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소설의 거장은, 희망을 틔울 수 있을까

필립 K. 딕 걸작선 <화성의 타임슬립>, <죽음의 미로>, <닥터 블러드머니>

등록 2011.06.06 15:51수정 2011.06.06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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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유독 안 팔린다고 소문난 장르가 SF소설이다. 최근 몇 년 사이 SF소설이 베스트셀러에 진입하는 경우는 사실상 없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온라인 서점에서 일시적으로 분야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정도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SF소설의 출간 소식이 뜸해지고 있다. 악순환이다. 해외에서 소문난 SF소설이 출간돼도 반응이 없으니 그마저도 잠잠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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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의 타임슬립> 표지 ⓒ 폴라북스

그래서일까. 출판사 폴라북스에서 선보인 '필립 K. 딕 걸작선'이 궁금해진다.


영화 <블러드 러너>, <토탈 리콜>, <페이첵> 등의 원작자인 필립 K. 딕은 SF분야에서 손꼽히는 거장이다. '필립 K. 딕 걸작선'은 그의 장편소설들만 모은 것으로 <화성의 타임슬립>, <죽음의 미로>, <닥터 블러드머니> 등의 세 작품을 먼저 선보였다.

이 작품들은 국내에서 제 명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안타깝지만, 당장은 어려워 보인다. 필립 K. 딕이 해외에서 유명하다한들 아직까지 국내에서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SF소설 열풍을 일으키기는 역부족이다.

그럼에도 희망적인 것이 보인다. 필립 K. 딕의 작품들이 저마다의 개성과 작품성으로 호의적인 평가를 받으며 조금씩 입소문을 타고 있기 때문이다. SF소설이라는 장르를 넘어서, '재밌는 소설'이라는 소문을 타면서 시리즈가 포털 사이트와 온라인 서점 등에서 추천도서로 분류되고 있다.

그래서인지 온라인 서점의 도서 판매량을 보면 최근에 소개된 SF소설들에 비해 확연히 높다. 독자 리뷰들도 우호적이다. 이대로 간다면, 걸작선이 완간될 때쯤에는 무시 못 할 성과를 얻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갖게 한다. SF소설로써는 고무적인 일이다.

필립 K. 딕의 소설이 '재밌는 소설'로 분류되는 이유는 뭘까? 흔히 SF소설이라면 하면 외계인의 침공이나 우주전쟁 등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필립 K. 딕의 소설에서는 여전히 '인간'이 주인공이자 절대적인 명제이다. 그의 소설에서 SF적인 것은 배경에 불과하다. 혹은 인간의 어떤 내면을 보여주기 위한 적극적인 소재이자 계기에 불과하기도 하다.


'필립 K. 딕 걸작선'의 첫 작품 <화성의 타임슬립>은 지구의 식민지인 화성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지구는 오염됐고 인구는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포화상태다. 그런 때에 인류가 눈을 돌린 것이 화성이다. 인류는 화성에 가서 원주민들을 정복하고 그곳에 거류지를 만든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화성의 타임슬립>은 SF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지만, 그것은 순간에 불과하다.

화성은 물자가 부족하다. 물도 없다. 사람도 없다. 인류는 그곳을 정복했더라도 여전히 지구에 머물고 싶어 한다. 그나마 지구에서 머물지 못하는 사람들이 화성에 왔지만, 문제는 여전하다. 여전히 욕심을 내고, 여전히 남의 것을 빼앗고, 여전히 이기적이다. 지구에서 그랬듯 누군가는 투기로 돈을 벌려고 하고, 누군가는 성공하기 위해 뇌물을 쓰고, 누군가는 괴로워하면서 자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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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블러드머니> 표지 ⓒ 폴라북스

<화성의 타임슬립>은 그런 세상에서, 화성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미국의 어느 도시와 다를 바 없는 것 같은 그곳에서 광기에 사로잡힌, 그래서 결국 파멸하고 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치밀하면서도 정교하게 그리고 있다. SF적인 상상력은 보조에 불과할 뿐 결국 작품을 이끌어나가는 것은, 그리고 작품을 완성시키는 것은 소설로써의 '이야기'인 것이다. 걸작선의 다른 작품들 <죽음의 미로>와 <닥터 블러드머니> 또한 마찬가지.

어떤 행성에 우연히 모인 사람들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함과 두려움에 서로를 죽이기 시작한다는 <죽음의 미로>나 핵폭발 이후의 세계를 그린 <닥터 블러드머니> 또한 SF적인 상상력은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한없이 '약해빠진', 그래서 욕망과 두려움에 단번에 사로잡혀 어떤 일을 벌일지 모르는 인간의 내면을 그리는 배경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모습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던 'SF소설'이라는 것에 상충될 수도 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건 충돌이 아니다. '몰랐다'고 말하는 것이 더 맞을 게다. 필립 K. 딕이 거장으로 불리는 것도, 그의 작품들이 걸작선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되는 중요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인간과 사회를 SF적으로 상상해내는 것이 아니라, SF의 세계에서 인간과 사회를 가장 '명료'하게 말할 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르를 넘어 '재밌는 소설'로 불리는 것일 게다.

작품에 따라 편차가 있겠지만, 그럼에도 걸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작품들이 씨앗처럼 퍼지고 있다. 그것들은 언제쯤 싹을 틔울 수 있을까. SF소설의 황무지 같은 이 땅에서, 조금은 간절하게, 그 순간을 기다려본다.

화성의 타임슬립

필립 K. 딕 지음, 김상훈 옮김,
폴라북스(현대문학), 2011


#필립 K. 딕 #SF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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