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 앞둔 말년 공보의, 진로 걱정에 그만...

보건지소 공중보건의의 일일 사진사 체험기

등록 2011.12.21 16:38수정 2011.12.21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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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세의 나이에도 젊음의 기운이 느껴지는 신순담 할머니 ⓒ 최성규


군대로 치면 말년병장, 복무완료를 눈앞에 둔 공중보건의(공보의) 3년 차다. 비슷한 상황인 공보의들이 모이면 앞으로의 진로를 함께 고민한다. 부원장으로 취직하거나, 개원을 하고, 병원에 들어갈 것이다. 그 가운데 개원 예정인 이가 자신의 노하우를 알려주었다. 주부의 마음을 알기 위해 주부잡지를 구독한다는 그에게서 어떤 말이 나올지 기대됐다.


"환자분들이 오면 사진을 찍는 거지. 이름이랑 같이 저장해 놨다가 틈나는 대로 보는 거야. 다음에 오실 때 내가 아는 체하면 얼마나 반가워하시겠냐?"

가장 좋아하는 시인 김춘수의 '꽃'이 이렇게 응용되는구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몸짓에 불과한 환자분을 꽃으로 만드는 비법.

사람은 자기를 알아봐 주는 사람을 좋아한다. 이 고전적 명제에 현대 기술을 어떻게 접목할 것인가? 틈나는 대로 보기 위해서는 휴대가 가능해야 한다. 대한민국에서 천만 명이 넘게 사용하는 스마트폰. 많은 사진을 담아두기 위해서는 커다란 공간이 필요하다. 온라인 저장공간인 클라우드 서비스. 포털사이트에서 계정을 받아 아무 사진이나 올려 보았다. 스마트폰에 클라우드 앱을 내려받아 접속하니 빠르고 선명하게 보이는 사진. 준비는 끝났다.

아침 일찍 환자분들이 오셨다. 면담이 끝나자 여느 때처럼 당연하게 일어서는 송태엽 할머니.

"잠깐만요. 제가 앞으로 어머님 얼굴빛을 관찰할 거예요. 얼굴에 건강상태가 나타나거든요. 그래서 사진을 찍어볼게요."


애교 섞인 약간의 거짓말. 찰칵. 딱딱하게 굳어 있는 표정. 다시 찰칵. 여전한 증명사진. "자, 웃어보세요. 이~"하니 이를 한껏 드러내신다. "아니, 아니. 입 벌리지 말고 그냥 히." 작품은 무수한 컷과 실패 속에서 나온다.

당신에 관한 글을 인터넷에 올린 걸 알고 계신 조점심 할머니. 사진을 찍으려 하자 대뜸 하시는 말. "또 올릴라고 그러제?" 그러면서 이미 잡고 있는 포즈. 입가에 번지는 염화미소. 너무 웃어서 눈이 작게 나왔다. 눈은 크게 뜨시구요. 다시 갑니다.

시골 공중보건의가 만난 '결정적 순간'

왼쪽부터 김봉례 할머니, 김봉심 할머니, 송태엽 할머니 ⓒ 최성규



어떤 할머니는 진료 마지막에 '설진'을 했다. 설진이란 환자가 내민 혀를 보고 설태의 형상과 혀의 상태를 보는 것이다. 진료를 마치고 사진기를 들자 바로 혀를 내밀며 포즈를 취하신다. 혀를 찍는 걸로 생각하신 것이다. 기자들 앞에서 장난스레 혀를 내밀었던 아인슈타인이 여기도 계셨다.

자매 할머니가 오셨다. 김봉심 할머니와 김봉례 할머니. 관절염을 앓는 언니와 빈혈기가 있는 동생. 책상 옆에 여럿 놔둔 의자에 옹기종기 앉으신다. 면담 후 또 한 번의 포토타임. 언니 동생 사진을 나란히 찍어주고 보니 가족사진관이 된 기분이다.

사진에 환자분 성함이 들어가야 하니 더욱 자세히 보게 된다. 신순담 할머니 접수증을 보니 16으로 시작하는 주민등록번호. 자그마치 96세. 당신 동네에서 가장 나이가 많으신 내 친할머니보다도 선배다. 하지만 검은 빛깔이 완연한 머리칼은 나이를 잊게 한다. 그 젊음의 기운이 잘 드러나도록 주의 깊게 사진 촬영.

오후까지 서른 명 넘는 환자분이 오셨다. 그 중 남자는 불과 6명. 사진 하나하나가 개성 있는 여자들에 비해 다들 엇비슷한 남자들. 남자와 여자의 차이는 미소를 보면 안다. 감정 표현이 서투른 할아버지들. 입꼬리를 올려보지만 영 어색한 남자들에 비해 여자들은 함박웃음이다. 사진으로 아침을 시작했다가 사진으로 저녁이 끝났다.

촬영 분량을 정리하는 시간. 찍을 때는 몰랐지만 모아놓고 보니 생동감이 감돈다. 주름살 속에 스며 있는 생생한 삶의 흔적들. 순간의 컷 속에 그 사람의 인생이 담겨 있었다. 리얼리즘 사진의 대가인 '최민식' 작가는 '인간이 거기 있기에 나는 셔터를 눌렀다'고 했다. 50여 년의 사진 인생동안 찍어온 그의 작품에는 오직 인간만이 있는데, 가진 것 없이 소외받고 낙오하고 짓밟힌 사람들이다. 멋진 풍경이나 미녀의 사진은 아니지만, 삶의 진실이 녹아있는 사진은 또 다른 아름다움을 준다.

일개 시골 공보의에게 침을 맞기 위해 밥까지 굶으며 서너 시간을 기다렸던 환자분들. 주변에 한의원이 없어 더욱 타는 듯한 목마름. 진심이 묻어 있는 얼굴 표정에서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말했던 '결정적 순간'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최민식 #공중보건의 #보건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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