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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에 환장한 이 남자, 막나가더니 결국...

[영화로 읽는 세상이야기 89] 자본주의의 탐욕·광기에 관한 고찰 <데어 윌 비 블러드>

11.08.13 16:59최종업데이트11.08.13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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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 주제에 몸통을 흔든' 사건이 세계 증시를 혼돈 속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스탠더드앤푸어스(S&P)가 미국 민주당과 공화당 간의 재정적자 감축과 (부자)증세 등 국가부채 상향조정 협상과정에서 빚어진 갈등을 지적하며 공화당의 반대로 '증세'가 포함되지 않은 것을 국가신용등급 하락의 주요인으로 꼽았기 때문입니다. S&P는 지난 2008년 금융위기를 초래한 공범 중 하나로, 개혁의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위기의 주범으로 '미국국가'를 지목한 아이러니를 연출한 것입니다. 

국가부채의 위기 한 가운데에는 S&P의 경고처럼 '증세'가 놓여있습니다. S&P의 발표 직후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가 세금인상에 반대하는 공화당을 향해 '우파의 광기'라고 맹공을 퍼부은 것 역시 국가부채 악화가 세수부족 즉, 공화당의 부자감세 정책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부자들의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우파의 광기가 실상 어제오늘의 일이 아님을 적나라하게 고찰하는 영화가 있습니다. 탐욕의 화신으로 태어난 한 남자의 멈추지 않는 욕망과 광기를 통해 피로 쓴 자본의 역사를 집중 조명한 걸작 <데어 윌 비 블러드>(2008)입니다.

영화는 1898년부터 1927년까지의 황량한 캘리포니아 사막을 배경으로 '블랙 골드러시'가 미 대륙을 휘젓던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1898년. 먼지로 가득 찬 수직갱도에서 홀로 곡괭이질을 하던 남자가 은맥을 발견하고 다이너마이트를 터트립니다.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다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지만 남자는 은광석만 챙깁니다. 그러던 중 자신의 갱도에서 석유를 발견한 남자는 하루아침에 석유시추업으로 직업을 바꾸고 '블랙 골드러시'에 합류합니다.

1911년. 석유 유정 18개를 소유한 석유업자로 변신한 대니얼 플레인뷰(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마을을 찾아다니며 주민들에게 석유 채굴권을 달라는 설명회를 엽니다. 그러던 중 폴 선데이(폴 다노)라는 청년이 석유가 나는 목장을 소개해 주는 대가로 500달러를 요구합니다. 플레인뷰는 어린 아들 H.W와 함께 리틀 보스턴으로 향하고 폴의 쌍둥이 동생 목사 일라이를 만납니다. 헐값에 목장을 매입한 후 주변의 땅들도 사들이면서 플레인뷰는 본격적으로 석유산업에 뛰어듭니다.

영화가 시작하고 10여 분 넘게 아무런 대사도 없는 오프닝 시퀀스의 명장면은 이 영화의 메시지를 농축해 보여줍니다. 어두운 갱도 속에서 내리치는 곡괭이가 돌에 부딪쳐 불꽃을 튀길 때마다 남자의 눈빛은 번들거리고, 욕망을 분출하기 위한 곡괭이질은 더욱 깊숙이 내리꽂힙니다. 무표정한 남자의 곡괭이질을 건조한 시선으로 클로즈업하며 그가 어떻게 선과 악의 경계를 넘나들다 탐욕의 화신으로 변해가는지를 뒤쫓는 카메라는 영화의 미학을 극대화해 냅니다.

특히 영화는 플레인뷰를 통해 그가 어떻게 '검은 괴물'로 변해가는지에 밀착하면서 엑슨, 걸프, 록펠러 등 미국 석유재벌의 탄생과정을 묘사합니다. 그를 통해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은 개척정신부터 석유자본의 욕망과 탐욕, 가족과 기독교 등 미국이 신봉해 온 가치와 정신을 재조명하면서 20세기를 지배해 온 미국 역사의 뿌리를 천착합니다. 탐욕과 광기의 화신으로 변한 남자는, 미국 자본주의를 상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미국 자본주의는 피를 부르는 자본의 탐욕과 광기 그 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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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개발에 앞서 플레인뷰는 마을 사람들을 모아 일장연설을 합니다. 가족은 곧 아이들이고 아이들의 교육을 책임져야 행복한 미래가 보장된다며 학교를 세우겠노라 역설합니다. 그와 함께 석유만 나면 마을에 도로를 닦고 고용을 창출하고 우물을 파 척박한 땅을 비옥하게 개량해 농사를 지어 가난에서 벗어나 번영을 구가하도록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합니다. 즉, 유정개발은 '가족 사업'이니 마을 주민 모두가 '올인'하라고 촉구합니다.

