경탄하고 있을 정도다.

필자는 여기서 평소 내가 좋아하는 배용준 등 연예인들이 일본의 비극적 현실에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행위를 탓하는 바는 결코 아니다. 그런 의도는 추호도 없다. 순수한 인본적 애정의 발로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통 큰 행보에 어쩌면 매우 자랑스럽게 여겨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무언가 보여주기 위한 측면이 커 보임에 마냥 개운하지만은 않은 것 또한 사실이다. 그들이 일본 팬들에 의하여 많은 돈을 벌어들인 것에 대한 보답적 의미가 다른 한 가지 기부의 이유는 될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태어나고 성장한 내 나라의 재해에 대해서, 다시 말하면 연례행사처럼 되어있는 수해 등으로 피해를 입은 우리의 이재민들에게는 얼마만큼의 보은이 주어졌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같은 논리적 궁금증은 정부나 경제단체들에게도 적용된다. 용산 참사자와 그 가족들의 울분과 아픔 앞에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비극 앞에서, 4대강 개발로 인한 국토의 신음 앞에서 정부와 경제단체들은 어떤 짓을 저질렀는가. 지금 일본에게 보여주는 것과 같은 자연친화적이며 인본적인 애정을 베풀어 왔었는지 묻고 싶다.

 

여기에서 우리를 놀라게 하는 일은 또 있다. 지상파 방송사들을 비롯한 도하 언론사들의 일본 돕기 모금행사가 국민적 이벤트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무엇을 얻기 위함인가. 방송사들은 어떠한 보은을 위하여 행사중인가. 못 배우고 어리석은 국민에게 사랑의 실현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 하는 진리를 보여주려는 것인가. 이제 커가는 어린이들이 들고 나온 저금통을 통하여 일본은 인류애적 형제라는 의미를 전달해주고 싶은 것인가.

 

지난날 속박과 핍박의 아픔을 접어두고, 아니 현재 진행형으로 앓고 있는 독도 영유권 문제나 배타적 경제수역 획정과 관련한 갈등, 일본군 위안부 문제까지도 다 접고 저들 돕기 행렬에 나서야 하는 소동이 우리에게 어떠한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인가. 우리는 남을 돕는데 계산하지 않고 이익을 바라지 않으며 천사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오직 천재지변의 애절한 고통에서 가엾게 헤매고 있는 그들을 도와야 한다는 의연한 태도의 소이에서일까.

 

과거 한국인의 피를 칼날에 바르는 것으로 즐거움을 누렸던 잔인한 일본군이 지하에서 지금 우리의 신적 선행을 보면서 반성하라는 의미가 담겨있는 것일까. 우리의 어리고 젊은 처자들을 마구 끌어다 능욕하여 가정과 생명을 유린했던 당사자들이 우리의 선행 앞에 부끄러움을 느끼라는 뜻일까.

이러한 인도주의 정신에 입각한 일방적 선행의 고매함을 미래의 일본인들이 어떻게 답할 것인지가 더 궁금하다.

지하에 있는 저 야만적 살인자들은 지금 우리의 선행을 보며 비웃고 있지는 않은지 그것 또한 궁금하다.

 

일본인들의 한반도 정복 역사는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고 한두 번의 일도 아니다. 수백 년에 걸친 저들의 고질적 악행이고 *기본적인 대외전략이다. 지금은 잠시 재해로 떨고 있지만 뒷날 이 재난을 극복하고 다시 그들 식의 국력과 교만함을 회복하였을 때 지금 받은 우정을 얼마만큼 대 한국정책에 반영할 것이냐 하는 점이다. 말하자면 이 은공을 귀히 여겨 독도를 포기할 것이냐 하는 엉뚱한 생각도 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은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나라다. 게다가 잦은 지진으로 인한 재해국이다. 그런 만큼 늘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대륙진출을 꾀해온 터다. 그것이 과거부터 존재한 그들의 본질적 전략이다. 그것으로부터 우리 민족과 그들의 갈등은 비롯돼 온 것이다. 그 갈등은 일본과 한국 중 어느 한쪽이 멸망하지 않는 한 영원할 수밖에 없다.

 

오늘 일본의 재해와 관련하여 우리의 이 애틋한 일본 사랑이 저들의 대륙진출의 기본전략을 포기하게 하거나 누그러뜨릴 수 있다고 본다면 그건 아주 잘못된 판단이다. 이 일로 일본이 감동하여 독도를 한국의 영토로 인정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면이 있다면 크나큰 착각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주한 일본대사관을 찾아가 일본대사와 정담을 나누었다하여 일본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인정하고 사죄할 것이냐 하면 그 또한 기대 난망이다. 우리가 어린아이의 저금통까지 털어 일본인 재해성금으로 내놓았다 하여 무고한 양민에게 칼질하던 과거의 행악을 반성할 것이라고 은연중에라도 기대한다면 그것은 전두환이 광주학살을 인정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와도 같은 것이다.

 

우리가 일본을 돕는 것은 이러한 일본의 한국에 대한 기본 전략을 염두에 두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잘하면 저들이 감동하여 우리의 주장에 동의하고 스스로의 이익을 포기하거나 양보할 것이라는 소아병적 사고는 금물이다. 모두들 여린 감성에 젖어 앞에서 말한 사진 속의 역사를 잊을까 두렵다.

 

필자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에게 저지른 과거 일본의 행악이 이번 성금 모금행위로 깜빡 묻혀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어린 학생들에게 그러한 분위기로 교육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도움과 단죄를 구분할 수 있는 학생으로 키워야 한다는 점이다.

 

지금처럼 국가가 들썩일 정도로 일본의 재해에 소동을 피우는 것은 오히려 저들이 과거부터 그랬던 것처럼 우리를 얕보게 하는 빌미가 될 수도 있다. 추위와 굶주림에 떨고 있는 일본의 이재민들에겐 도움을 주되 그것으로 일본의 범죄행위를 잊어서는 안 된다. 차분하고 적당하게 주는 도움의 방법이 요구된다.

과유부급, 지나친 것은 모자람만 못 하다는 말을 새겨둘 필요가 있다.

2011.03.20 16:58 ⓒ 2011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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