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혐오세력' 3년 뒤 KBS를 뒤집었다

[정연주의 증언 63] 정체를 알 수 없는 노조의 행보

등록 2011.08.17 09:32수정 2011.08.17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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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대통령이 2008년 8월 11일에 나를 KBS 사장 자리에서 강제 해임했으니, 벌써 3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3년이 지난 요즘 KBS 안팎에서 벌어지는 풍경을 보면, 어떻게 이렇게도 거의 모든 것이 정반대로 되어 버렸는지 의아할 정도다. 이명박 정권 이후 모든 게 뒤집어져 버린 것이 KBS라는 거울을 통해 비춰지는 것 같다.

3년 전에는 'KBS 지키자'는 촛불시민들이 모여들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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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13일 저녁 여의도 KBS앞에서 이명박 정권 공영방송 장악음모 저지를 위한 촛불집회를 열고 있는 시민들이 '퇴진 최시중, 사수 정연주'가 적힌 현수막을 들고 있다. ⓒ 권우성


3년 전, KBS 본관 앞에는 KBS를 지키겠다는 촛불 시민들이 매일 저녁 모여들었다. 유모차를 몰고 온 젊은 주부들로부터 나이든 분들까지 매일 저녁 모였다. 자발적으로 차와 라면을 끓여 촛불 시민들에게 봉사하는 분도 있었고, KBS를 지키겠다며 KBS를 에워싸는 인간 띠도 만들어졌다.

3년 뒤 KBS 본관 앞에는 '친일파 백선엽과 독재자 이승만 찬양방송'을 규탄하는 모임이 최근까지 열렸다. 지난 11일에는 '친일 찬양 방송 KBS 규탄 2차 촛불 문화제'가 오후 7시부터 열렸다. 독립운동단체, 4·19 단체, 한국전쟁 유족회, 시민사회 언론단체 등으로 구성된 '친일 독재 찬양 방송저지 비상대책위원회'는 지난 2일부터 1인 릴레이 단식 농성을 하면서 "KBS가 독립군 토벌대 백선엽을 미화한 것도 모자라 이번에는 친일 독재 이승만까지 미화하려 한다"면서 '친일파 찬양 방송 사과'와 '이승만 찬양방송 중단'을 요구했다.

그리고 최근의 '도청 사건'과 '정치 공작' 의혹을 둘러싸고 KBS 내부에서는 다시 극명한  생각의 차이가 드러나고 있다. KBS 집권세력은 '도청 사건'을 덮으려 하고 있고, KBS의 젊은 구성원들은 '진실'을 밝히라고 요구하고 있다(증언 62 참조). 최근의 '도청 사건' 이후 KBS의 젊은 기자들은 사건 현장에서 "도청이나 하러 가라"는 비아냥을 듣고 있단다. 한때 '국민의 방송'의 당당했던 기자들이 이제는 KBS 로고를 가리고 취재를 해야 하는 모멸스러운 상황을 맞게 되었다.

3년의 세월..."KBS를 지키자"는 거대한 행렬

3년의 세월이 참 많은 것을 바꿔 놓았다. 3년 전 6월 11일, 감사원이 KBS 특별감사를 시작하자, 서울 광화문의 촛불집회에 참석한 수많은 시민들이 "KBS를 지키자"며 거대한 행렬을 이루면서 여의도 KBS 쪽으로 왔다. 그 즈음 인터넷에는 이런 알림이 번지고 있었다.


"우리 모두 KBS 앞에서 촛불집회 합시다. 공영방송은 우리의 손으로 지켜내야 합니다. KBS가 무너지면 MBC는 자동으로 쓸려 갑니다. KBS 정연주씨 무너지면 두 공중파는 단박에 꼴통 5적들 수중에 갑니다. 5년 아니라 저 공중파를 이용하여 조중동까지 가동하면 대한민국 바보 만드는 거 일도 아닙니다. 단언하는데 KBS 넘어가면 최소 10년은 정권 연장 됩니다. KBS 촛불집회에서 우리가 주장할 3가지는 (1) 정연주 사장 사퇴 압력 반대 (2) KBS 표적감사 반대 (3) 최시중 방통위원장 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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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저녁 공영방송 사수를 주장하는 시민들이 여의도 KBS 본사앞에서 촛불집회를 열고 있는 가운데 KBS앞에는 노조가 내건 정연주 사장 퇴진 현수막이 세워져 있다. ⓒ 권우성

