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로맨틱한 고해성사, '자기소개서'

'갑'과 '을'이 만나는 그 순간에 벌어지는 은밀한 구애

등록 2011.12.01 11:07수정 2011.12.02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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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대학 동아리의 동문·재학생들이 한 자리에 모였을 때의 일입니다. 분위기가 무르익던 무렵, 이제 마흔 줄에 접어든 선배 한 분이 저를 보고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추어올려 주셨습니다. "이 친구 보면 대한민국의 청년이 뭔지 보인다니깐!" 물론 선배님의 칭찬은 제게 과분했습니다. 그렇지만 전 그간의 제 모습들에서 자그마한 '청년'의 편린을 발견해주신 그 선배가 슬쩍 고맙기도 했습니다. (2010년 8월, 모 회사 공채 자기소개서 중에서)

 

문장들이 퍽 매끄럽고 말쑥하다. 저 다섯 문장 속에 오타나 비문 따위가 들어있을 리 만무하다. 못해도 50번은 읽고 또 읽으며 수정을 거듭하지 않았던가. 글에 잔잔히 배어 있는 예의 바르고 신중한 어조도 함께 눈에 띈다. 그 예의 바름은, 내용상의 "대한민국의 청년=나"라는 의젓한 자기자랑과 만나, 극적인 시너지 효과를 낼 것이었다.

 

가능한 한 객관적이고 초연해 보이는 태도를 유지하는 것도 체크포인트다. 말하자면, '겸손한 자세'로 '자신을 과시'해야 한다는 것. 어차피 널리 유통될 성격의 글도 아니므로, 눈치 볼 것 없이 정공법으로 '읽을 사람'만 공략하면 된다. 섬세하고, 전략적으로. 그러나 그 글이 본래의 목적을 벗어나 저렇게 밖으로 튀어나오면, 대개는 억 소리가 날 만큼 민망하고 오글거리게 마련이다. 원래 겸손한 자랑은 그냥 '나 잘났다'는 자랑보다 훨씬 더 무서운 법이니깐.

 

위의 인용 구절도, 지난해 내가 실제로 작성해 제출했던 자기소개서의 도입부다. 내 나이는 스물여덟. 작년 2월 대학을 졸업했고, 지금도 돈을 벌면서 공부에 열을 올리는 중이다. 졸업하고 2년 가까운 시간, 나도 남들처럼 나름의 꿈을 좇으며 아등바등 살았다. '나 이대로 성공도 못해보고 늙어버리는 거 아님?'이라고 불안해하면서, 함께 지원했던 회사에 턱하니 합격한 친구(아니, 경쟁자)를 축하해주면서, 패배자의 설움을 곱씹으면서, 두 해를 보냈다.

 

 '지난 7월, 내가 가장 가고 싶어했던 회사 공채의 서류전형에서 고배를 마셨다. 저 박씨 사이에서 내 이름을 발견하지 못했을 때의 절망감….'
'지난 7월, 내가 가장 가고 싶어했던 회사 공채의 서류전형에서 고배를 마셨다. 저 박씨 사이에서 내 이름을 발견하지 못했을 때의 절망감….' 박성열
'지난 7월, 내가 가장 가고 싶어했던 회사 공채의 서류전형에서 고배를 마셨다. 저 박씨 사이에서 내 이름을 발견하지 못했을 때의 절망감….' ⓒ 박성열

어쨌거나 졸업 후 백수, '알바', 임시계약직, 자그마한 회사의 정규직 등등 각종 처지를 두루 겪으면서도 변치 않은 사실은, 내가 여전히 '자기'를 '소개'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내 곁을 변함없이 지켜줬고, 또 앞으로도 지켜주어야 하는 건, USB의 '취업' 폴더 안에 차곡차곡 꽂혀있는 취업용 자기소개서 50여 개. 썩 알아주는 곳의 정규직으로 취업한 여자친구가, 어느 날 데이트 내내 무언(無言)의 짜증과 재촉을 반복하던 그 순간에도, 내 주머니 속 '취업' 폴더는 서글프리만큼 풍성했던 것이다.

 

자기소개서, 그동안 나도 많이 썼다. 혼자 쓰기도 했고, 스터디 그룹에서 다 같이 써보기도 했다. 함께 공부하던 이들과 서로 열심히 첨삭도 해주었다. 서류 통과율은 괜찮은 편이었다. 그런 '내공'이 쌓여, 매번 2, 3차 전형에서 죽을 쑤는 자신의 무능력도 망각한 채, 가끔씩 조언을 구하는 친구나 후배의 자기소개서에 냉정한 칼날을 들이대기도 했다. 그러나 '자소서'를 아무리 많이 써봤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또 다시 새롭게 쓸 때마다 느끼는 점은, 취업을 위한 '자기소개'란 것은 역시 사람의 진을 쏙 빼놓는다는 것이었다.

