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면에서 본 박 패밀리의 보금자리.
고은아
마치 누군가가 계획한 일처럼결혼 후 에릭은 치과의사가 되기 위해 학업을 계속해야 했고, 로리는 중학교 교사로 3년쯤 일했다. 첫아들 케일럽(승기) 출산 후 로리는 교사 일을 그만두었다. 플로리다 주와 앨라배마 주를 거치면서 학업을 다 마칠 때쯤에는 둘째 실리아(은서)가 태어났다.
결혼 전부터 에릭은 나중에 부모님을 모시고 살고 싶다고 했는데, 로리도 동의한 터였다. 하지만 부모님은 아들 장가도 보냈고, 손주들도 봤고, 딸도 대학원에 다니고 있으니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서 살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오랫동안 운영해온 치킨가게도 정리하고 은퇴 준비를 했다. 미국에는 1년에 한 석 달쯤 와서 지내다 갈 요량으로.
그때가 2006년 가을, 추수감사절 즈음 아들 부부는 부모님이 있는 조지아 주에 집을 짓기 위해 땅을 사들였다. 부모님이 지낼 공간을 생각해 지하층도 설계에 넣을 생각이었지만 당장에 꾸밀 계획은 아니었다. 비용도 비용이었지만 부모님 집이 따로 있었고, 한국에 나갈 계획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사고가 터졌다. 2006년 12월 9일, 평소 같으면 산책 나가자는 이경임씨의 말에 얼른 따라나섰을 박천일 씨가 그날은 왠지 집 앞 나무의 가지를 좀 치고 싶었다. 천성적으로 부지런한 박천일씨가 집 안팎의 이런저런 일을 할 때면 '조심하라'는 아내의 잔소리를 피할 수 없는 터라 마침 잘됐다고 생각하고 집에 혼자 남았다.
한 시간쯤 뒤 이경임씨가 돌아왔을 때 어디선가 "헬프 미!"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무에 사다리를 걸쳐 놓고 올라가 작업을 하다 떨어진 박천일씨는 그 자리에서 일어서지를 못했다. 결국 앰뷸런스를 불러야만 했다.
전신의 심한 통증을 호소했지만 처음 찾은 병원에서는 '어깨 탈골'이라는 진단을 내리고 퇴원해도 된다고 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일어서지를 못하는 것이었다. 석연치 않았지만 의사가 괜찮다고 하는데 어쩌겠는가.
집에 와서도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다 이경임씨는 누워 있는 박천일씨의 요가 흥건히 젖은 것을 발견하고서야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변이 나왔지만 본인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것이다.
애틀랜타 그래디병원에서는 '4번, 5번 척수 신경 손상으로 인한 목 아래 전신마비'라는 진단을 내리고 당장 수술에 들어갔다. 그러나 손상된 신경 기능을 되돌리진 못했다. 첫 번째 병원에서 오진을 해 귀중한 초기 치료의 기회를 날려버린 것이다. 명백한 의료사고였다.