그렇게 시작된 KBS 앞 촛불집회는 내가 강제 해임된 뒤에도 계속됐다. 촛불집회가 열리는 KBS 본관 주변에는 여러 펼침막들이 걸렸는데, 그 중에는 '국민의 방송이 되겠습니다 - '촛불과 함께 하는 KBS 일부 기자''라는 내용도 있었다. KBS 앞 촛불시위를 못마땅하게 여긴, 당시 KBS 노조를 비롯한 KBS 내부의 '촛불 혐오세력'이 엄존하고 있음을 이 펼침막은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3년 전 '촛불 시민'과 '촛불 집회'를 이렇게 다르게 보았던 것처럼, 요즘 '도청 사건'과 '정치 공작' 사건에 대해, 김인규 체제의 KBS에 대해서도 인식과 가치의 차이는 엄청나다. 그리고 당시 '촛불 혐오세력'이 지금의 KBS 지배세력과 거의 비슷하게 겹친다. 우리 사회의 모습과도 별로 다르지 않다. 3년 전 촛불집회를 혐오하던 사람들이 지금 이명박 정권을 떠받드는 세력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KBS에도 당시 KBS 앞 촛불집회를 혐오하던 사람들이 지금의 집권세력을 이루고 있다.

3년 전, '정연주 퇴진'에 올인했던 KBS 노조(위원장 박승규)는 KBS 앞의 촛불집회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당시 KBS 노조는 '정연주 퇴진'에만 올인한 게 아니라 이에 반대하는 목소리에 대해서도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래서 노조가 내걸었던 만장 가운데는 "정연주 비호세력 함께 떠나라"는 내용도 있었다. '정연주 퇴진'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정연주 비호세력'으로 지목하고, 그들에게 KBS를 떠나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 노조였기에 'KBS를 지키겠다'는 촛불시민과 집회에 대해 심한 거부감을 보였고, '정연주 사장 퇴진'을 외치는 만장을 보고 분노한 촛불시민들과 노조 집행부가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촛불'을 혐오했던 세력들

당시 이러한 분위기는 여러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다. <미디어 오늘>은 "KBS 노조, 촛불집회에 '심기 불편'"이라는 제목의 기사(2008.6.14일자)에서 당시의 사정을 자세하게 전했고, <연합뉴스>도 "정연주 사장의 거취를 놓고 노-노 갈등을 보여온 KBS에서 본관 앞의 촛불집회를 둘러싸고 또 다른 내부 갈등이 불거지고 있다"고 전했다.

그 즈음 인터넷에 이런 글이 올랐다.

지난 6월 11일 뉴라이트의 청구로 감사원이 KBS에 대한 표적감사를 시작했을 때 KBS 본관 앞 촛불집회에 갔다 온 사람입니다. 당일 촛불집회에 나왔던 70여명의 아고리언들은 KBS 노조가 "정연주 사장 퇴진"을 외치고 있다는 것에 많이 의아해 했지요. "아니, 왜 노조가 2MB의 '낙하산 인사' 길을 열어주는 정연주 사장 퇴진을 외치고 있지?" 하고 말입니다.

그 이후 KBS 노조의 실체에 대해 아고리언들이 인터넷 여기저기에서 정보를 찾아내고, 촛불집회를 계속하면서 KBS 노조가 '어용 뉴라이트 노조'라는 사실이 많이 알려졌습니다. 아고리언들이 "어용노조 물러가라!"라는 현수막을 내걸게 된 것도 그 때문이구요...

이제 본격적으로 KBS 어용 노조의 실체에 대해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노동조합'하면 그래도 민주적이고 선명하고 투쟁적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는데요. 요즘 대기업 정규직 노동조합에서 많이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노동조합이라고 해서 다 같은 민주노조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KBS 노조의 정체를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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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규 KBS 노조 위원장이 지난 2008년 8월 13일 낮 서울 여의도 KBS 본관 민주광장에서 열린 '공권력 난입규탄 및 낙하산 사장 임명 저지 결의대회'에서 낙하산 사장 반대를 요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유성호


그러면서 이 글은 KBS 노조의 역사를 자세하게 전했다. 이런 종류의 주장은 KBS 내부에서도 이미 있었다. KBS 노조가 '정연주 퇴진'을 위해 올인할 때인 2008년 5월 7일, 강명욱 피디가 사내 게시판에 'KBS 노조는 정체를 모르겠다'는 제목의 글을 올린 적이 있었다. '촛불과 함께 하는 KBS 일부 기자'와 같은 생각을 가진 피디의 글이었다. 이런 '일부 기자'와 피디들이 KBS 새 노조의 주축이며, 지금 KBS의 집권세력에 맞서 비판과 저항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강명욱 피디의 글을 보면, 그들의 생각이 어떤지 생생하게 보인다.

