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날도 우리 모두 열심히 사세

고교졸업 30주년 모교방문 제자들에게 부치는 글

등록 2011.06.01 15:32수정 2011.06.02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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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성급하게 다가오는 여름을
시샘하는지 오늘은 이른 아침부터 창밖에는
비가 내리네.
그러자 신록은 더욱 싱그러움을 더하고 있네.

지난 5월 28일 30년 만의 만남, 무척 반가웠네.
자네들을 만나니까 그날은 전혀 세월의 흐름을
느끼지 못하였네.

나는 세상을 살면서
행복을 느끼는 것은
자네들과 같은 훌륭한 제자들 두었다는 점이고,
또한 자네들로부터 늘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는 점이네.
특히 만리 타향 이국에서 만남은
더없이 반가웠네.

세상에는 많은 인연의 만남도 있지만
스승과 제자처럼 아름다운 인연의 만남은 없을 것이네.
인류의 문화와 역사는 이 스승과 제자의 만남으로
이어져 왔고, 이어져 가고, 이어져 갈 것이네.

30년 전 그 시절에는 우리 학교 각 학년은 4학급 240명의 아주 자그마한 학교로
학생들은 선생님들을 모두 다 알았고,
선생님들 역시 전교 학생의 이름을 다 기억했던,
그야말로 '작은 것이 아름다운' 시절이었네.


a  로스앤젤레스 샌타모니카 해변 찻집에서 만난 현지거주 이대부고 21기 졸업생들(왼족부터 정종옥, 강영수, 필자, 전영록, 고 김순세 선생. 2004.3.)

로스앤젤레스 샌타모니카 해변 찻집에서 만난 현지거주 이대부고 21기 졸업생들(왼족부터 정종옥, 강영수, 필자, 전영록, 고 김순세 선생. 2004.3.) ⓒ 박도


지금 우리 교육의 현장은
공장에서 대량으로 제품이 쏟아지듯이 
배우는 이도, 가르치는 이도
뜨거운 가슴이 없이 그저 만나고 헤어지는 것 같고,
교육의 바른 길에서 벗어나고 있는 듯하여
안타깝기 그지없네.

사실 교육은 가르치는 훈장과
배우는 학생과 눈빛의 만남이요,
인격과 인격의 만남이어야만 바른 교육이 이루어지네.
30년 전 우리는 그렇게 만났다는데
나는 오늘도 자부심과 행복감을 느끼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언제부턴가 학교가 다투어
대량과 대형을 우선시하며, 우열을 가리고, 빈부를 가리며,
인격의 만남보다 지식의 거래처와 같은 곳으로 변질되는 느낌이 없지 않네.

문화와 철학의 빈곤

지금 생각해 보면 30년 전 나는 모르는 게 너무 많았고,
성격도 모난 데가 많아 수업시간을 비롯한 학교생활에서
내가 여러분에게 짜증을 주었으리라 짐작이 되네.
이 점 뒤늦게나마 깊이 사과 드리네.

이제 다시 교단에 선다면 더 잘 가르칠 수 있을 것 같지만,
세월은 나에게 지난날과 같은 건강과 기회를 주지 않을 뿐더러,
지금과 같은 학교 풍토에서는 교단에 서고 싶지도 않고,
또한 학교에서도 나와 같은 구닥다리는 받아주지도 않을 걸세.

나는 뒤늦게야 내 부족함을 깨닫고
지금도 책을 열심히 읽고,
역사의 현장을 쫓아다니며,
부지런히 배우고 있다네.

그동안 서른 권 정도의 책을 펴냈는데
지난해에는 <영웅 안중근>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등의 책을 펴냈고,
올해는 장편소설집 <제비꽃>, 산문집 <카사, 그리고 나>, <대한제국> 등의
책을 곧 펴낼 예정이네.

우리 역사와 인생에 대해 공부할수록 무명 무지의 지난 세월이 부끄럽고,
또한 새로운 지식을 얻는 기쁨도 있다네.
자네들도 살아있는 한 늘 배우는 자세로 살아가기 바라네.

얼마 전 나의 학창시절 한 동창 얘기를 들었는데,
그는 한때 매우 잘 나가는 기업인으로
아무개 방송국 '성공시대'에 소개될 만큼 화제의 인물이었지만
잠깐 새 추락하여 지금은 폐인 직전이라는 얘기를 들었네.

나는 그 원인을 그 친구는 돈 버는 일에만 전력투구했지
문화와 철학은 소홀이 한 탓으로 돌리고 싶네.
어디 그 친구뿐이겠는가.
고위공직자가, 재벌의 자녀가, 연예인이나 스포츠맨들이
극단적으로 생을 마감하는 것도
그 근본 원인은 건전한 문화 마인드와 철학의 빈곤 탓이라네.

자네들은 이제라도 문화와 예술에 대한 소양을 넓히고
자기 나름대로 생활철학을 세우기를 바라네.

자네들 남은 인생이 순항하기를

이제 자네들도 지명(知命, 50세)에 이른다고 하니 세상살이에
나보다 훨씬 더 많이 알 테고,
내가 특별히 부탁할 것도 없지만(전문분야에서는 내가 오히려 배워야하지만),
그래도 지난날 훈장의 노파심으로 띄우는 글이요,
그날 자네들에게 대접받은 밥값으로
이 글을 보내네.

자네들 남은 인생이 아무쪼록 순항하기를 바라며,
가족들의 건강과 안녕, 특별히 부부간 화목과 해로를 비네
부부간 화목의 비결은 서로간 존중과 배려요.
서로 다름을 빨리 인정하는 것이네.
그리고 그날 이런저런 사정으로 만나지 못한 제자들에게도
아울러 건강과 안녕을 비네.

특히 지구촌 곳곳에 흩어진 여러 제자들에게 건강을 기원하며 안부 전하네.
남은 날도 우리 모두 열심히 사세. 그러면 다시 만날 때 더 반갑다네.
2011년 6월 1일

원주 치악산 아래 '박도글방'에서
옛 훈장 박도 올림

a  2004년 명퇴 직전 나의 마지막 수업장면

2004년 명퇴 직전 나의 마지막 수업장면 ⓒ 윤근혁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지난 5월 28일 이대부고 제21회 졸업생 졸업30주년 홈커밍데이에 부치는 글입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지난 5월 28일 이대부고 제21회 졸업생 졸업30주년 홈커밍데이에 부치는 글입니다.
#제자에게 주는 글 #홈커밍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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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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