▲ 막내 백일에 백일 떡을 들고 찍은 가족사진.
고은아
이후 박씨 가족은 의료소송을 제기했고, 지루한 공방 끝에 결국 승소해 보상도 받았다. 알다시피 의료사고에서 승소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때문에 2008년 당시 미국 언론들에서도 취재를 할 정도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의료비가 비싸기로 유명한 미국에서 오랜 치료와 재활에 들어가는 비용은 보상금을 이미 뛰어넘은 지 오래다.
사고 직전에 집 지을 땅을 계약했던 아들 내외는 그해 크리스마스 즈음에 대폭 수정한 계획을 들고 건축업자와 만났다. 지하층을 장애인 주거용으로 완전 마감하는 계획이었다. 로리는 "사고는 슬픈 일이었지만 모든 일이 계획한 일처럼 절묘한 타이밍으로 진행됐다"고 회상했다.
2007년 여름에 집이 완공됐고, 에릭과 로리는 그때 이후 죽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다. 그리고 이 집에서 셋째 딸 해나(영서)와 넷째 딸 엘리슨(민서)이 태어났다.
아들·딸·손주·며느리 그리고 사돈까지 한집에백일잔치가 있던 날, 가까운 친척들과 로리네 친정 식구들이 다 모였다. 로리의 언니 킴벌리도 자녀가 셋. 남동생 마이클은 아직 결혼 전이다. 친정어머니 데보라 플롯씨는 사위 가족과 처음 상견례를 하던 때를 회상해 주었다. 박천일씨가 사고를 당하기 훨씬 전 얘기다.
"뷰포드 하이웨이의 한 한국식당에서 만났는데, 단번에 박 패밀리를 좋아하게 됐어요. 아주 다정다감한 사람들이었어요. 우리 가족에게 국제결혼은 처음 있는 일이었지만, 따지자면 저한테도 아메리카 인디언의 피가 섞여 있으니까 아시아하고 아주 관련이 없진 않아요."데보라씨가 조상까지 들먹이며 돈독한 사돈관계를 자랑한 건 빈말이 아니었다. 로리의 친정아버지 래리씨는 지난 2009년 11월에 20년 가까이 다닌 회사에서 해고를 당했다. 정확히 20년에서 한 달이 모자라 20년 이상 근무했을 때 받을 수 있는 혜택도 받지 못한 채 직장을 잃어 한동안 힘든 시간을 보냈는데, 다행히 실업 1년이 다 돼 가던 작년 10월 다시 일자리를 구했다. 그런데 새로 구한 직장이 로리네 집에서 훨씬 가까운 탓에 주중에는 딸네 집 2층 손님방에서 기거하고, 주말에는 1시간 좀 넘게 걸리는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주말이 되면, 예전 부모님 집에서 혼자 사는 브랜디가 가족들을 만나러 와서 함께 지낸다. 그러니까 현재 이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이 모두 열 명인 셈이다.
브랜디가 한 주도 거르지 않고 가족에게 돌아오는 이유는 아버지 때문이다. 항상 전신 마사지가 필요한 아버지를 위해 어머니는 아침저녁으로 다리를 담당하고 오빠는 팔을 담당하는데, 주말에는 오빠 대신 자기가 마사지를 하기 위해서다. 브랜디는 박천일씨가 미국 내 10대 재활병원 중 하나인 애틀랜타 쉐퍼드센터에 입원하고 있을 당시 가족을 대표해 재활교육을 받아 전문가 수준으로 아버지를 돌본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던가. 박천일씨는 이제 특별히 제작된 수저를 가지고 스스로 밥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좋아졌다. 하반신은 여전히 감각이 전혀 없어 대소변을 받아내야 하지만, 삶에 대한 박천일씨의 의지가 워낙 강해 앞으로 더 큰 기적을 보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 로리의 친정 식구들.
고은아
가까운 곳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들의 선택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온 가족이 함께하며 서로 위해줄 때 우리 안에 영그는 열매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사람들. 로리는 시부모와 함께 살면서 앞선 세대가 치열한 삶 속에서 건져 올린 지혜를 배운다고 했다. 이민자로서 새로운 곳에 적응하면서 발버둥을 쳤던 경험과 인내가 우리들 삶에 꼭 필요한 것 같다고도 했다. 그게 그간 너무 풍요롭게 살아온 미국 사람들한테 부족한 덕목이라고 하면서.
1977년에 이민 와서 공장 일부터 시작했던 시부모는 이제 허리 펴고 살 만하게 됐을 때 그렇게 험한 사고를 당하고도 인생을 비관하지 않았다. 묵묵히 고난을 이겨내는 남편 가족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고난 속에도 축복을 누릴 수 있는 인생의 비밀'을 알게 됐다고 말하는 로리는 참 현명한 여자인 것 같다.
에릭과 로리가 지금 초등학교 1학년 과정인 케일럽과 프리킨더(PRE KINDER) 과정인 실리아에게 '홈스쿨링'을 하고 있는 것은 이 사려 깊은 부부가 내린 참으로 자연스러운 선택처럼 보인다. 물론 부모님이 곁에서 도와줄 수 있기에 내릴 수 있는 결정이기도 했다.
"케일럽이 프리스쿨을 한 학기 다녔을 때 홈스쿨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해 봤어요. 그래서 시험 삼아 한 학기만 해보자고 했죠. 처음에는 좀 힘든 점도 많았는데, 장점이 더 많은 것 같았어요. 케일럽이 지금 공립학교에 간다면 아침 7시경에 스쿨버스를 타고 아빠보다 먼저 학교에 가야 하고, 아빠가 퇴근해서 저녁 6시 반쯤 들어오는데 케일럽은 7시 반이면 자야 되잖아요. 아빠와 함께 지낼 수 있는 시간이 하루에 겨우 1시간밖에 안 되는 건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으니까 한국말을 몸으로 감으로 익히게 되는 것도 좋고요. 홈스쿨링만 고집한다거나 언제까지 하겠다고 정한 건 없어요. 매 학기, 매해마다 어떤 게 최선일까 생각해서 결정할 거예요. 학력의 기초를 쌓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진 지금처럼 해도 괜찮을 것 같아요."'조기유학', '기러기 부부' 등으로 해체되는 한국의 수많은 가족들은 정말 이런 고려를 해 보고 결정을 내렸을까? 이들 부부가 앞으로 살면서 부딪히는 문제들에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게 최선일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행복을 찾는 방법을 아는 이들이기에.

▲ 홈스쿨링 중인 엄마와 아들.
고은아

▲ 오빠가 엄마와 공부할 때 네 살배기 실리아는 'BUTTERFLY' 철자 쓰기에 몰두하고 있고, 두 살배기 해나는 색칠공부를 하고 있다. 해나는 아직 홈스쿨링을 시작하지 않았지만, 자기도 공부한다며 매일 열심이다.
고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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