지난 3월 28일 열린 한 토론회에서 "KBS 노조의 정체를 모르겠다"는 주장이 학자와 시민운동 관계자들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또 "KBS노조가 제 역할을 하지 않으니 언론운동이 어렵다"는 주장도 있었다.

사실 누구에게라도 "정체를 모르겠다"는 말은 함부로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이 말 속에는 '너를 믿을 수 없다'는 강한 부정의 뜻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조합집행부 입장에서는 턱없는 모략이라고 반박하고 싶겠지만 지금 KBS노조(이하 조합)는 의혹을 사기에 충분한 행동을 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다 아는 얘기지만 지금 정 사장을 가장 '죽이고 싶은' 곳은 한나라당이다. 중요한  기관 중에 KBS에서만 아직 정권교체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총리직보다 낫다'는 KBS 사장 자리가 아직까지도 수중에 들어오지 않았으니 오죽 답답할까...

정권교체 완수에 목을 매는 세력들은 물론 KBS 안에도 있다. 한나라당과 "한 배"를 타고 있고, "정권을 찾아오는 데 일조"하겠다는 말까지 스스럼없이 한 자들이다. 이들도 하루빨리 정 사장으로부터 인사권을 탈취해서 이른바 "부역자", "추종세력"들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싶을 것이다. 조합이 애초부터 올바로 중심을 잡고 있었다면 이런 자들이 어떻게 사내에서 활개를 칠 수 있었겠는가.

결국 조합이 뭐라고 변명하든 이 시점에서의 정 사장 퇴진 요구는 '한나라당의 2중대를 자임한다'는 의혹과, 사내 일부 세력들에게 권력투쟁의 공간을 열어준다는 비판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KBS 방송 카메라 기자가 2008년 6월 23일 오후 서울 여의도 KBS 본관 앞에 정연주 사장 퇴진을 요구하는 만장 옆을 지나고 있다. ⓒ 유성호

현재 조합의 입장은 "정연주 죽어야 KBS 산다"는 주장 속에 압축돼 있다. 그런데 어떤 주장이 동의를 얻기 위해서는 그 주장 속에 사실적이든 논리적이든 어떤 합리적 근거를 담아야 하지만 조합은 자기주장의 논리적 인과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 어떤- 최소한 그럴듯한- 근거조차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조합은 기껏 정 사장이 왜 나가야 하는지(정 사장이 죽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만 그간 해온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고, 정 사장 이후의 문제에 대해서는 "정치적 독립, 방송에 대한 전문성, 도덕성을 갖춘 중립적 인물이 돼야 한다"는 지극히 공허한 원칙만 밝혔을 뿐이다...


단적인 예가 여의도에서, 나아가 전국의 모든 KBS 청사에서 펄럭이는 만장들이다. 그 수많은 만장에 온통 정 사장을 저주하는 분노만 가득할 뿐, 정작 공영방송에  큰 위협으로 등장한 이명박 정권에 대한 경고는 하나도 안 보인다. 그리고 공영방송에 우호적인 학자와 시민단체들로부터는 노동조합으로서의 정체성마저 의심받고 있고, 언론노조에 대해서는 가장 기본적인 조합비조차 1년 가까이 내지 않고 있다. 말하자면 우호 · 연대 세력으로부터 철저하게 고립돼 있다는 것이다.        


말로는 "정연주 아닌 KBS 어떻게 살릴 것인가로 논의를 모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실제로는 정 사장 퇴진에만 몰두하고 있고, 내외의 역량을 모두 모아도 어려운 때에 안으로는 "부역자"니 "추종세력"이니 하면서 분열을 조장하고, 밖의 우호 · 연대 세력으로부터는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고 있다. 이러면서 과연 무슨 힘으로 공영방송을 지키는 큰 싸움을 하겠다는 말인가?...

3년 전 해임을 앞두고 KBS 내부는 이렇게 심하게 멍들어가고 있었다. 그 가운데 KBS 노조가 있었다. 그리고 당시 노조는 '여론조사'라는 이름의 장난도 서슴없이 저지르고 있었다.
#정연주 #KBS #KBS 노조 #박승규 #강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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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동아일보 기자, 한겨레 워싱턴 특파원, 논설주간, kbs 사장. 기록으로 역사에 증언하려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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