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오늘'을 예견한 소설! 미래는?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담은 마루야마 겐지의 <천 년 동안에>

등록 2011.04.25 11:02수정 2011.04.25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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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 동안에>(1권) 표지 ⓒ 문학동네

<천 년 동안에>(1권) 표지 ⓒ 문학동네

일본에 대지진이 발생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수도는 괴멸된다. 강도 높은 지진에도 견딜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는 원자력발전소가 방사능을 유출하는 사고를 일으킨다. 아이러니하게도 일본 정부의 지도자들은 해외 원조를 거부한다. 독재자로 상징되는 누군가는 기다렸다는 듯이 민중의 분노를 해외로 돌린다. 영토분쟁이 일어날 조짐이 보인다. 일본은 고립되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전체주의를 주창한다. 파멸의 징조가 아시아를 향해 뻗어나가고 있었다.

 

만약 누군가에게 이 내용을 이야기한다면, 뉴스에서 들려주는 소식 아니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소설의 내용이다. 1996년, 일본 현대문학의 마지막 보루라고 불리는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 <천 년 동안에>에 나오는 내용이다.

 

<천 년 동안에>는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동양에서는 조지 오웰의 <1984>나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만을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터였다. 그랬기에 마루야마 겐지가 디스토피아 소설을 썼다는 사실에 많이들 놀랐다. 그랬는데, 요즘에는 다른 이유로 놀라고 만다. 일본의 '오늘'을 예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의 일들까지 말이다.

 

"지난 대지진 때도 그 토대는 흔들리지 않았다. 흔들리기는커녕 천재로 인한 혼란을 최대한 이용하였다. 즉, 미증유의 국난에 봉착하여 현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국민이 하나로 뭉치는 길 밖에 없다는 연설이 요즘 들어서는 비정상적일 만큼 고조되고 있다. (중략) 각국에서 파견된 재해 구조대를 공항에서 돌려보낸 정부가 어찌 된 영문인지 국민의 갈채를 받고 있다. 무슨 일이든 지나치길 잘하는 이 나라는 몇백 년이 지나도 이웃에 대한 사랑이나 이방인과의 연대에 익숙해지지 않는다. 대인관계나 대외관계에서는 아부를 하든가 뽐내는 두 가지 방법밖에 모른다. 외국과의 관계가 삐거덕삐거덕 어긋나기 시작하면 당장에 주먹을 들고 흔들어댄다. 그리고 그 책임 소재는 항상 명료하지 못하다."

-<천 년 동안에> 중에서

 

세계를 관통하는 마루야마 겐지의 날카로운 필체

 

1943년에 태어난 마루야마 겐지는 1967년 일본의 대표 문학상인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하며 이름을 알린다. 사십여년 가까이 최연소 수상자라는 영예를 누릴 수 있었지만 그는 이후 고립을 자처한다. 문단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세계에서 오롯이 소설로만 이야기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래서일까. 마루야마 겐지는 일본 현대문학의 순수성의 상징으로 통한다. 마지막 보루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이다.

 

대중적인 활동이 없다보니 요즘에는 마루야마 겐지의 이름이 퍽 낯설게 느껴질 것만 같다. 마루야마 겐지를 쉽게 소개하자면 '일본의 김훈'이라고 비유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언어의 생명력을 중시한다. 마루야마 겐지의 언어는 깊이를 향한 치열함으로 무장하고 있다. 숨이 막히게 하는 치열함이 문장 곳곳에서 느껴진다.

 

탐미적이면서도 날카로운 묘사와 세계를 관통하는 묵직함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가슴 한복판을 향해 날아든다. 장인정신이 느껴지는 그의 언어는 흡사 살이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것 같다. 흔히 요즘 출간되는 일본소설을 두고 문장이 가볍다거나 장난스럽다는 말들을 많이 하는데 이는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을 읽지 않고 말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거대한 성을 쌓는 그의 문장은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웅장함을 지니고 있다.

 

묵시록의 역설 "상상하기 싫은 미래 안에 희망이 있다"

 

<천 년 동안에>는 천 년이나 된 '싸움나무'가 방랑하는 아이를 지켜보는 이야기를 기본 토대로 삼고 있다.

 

나무는 보았다. 죽어가는 어느 여인이 자신의 앞에서 생명을 탄생시키는 것을. 천 년의 세월을 보낸 나무였기에 그에게 그건 별다른 일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왜일까. 그는 아기가 성장하면서 어른이 될 때까지, 그리고 죽을 때까지 자신과 닿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농부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구한 아이는 커가면서 점점 현대 문명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동시에 싸움나무는 보고 듣고 이야기한다. 아이가 들어간 그 세계가 얼마나 타락했는가를 보고 현대문명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비판의 화살은 기어코 일본의 '오늘'까지 닿는다.

 

"아무래도 이 정부는, 반역을 도모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얌전하게 목숨을 내놓을 만한 남자들을 국가의 이름으로 전국에서 그러모으려 계획하고 있는 모양이다. 국위 신장을 위한다는 명분하에 대중 조작이 나날이 활발해지고 있다. 문제 있는 발언으로 실각한 정치가가 재계의 지원을 받아 다시금 기를 펴고 있다. 행정권이 칼처럼 번득이고 있다. 기념 축전의 배후에 제국주의의 그림자가 언뜻언뜻 비치기 시작하고 군신을 모신 신사에 참배하는 사람들의 눈이 충혈되어 있다. 문명의 의의 따위가 어디에 있느냐는 실소를 금할 수 없는 질문도, 지금은 금해야 할 언어의 선반 위에 올려져 있다."

-<천 년 동안에> 중에서

 

"혼미한 정국이 화살처럼 뿜어대는 언어"와 "시시각각 쏟아지는 왜곡된 보도", "악마를 굴복시키겠노라고 심각한 얼굴로 외치는 신의 마수에 걸린 자의 설교"가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이런 때에 싸움나무가 지켜보는 그 아이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1984>와 <멋진 신세계>와 같은 디스토피아 소설은 한 명의 개인을 주목했었다. 모두가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따를 때, 한 명이 의문을 제기한다. <천 년 동안에>의 아이도 그런 것일까? 아이는 <원숭이 시집>이라는 정체불명의 책을 들고 세상을 등진다. 제도권 밖에서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로 인해 아이가 겪어야 했을 고초는 죽음에 다다르는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1984>의 '그'를 비웃고 <멋진 신세계>의 '그'를 좌절시켰던 그것은 <천 년 동안에>의 '그' 또한 좌절시키고 억압하고 완벽하게 사로잡으려고 한다. 그럴 때 아이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작 한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천 년 동안에>는 처절한 묵시록이다. '희망'이라는 단어를 무참히 짓밟는 그 처절함은 혀를 내두르게 만든다. 한편으로 소름이 돋는 건 <천 년 동안에>가 말한 미래의 모습은 우리에게 먼 미래가 아니라는 사실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버려졌던 '희망'이라는 단어가 스쳐간다. 그것을 미리 생각한다는 것만으로도 희망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아이러니한 일이다. <1984>나 <멋진 신세계>가 그랬듯 처절한 묵시록이 상상도 하기 싫은 미래를 담아낸 디스토피아 소설이 희망의 불씨를 던져주고 있다.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엇을 해야 하는가?

 

소설이 단단해 보인다. 오랜 세월을 버텨낸 나무의 그것처럼.

천 년 동안에 1 - 개정판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난주 옮김,
문학동네,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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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라, 흐르는 사람이 되어라

#디스토피아 #마루야마 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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