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셔츠 한 장 잘못 입으면 큰일 납니다

['지못미' 올해의 책①] <미친 세상에 저항하기>

등록 2011.12.26 16:49수정 2011.12.29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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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책의 유통기한은 요구르트보다 짧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권씩 쏟아지는 새 책에 밀려 어느새 독자들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간 책들. 이대로 잊혀지기에는 참 아까운 책인데 '지켜주지 못해 미안'했던 책들이 참 많습니다. 한 해를 보내며, 그 가운데 '지못미' 올해의 책 세 권을 골라 다시 읽어봤습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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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세상에 저항하기> 책표지 ⓒ 마티

"역사가 창조적이려면, 또한 과거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가능한 미래를 예견하려면, 일순간 스쳐 지나간 일일지언정 사람들이 저항하고 함께 참여하고 때로는 승리하는 능력을 보여줬던 과거의 숨겨진 일화들을 드러냄으로써 새로운 가능성들을 강조해야 마땅하다고 믿는다."(하워드 진, <미국민중사> 중에서)

<미친 세상에 저항하기>라는 책을 산 건 순전히 '옮긴이의 글'에 인용된 하워드 진의 말 때문이었다. <미친 세상에 저항하기>가 어떤 책인지는 전부터 알고 있었다. 일전에 '부시 정권의 비민주적 행태에 맞선 미국 시민들의 목소리를 담은 책'이라는 말을 듣고 한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은 했다.


이 책의 저자 중 한 명이 미국 독립언론 <데모크라시 나우!>의 창립자 겸 진행자 에이미 굿맨이라는 것도 흥미로웠다(다른 한 명은 그녀의 동생이자 독립 저널리스트인 데이비드 굿맨이다). 주류 언론이 다루지 않는 미국 사회의 그림자를 충실히 기록했을 것이라는 기대가 생겼다. 하지만 사실 미국 사회의 어두운 면을 기록한 책이 한두 권도 아니었기 때문에 굳이 살 생각까지는 없었다. 서점에서 이 책을 집어 들고 뒤적거리다가 하워드 진의 말을 발견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이 책을 사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미국의 진보사학자 하워드 진은 이제 세상에 없지만, 생전에 촘스키와 함께 미국을 대표하는 비판적 지성이었다. 명성으로 따지자면 하워드 진보다 촘스키가 한 수 위겠지만, 나는 하워드 진을 훨씬 높게 평가한다. 그의 글 속에 녹아 있는 민중에 대한 애정과 암담한 현실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낙관주의를 보며 깊은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워드 진의 대표작 <미국민중사>를 읽는 동안 얼마나 많은 밑줄을 그었는지 셀 수 없을 지경이다.

그런데 이 책을 우리말로 옮긴 노시내는 "<미친 세상에 저항하기>는 하워드 진의 충고를 충실히 따르는 책"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하워드 진의 말처럼 저자들은 미국 전역을 다니며 "저항하고 함께 참여하고 때로는 승리하는 능력을 보여줬던" 평범한 사람들을 만나 그대로 묻힐 뻔했던 이야기를 담아냈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워드 진의 팬을 자처하는 나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이 책을 살 수밖에.

9·11 이후 만들어진 '애국법'... 암담한 미국의 현실

<미친 세상에 저항하기>가 보여주는 미국의 현실은 암담하다. 아직도 온존하는 인종차별 속에 흑인들은 부당한 차별을 받고, 정부 방침에 반대하는 목소리는 표출하지 못한다. 또한 그 과정에서 시민적 자유 또한 위협받고 있다. 특히 9·11 이후에 만들어진 애국법은 미국의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애국법은 FBI가 휘두를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인 '국가보안자료요구서'의 발부 요건을 획기적으로 완화시켰다. 결국, FBI는 법원의 심사 없이도 '국가보안자료요구서'를 발부해 전화·재무기록·이메일 등을 압수수색할 수 있게 됐다. 애국법이 통과되기 전인 2000년에는 8500건의 요구서가 발부됐지만, 2004년에는 5만6000건이 발부됐다고 한다.

도서관과 테러리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도서관도 요구서의 마수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어느날 코네티컷 주의 도서관 연합체 '라이브러리 커넥션'에 FBI 요원들이 찾아와 '국가보안자료요구서'를 내밀었다.

국제테러 방지를 위해 2005년 2월 15일 오후 2시부터 2시 45분 사이에 도서관의 컴퓨터를 이용한 '모든 개인과 단체의 이용자 정보', '이용대금 지불 및 접속 정보 일체'를 넘기라는 내용이었다. 코네티컷 주의 사서들은 이용자의 개인정보를 지키기 위해 이에 맞서기로 하지만, 요구서의 한 구절이 그들의 발목을 붙잡았다.

"이 요구서의 수취인은 FBI가 정보나 기록을 수색·입수했다는 사실을 타인에게 누설해서는 안 된다."  