플레인뷰는 아들을 사업의 전면에 내세웁니다. 주민들을 만날 때나 채굴권을 딸 때나 경쟁업체와 만날 때나 어디든지 10살짜리 아들을 동반하며 '비즈니스 파트너'라고 소개합니다. 그의 이런 자상한 모습은 사람들에게 호감과 신뢰를 심어주고 사업은 승승장구합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가정을 꾸리지 않습니다. 양아들을 친아들인 것처럼 감쪽같이 숨기고 사업의 도구로 이용하는 것처럼, 가족은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위한 자산일 뿐입니다. 사고로 아들이 청력을 잃자 주저 없이 버리고 대신 이복동생에게 공을 들이다 그가 가짜임이 밝혀지자 쏴 죽이고 다시 아들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가족은 사업을 위해 대체할 수 있을 정도면 족합니다.

발가벗겨지는 가족의 실상은 아들의 결혼으로 절정을 맞습니다. 독립선언을 하는 아들에게 플레인뷰는 "넌 처음부터 근본도 모르는 버려진 사생아에 불과했다"며 저주를 퍼붓습니다. 그에게 아들은 자신의 사업을 강탈하려는 경쟁상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일라이 역시 돈에 눈이 뒤집혀 아버지를 구타합니다. 미국이 애지중지하는 하는 가족도 탐욕에 눈이 먼 자본과 기독교 앞에서는 한낱 윤색된 가치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석유 보다 검고 찐득찐득한 탐욕을 꾸역꾸역 쏟아내는 뒤틀어진 영혼에서 사랑과 믿음, 존경과 희망을 함의하는 가족은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기독교 복음주의와의 협력과 대결을 통해 영화는 탐욕의 실체를 보다 명확하게 적시합니다. 미국 석유재벌이 국내외에서 교세 확장을 위해 혈안이 됐던 기독교의 큰 손이었던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석유개발권을 따내기 위해 기독교를 필요로 했던 플레인뷰와 교회 권력을 확보하기 위해 자본이 필요했던 일라이는 이들을 대변하며 신성한 종교적 가치와 타락한 물질적 욕망이 어떻게 한 배를 타는지를 촘촘하게 펼쳐 놓습니다.

플레인뷰의 맞은편에는 일라이가 있습니다. 플레인뷰가 오직 석유만 갈구하듯이 일라이는 오직 교회와 하느님만 갈구합니다. 그러나 둘은 하나입니다. 다만 플레인뷰가 탐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면 일라이는 '신의 이름'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 탐욕과 욕망은 한 치도 어긋남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메리카 드림을 꿈꾸는 개척정신 또한 사기와 술수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들의 탐욕을 통해 드러납니다. 이런 둘의 공존과 대결을 통해 영화는 초기 미국 자본주의의 성격과 함께 평화가 아닌 약탈과 파괴로 점철된 자본의 도덕성을 집중적으로 성찰해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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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대결은 일라이의 완패로 끝납니다. 첫 채굴 때 주민들 앞에서 '아버지의 깃발을 지키는 자랑스러운 아들'이라고 자신을 소개해 달라고 하지만 플레인뷰는 보기 좋게 물 먹입니다. 한술 더 떠 일라이가 자신의 목장을 사면서 약속한 5000달러를 요구하자 거푸 따귀를 후려치며 석유가 흥건한 땅바닥에 처박아 버립니다. 그러나 일라이의 교회에서 세례를 받으면서 둘의 관계는 역전됩니다. 교인들이 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고 머리채를 잡힌 채 일라이에게 따귀를 맞으면서 그의 선창에 따라 플레인뷰는 "나는 마귀"라고 속죄하며 거짓 간증을 합니다. 생애 처음 모욕과 굴욕을 맛보지만 학수고대하던 송유관을 수중에 넣습니다.

