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한겨울에 묵히고 삭혀야 제 맛이 나는 '동치미'

연극 '동치미'를 보고

등록 2011.11.13 10:51수정 2011.11.13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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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연극 '동치미'의 무대 작은 무대가 배우와 관객과의 폭을 좁혀준다.

연극 '동치미'의 무대 작은 무대가 배우와 관객과의 폭을 좁혀준다. ⓒ 권수아


a 대학로 파라디소극장 파라디소극장에서는 지난 1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연극 '동치미'가 공연된다.

대학로 파라디소극장 파라디소극장에서는 지난 1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연극 '동치미'가 공연된다. ⓒ 권수아


날씨가 추워지니 사람을 찾게 된다. 젊은 연인들은 팔짱을 끼고 걸어가며, 가족들은 모여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이때 우리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노인 분들은 무얼 하며 계실까.

대학로의 파라디 소극장에서는 우리가 '가까운 사람들이 먼저'라는 핑계로 너무 오랫동안 찾아뵙지 못한 부모님들에 관한 이야기를 '동치미'라는 한 편의 연극으로 조심스럽게 풀어나가고 있다.


연극의 주인공은 퇴직 공무원인 아버지 김만복씨와 그의 아내 정이분씨. 김만복씨는 철없는 아들딸들을 탓하고, 아내에게 쌀쌀맞게 대하지만 속마음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늘 자식 걱정에 이가 약한 아내에게 임플란트를 해주고 싶어 하는 그는 가장이라는 이유만으로 모진 세월을 견뎌야 했고 또 약한 모습은 보일 수 없었던 우리 아버지들의 전형적 모습이다.

노부부는 벤치에 앉아 미소를 짓기 위해 '김치'나 '치즈' 대신 '동치미'라고 부르며 사진을 찍는다. 동치미처럼 시원한 노부부의 미소를 시작으로 그들의 아픈 시간들은 재조명된다.  부잣집에 시집보낸 딸을 위해 시댁에 선물을 갖다 주고 그 대문 앞에서 절하고, 사업하겠다고 아버지 돈까지 날려버린 아들을 나무라기는커녕 다시 일어나라고 기 세워주고, 연극하느라 돈 없는 막내에게 아내 몰래 돈을 쥐어주는 아버지 김만복. 그 뒤에서 어머니 정여사는 울고 웃는다.

자식을 위해 돈 한 푼 맘대로 쓰지 못했던 김만복씨는 정여사의 죽음을 한으로 맞이한다. 종합병동에서 건강검진을 받아야 할 정여사는 영안실에서 죽어 누워 있다. 막내의 "아빠면 다야! 하고 싶은 말 다 하란 말이야!"라는 절규에 김만복씨는 평생 가슴에 담아두었던 아픔을 꺼내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객석은 눈물바다가 된다.

우리는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사이, 부모님께 얼마나 큰 죄를 짓고 살았나. 부모님은 그런 자식들을 감싸고 얼마나 오랫동안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만 했는가. 김만복씨는 한맺힌 부르짖음을 끝으로 인생의 막을 내린다. 그리고 암적. 연극이 진행되는 내내 흐르는 노래 '찔레꽃'은 다시 한 번 아주 크게 울려 퍼지고, 관객들의 한숨과 울음을 감싸준다. 아버지의 영정사진이 놓인 제사상은 연극의 마지막 장면이다.

'내 생 마지막 비가'라는 원제를 갖고 있는 연극 '동치미'는 부인을 잃은 후 식음을 전폐하며 지내다 엿새만에 세상을 떠났다는 김상옥 시인의 삶을 모티프로 삼았다고 한다. 김상옥 시인의 대표작 '사향'을 조용히 읊어본다.


눈을 가만 감으면 굽이 잦은 풀밭 길이,
개울물 돌돌돌 길섶으로 흘러가고,
백양 숲 사립을 가린 초집들도 보이구요.

송아지 몰고 오며 바라보던 진달래도
저녁 노을처럼 산을 둘러 퍼질 것을,
어마씨 그리운 솜씨에 향그러운 꽃지짐.


어질고 고운 그들 멧남새도 캐어오리.
집집 끼니마다 봄을 씹고 사는 마을,
감았던 그 눈을 뜨면 마음 도로 애젓하오.

김상옥 '사향' 전문

향기로운 꽃지짐을 만들던 어마씨처럼 살았지만, 이내 우리의 관심밖에서 잊혀지던 노인 분들을 모시고 차가운 한겨울에 묵히고 삭혀야 제 맛이 나는 '동치미' 같은 연극을 보러 가보자. 눈을 감았다 뜨면 애젓해지는 그 풍경이 대학로 작은 소극장에서 펼쳐진다.
#동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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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문화에 관심이 많은 청년. 서울시립대학교 일반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현대문학을 공부했다. 감명 깊었던 현대문학을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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