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 여기선 더이상...우리 자리 옮겨"

[연재소설- 하얀여우 9] 뜨거운 여자

등록 2011.12.23 17:52수정 2011.12.31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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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을까? 상구 저 녀석은 당장 벌어 먹여야 할 입이 셋이나 되는데?"
"너무 걱정하지 마 상범씨, 다 잘되려고 그러는 거야, 처음엔 좀 힘들겠지만…… 사람은 급해야 일을 더 열심히 하는 거야, 두고 봐 상구씨 아마 금방 부자가 될 테니까."
"그래도 걱정스러워, 우리가 하는 사업이 당장 돈이 들어오는 그런 사업은 아니잖아?"
"상범씨는 너무 착해서 탈이야, 상구씨도 다 생각이 있으니까 저러는 거야…… 제발 걱정 그만하고…… 이 누나 말을 믿으세요!"

이렇게 말하며 고윤희는 마치 어린애 다루듯 내 등을 토닥거렸다. 그리곤 가만히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샴푸 냄새를 맡으니 신기하게도 마음이 안정됐다. 그녀 어깨에 팔을 올리고 턱을 받쳐 들자 그녀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내 입술이 그녀 입술에 닿으려 할 때 뉴튼 패밀리(Newtona Family) 의 스마일 어게인(Smile Again) 이 흘러 나왔다. 우리가 신청한 노래다. 우린 닮은 점이 거의 없는 커플이었지만 딱 하나 닮은 게 있었다. 바로 음악을 듣는 취향이다.

음악 카페 '집시'에서 처음 스마일 어게인을 신청 했을 때. 그녀는 "어머 상범씨도 이 노래 좋아해요? 나도 무척 좋아하는데"라며 기뻐 한 적이 있다. 그  후로 우린 '집시'에 올 때마다 이 노래를 신청하곤 했다.   

음악을 듣는 취향 말고는 닮은 점이 하나도 없었다. 그녀는 예전에 사귀던 남자친구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풀어낼 정도로 대책 없이 솔직했다. 내가 듣기에 민망한 이야기, 이를테면 잠자리에서 벌어졌던 일까지 슬쩍 슬쩍 비칠 정도다. 그럴 때마다 난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숙였고 그제야 그녀는 좀 심했다고 느꼈는지 슬며시 말 꼬리를 잘랐다.    

그녀는 가끔 내 손을 잡아끌고 나이트클럽에 갔다. 화려한 조명 아래만 서면 우린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커플이 됐다. 그녀는 물 만난 듯 유연하게 움직이며 리듬을 탔고 때론 발광하듯 격렬한 음악에 몸을 던졌다.

반면, 내 몸은 스스로 생각해 봐도 창피 할 정도로 뻣뻣했다. 춤을 춘답시고 몸을 흔들기는 했지만 남들이 보면 가만히 서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의 움직임이었다. 이런 내 모습을 보며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눈빛을 보내곤 했다.


노래가 거의 끝날 때까지 우린 서로의 입술을 탐미했다. 그녀 입술은 부드러웠고 입 안에서는 은은한 향기가 흘러 나왔다. 스마일 어게인은 부드러우면서도 강렬함이 있는 음악이었다. 노래 끝 부분, 강렬한 기타 연주가 흐를 때 난 살며시 그녀의 입술에서 내 입술을 떼었다. 그녀가 눈을 뜨고 내 눈을 바라보았다. 무엇인가를 갈망하는 눈빛이었다.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부드러운 그녀 몸이 기타 소리와 함께 내 몸으로 들어왔다.

"나 노래 듣고 싶어, 상범씨가 부르는 노래, 우리 노래방 가자."
"그럴까? 오늘도 나 혼자 노래 불러야 하지? 오늘은 어떤 노래 불러 줄까?"

우린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노래방으로 향했다. 우리에겐 카페 칸막이보다 좀 더 밀폐된 공간이 필요했다.

고윤희는 지독한 음치였다. 춤 출 때의 리듬감이 노래 부를 때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지는 것인지, 신기할 정도로 노래를 못 불렀다.

딱 한번, 내 성화에 못 이겨 마지못해 그녀가 노래를 부른 적이 있다. 가수 심수봉이 부른 '사랑밖에 난 몰라'였다. 그 때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 곤욕을 치렀다. 음정이나 박자를 따질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도저히 노래를 부른다고는 볼 수 없는, 그저 크고 떨리는 목소리로 가사를 따라 읽는다고 밖에 볼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녀는 내 눈치를 슬슬 보다가 1절도 끝내지 못하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 뒤로는 난 그녀에게 노래를 불러 보라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녀 또한 마이크를 잡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내 노래 실력은 아마추어 치고는 꽤 쓸 만한 수준이다. 학교나 군대, 그리고 예전에 다니던 직장에서 노래 할 일이 생기면 너나 할 것 없이 나를 찾았었다. 그녀는 듣는 것을 좋아했다. 내가 노래를 부를 때 가만히 듣고 있다가 갑자기 와락 끌어안기도 하고 입을 맞추기도 했다. 언젠가 노래방에 가면 왜 그렇게 빨리 뜨거워지느냐고 그녀에게 물은 적이 있다. 그때 그녀는 술에 취하듯 내 노래에 취한다고 대답했다.

밀폐된 공간은 우리 몸을 더욱 뜨겁게 했다. 노래를 서너 곡 불렀을 때쯤에는 거의 부둥켜 안고 있는 자세가 돼 있었다. 그녀 등 뒤로 손을 뻗어 브래지어 끈을 풀었다. 그 다음 블라우스를 들어 올리자 그녀의 하얀 피부가 붉은 조명을 받으며 빛났다.

"그만, 그만해 상범씨, 우리 자리 옮겨, 여기서는 더 이상 안돼, 상범씨 집으로 가."
"으음~그래 우리 나가자."

우린 슈퍼마켓에 들러 맥주 몇 병과 마른 오징어를 사서 자취방으로 향했다. 방문을 닫기 무섭게 그녀는 내 옷을 벗겼고, 질세라 나도 그녀의 옷을 벗겨서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집어 던졌다.

이렇게 그녀 몸을 탐닉하며  불안감을 떨쳐 버렸다. 상구가 회사를 때려치울 때 난 불안감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혹시 일이 잘못되면 그 원망은 고스란히 내게 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이런 종류의 불안감에 휩싸여 초조해질 때마다 그녀는 내게 큰 위안이 되었다.
#하얀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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