엔딩을 앞두고 벌어지는 세 번째 대결에서 영화는 자본이 기독교에 군림하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탐욕을 기반으로 서로의 필요에 따라 일시적인 동거는 했지만 일라이가 자신의 사업과 권위를 넘보면서 둘은 파멸로 치닫습니다. 자신의 대저택 볼링장을 '검은 피'로 물들이며 폭발하는 플레인뷰의 광기와 폭력은 영화 제목이 왜 '피를 부르리라'인지를 여실하게 증명합니다. 검은 석유가 솟구치던 오프닝이나 선혈이 낭자한 클로징이 일란성 쌍둥이임을 암시하는 이 장면은 피의 대가로 자본을 축적한 후 세계 자본주의의 맹주가 된 미국의 역사 바로 그 자체입니다.

부자감세와 복지 망국론 외치는 MB정부에 보내는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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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 크레딧을 앞두고 자신을 진정한 선지자로 규정한 플레인뷰에게 일라이는 우리는 형제라고 호소하지만, 플레인뷰는 그를 가차 없이 제거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석유산업은 현대적 산업으로 분화를 거듭하고 복음주의는 기독교 근본주의로 탈색을 하면서 공화당의 든든한 정치적 후원세력으로 성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플레인뷰는 피를 부르는 탐욕 끝에 "이제 다 끝났다"는 의미심장한 대사를 남기고 영화는 끝납니다. 그러나 '피를 부르리라'는 역사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플레인뷰가 탐욕의 피로 수혈을 거듭해 괴물이 되어가면서도 그토록 갈망했던 '달러'에 서서히 균열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의 미국발 금융쇼크가 지난 금융위기와 다른 점은 기축통화로서의 달러가 지위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달러는 2008년 이후 두 차례에 걸쳐 2조3천억 달러에 달하는 양적완화 실시로 안전자산으로서 지위를 이미 상실했습니다. 지난 9일 미 연준의 버냉키 의장이 2년간 초저금리를 선언한 것처럼 더 이상 달러를 풀 수 있는 여력조차 없습니다. 더욱이 부자증세가 물 건너간 상황에서 디플레이션과 경제 불황이라는 이중침체(더블 딥)가 현실화될 경우 미국의 국가부채 증폭은 막을 길이 없어 보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달러의 위기가 자본의 폭력적 재편으로 이어지고 그 결과 대기업과 부자에게 부의 집중이 가속화되는 반면 긴축재정으로 사회복지비용은 더욱 축소되는 등 사회경제적 양극화가 깊어진다는 것입니다.

한국사회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한나라당과 조중동은 기다렸다는 듯이 미국과 유럽의 재정적자 등이 복지 포퓰리즘에서 비롯됐다며 야당과 시민사회단체가 선점한 복지이슈를 복지 망국론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며 원색적으로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정반대입니다. 미 공화당처럼 법인세를 비롯해 종부세와 양도세 등 '부자감세' 정책을 줄기차게 펼치는 한편 4대강 사업 등 '삽질'에 20조 원 이상을 투입하면서 이명박 정부 3년간 재정적자는 100조 원이 넘고 공공부채도 400조 원이 넘어서면서 참여정부에 비해 무려 6배 이상 급등했습니다.

그런 마당에 플레인뷰처럼 한치의 양보도 없이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기만 하고, 공화당처럼 부자증세를 사생결단 가로 막는 '우파의 광기'를 멈추지 않고, 고통분담 없이 복지 망국론만 주장한다면 한국사회의 공동체는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영화 <데어 윌 비 블러드>가 석양의 지는 해로 전락하고 있는 달러에 대해 묵시록적 경고를 보냈듯이, '피를 부르리라'는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에 다음과 같이 경고할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 대신 실업과 빈곤과 빈부격차에 짓눌린 한국의 청년들이 영국과 이스라엘 등지의 분노한 청년들처럼 '폭동의 거리'로 나설 수도 있다고.

데어 윌 비 블러드 미국발 금융쇼크 복지 망국론 부자증세 영국 폭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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