 

자기소개서, 그 달콤쌉싸름한 비밀의 문서. 기업 인사담당자와 내가 살짝 새끼손가락을 걸게 만드는 우정의 징표이자, 내 젊은 시절의 꿈과 목표와 의지가 응축된 내밀하고도 화려한 고해성사는, 취업이 간절한 우리들 심정을 쥐락펴락한다. 갑과 을의 숙명적 관계가 '찡긋'하는 한 순간을 위해, 우린 저마다 홀린 듯이 자소서의 빈 칸을 채워가는 것이다. 잠시 사진기자를 지망했던 내 친구 J군의 자소서 도입부는, 차라리 비장하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지난 6개월 동안 찍은 사진이 만 육천 장쯤 됩니다. 저는 홀로 컸습니다. 누구 하나 챙겨주지도 가르쳐주지도 않는 조직 안에서…"

 

나는 이걸 보고 웃음을 참지 못했지만, J군은 이번엔 내가 써둔 자소서를 죽 읽어보더니 진지한 말투로 "니가 이렇게까지 '곤조'가 없을 줄은 몰랐다"고 나를 꾸짖었다.

 

'자소설.' 흔히 취업준비생들이 자소서를 빗대어 부르는 말이다. 수십 대 일, 또는 수백 수천 대 일의 경쟁을 목전에 두고, 쟁쟁한 지원자들과 경쟁하며, 스스로를 자유롭게 소개해보라니. 또한 그 소개가 최초 서류전형의 당락을 크게 좌우하는 건 물론이요, 이후 면접에서도 중요한 참고자료로 활용된다니. 지원자들은 아무래도 이 한두 쪽짜리 문서에 혼신의 힘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취업용 자기소개는 대부분 호소력 짙은 '소설적 요소'를 듬뿍 담게 마련이다. 거기에는 삶의 굴곡이, 절망하지 않는 의지와 노력이, 그리고 그것들을 디테일하게 표현할 수 있는 스토리텔링이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나는 작년 가을, 어느 자소서의 <성장과정> 란에 "성장기의 밝은 생명력과 함께 고등학교 이후의 힘든 경험들은 차차 저를 한 사람의 '어른'으로 가다듬어 주었습니다. 무엇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귀중한 정신의 힘을 길러주었습니다"고 적었다. 물론 내게는 얼마간의 힘든 경험이 있었고, 나는 그런 일들과 극복의 노력을 이 자소서에 풍부하게 상술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내가 "귀중한 정신의 힘"을 갖춘 "어른"이 되었다고 말하기에는 역시 낯간지럽다. 낯간지러워도 어쩌랴. 나는 여전히 방황하고 흔들리는 갈대 같은 인간임이 분명하지만, 일단 진중한 이미지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이 중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조금만 더 뻔뻔스럽게 나아간다면, 이런 수법으로까지 스스로를 어필하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곧잘 제게 놀라고 경탄합니다. 너는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열심히 사느냐고." (그해 같은 시기의 또 다른 자기소개서에서)

 

이 기막힌 '자기소개의 승부' 앞에서 우리들은 모두 얼굴에 슬그머니 철면피를 깔아야 한다. 거의 모든 인사담당자들도 어련히 지원자들의 '합리적 과장'을 눈감아주는 것 같다. 아니, 회사 입장에선 지원자들의 '진짜 스토리'를 일일이 확인할 수도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 없는 '스토리'를 아예 처음부터 지어내는 얌체들도 없진 않겠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있는 것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굴려 '뻥 아닌 뻥'을 친다. 요컨대 자기소개서란 자신의 잘남과 부끄러움, 자만과 겸손의 사이를 절묘하게 넘나들면서도, 결국은 자신을 선택해야 한다는 은밀한 구애(求愛)의 몸짓이라고 할 만하다. 요즘 같은 시대에 이런 진지한 로맨스는 어디서도 찾기 힘들다.

 

그러므로, 자소서는 힘을 가진 성인들에게 청춘을 '전시하는' 일. 또는 어느 유명 지식인의 표현대로, 그 문서의 본질은 결국 '젊음의 상품화'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자기소개서는 어쩌면 어른이 되는 '통과앓이'의 한 단면이 아닐까도 싶다.

 

야생의 원주민들은 예나 지금이나 '어른들'이 주도해 청년들의 생살을 베거나, 들짐승과 대결시킨다. 성인식은 언제나 공동체의 가장 화려하고 떠들썩한 잔치일 게다. 사실 그 정도로 노골적이진 않더라도, 우리들의 경쟁과 기본 원리는 비슷하다. 불안과 고통의 감내가 있고, 어른의 세계로 편입하고 싶어하는 젊은이들의 욕망이 있고, 공동체의 기본 수칙에 대한 내면화 과정이 있는 것이다.

 

그 혼란스러운 젊은이들의 '욕망'과 '내면화'의 중심에, 분명 '자기소개서'가 있다. 스스로를 조금씩 알게 모르게 치장하면서, 힘을 쥔 이들 앞에 자신의 '가치'를 소리 높여 과시하면서, 나도, 나의 친구와 후배들도, 그렇게 어른이 되어간다. 박카스류 광고 속의 청춘들처럼, 로맨틱하고 매끈하게. 특유의 '자양강장'적인 향기를 풍기면서 말이다.

#자기소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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