사서들은 가족에게도 자신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말할 수 없었고, '코네티컷 사서들에게 벌어진 사건'에 관한 질문을 받을까 봐 애국법에 대해서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애국법 옹호자들이 열렬히 애국법을 찬양하는 동안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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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법을 악용해 코네티컷 주 도서관 사서들에게 이용자 정보를 요구한 FBI를 고발한 시사만화 ⓒ 마티


책 속 미국 이야기... 남의 일 같지 않다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휩쓸고 지나간 뉴올리언스에서는 미국 사회의 어두운 면이 가감 없이 드러났다. 공권력은 뉴올리언스의 가난한 이재민을 버렸다.

"저소득층을 위한 공공임대주택에 살던 5100가구 중 자기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가구의 비율은 4분의 1에도 못 미쳤다. 돌아가려 해도 돌아갈 곳이 없었다. 홍수 피해로 집이 완전히 파괴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뉴올리언스 시 당국이 빈곤층이 되돌아오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이다."(<미친 세상에 저항하기> 55쪽)

공권력은 허리케인을 가난한 흑인을 몰아낼 구실로 삼았다. 공화당 하원의원 리처드 베이커는 카트리나 발생 며칠 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뉴올리언스 공공임대주택이 드디어 깨끗이 청소됐네. 우리가 못한 일을 하나님이 해주셨군."

2007년 12월 20일, 시의회는 공공임대주택 4500채의 철거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공공임대주택이 있던 자리에는 골프장을 지을 계획이었다. 시의회에서 철거 반대 시위를 했다는 이유로 체포된 민권변호사 빌 퀴글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시의회에서 환호하거나 구호를 외치면 체포되지만 4500명이 사는 아파트 단지는 맘대로 때려 부숴도 되는 체제에서 산다."

<미친 세상에 저항하기>의 저자들은 미국의 민주주의가 이미 위험 수준에 다다랐다고 말한다. "인종차별적인 체포, 전쟁 도발, 불법 도청, 고문, 이민자 일제 검거 등의 범죄행위가 멀쩡한 대낮에 벌어진다"고. 경찰은 학생증을 제시하지 못한 이란계 미국인에게 전기 충격을 가하고, 수업 시간에 학생들과 이라크전에 대해 토론한 교사는 해직된다. 슬픈 것은 이런 광경이 우리에게는 무슨 이유인지 낯설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치부하고 싶었지만

나는 한국에서 다시는 이런 책이 별 필요 없기를 바랐다. 민주화된 지 24년이다. 역사가 거꾸로 가는 일은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책의 번역출간은 시의적절할 뿐 아니라 도리어 절실하다는 판단을 출판사와 공유하며 마음이 착잡했다.

'옮긴이의 글' 중 한 대목이다. 그의 말처럼 이 책을 읽는 동안 우리나라 이야기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이 가끔 들었다. 특히 표현의 자유가 억압받는 사례를 읽으면 우리 사회의 모습이 자꾸만 겹친다.

NGO인 '글로벌 익스체인지'의 라에드 자라르는 아랍어로 쓰인 티셔츠를 입고 공항에 갔다가 직원에게 제지당한다. "내가 뭐라고 쓰인 티셔츠를 입든 그건 헌법이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에 해당하는 것 아닙니까?"라는 그의 항변은 묵살 당하고, 결국 다른 티셔츠로 갈아입은 후에야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윌튼고등학교는 이라크 전쟁을 다룬 연극 <갈등의 목소리>의 상연을 금지했다. 지구온난화 문제의 심각성을 지적한 핸슨 박사는 계속 그런 발언을 하면 "심각한 결과"가 따를 것이라는 경고를 받기도 한다.

우리 사회에서도 비슷한, 혹은 한술 더 뜨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 '대통령에 대한 욕설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2MB18nomA' 트위터 계정이 접속 차단된 일 ▲ 4대강 공사를 다룬 <PD수첩> '4대강 수심 6m의 비밀'과 <추적60분> '사업권 회수 논란, 4대강의 쟁점은?'이 결방 사태를 빚은 후에 간신히 방영된 일 ▲ '4대강 양심선언'을 했다는 이유로 중징계를 받은 김이태 연구원 ▲ KBS의 G20 관련 보도를 비판했다가 역시 중징계를 받은 김용진 기자 ▲ 인터넷에 허위사실을 유포했다는 혐의로 체포됐던 미네르바 ▲ 최근에 유죄 판결을 받고 수감된 정봉주 전 의원 등….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내 마음은 착잡했다. 어디까지나 미국 일이라고,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치부하고 싶었지만 이제까지 우리가 힘겹게 일궈온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현실이 자꾸 마음을 무겁게 한다. 

전단지 한 장에서 거대한 움직임이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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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문구가 아랍어와 영어로 인쇄된 티셔츠. ⓒ 마티

그러나 이 책은 암담한 현실을 보여주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이 <미친 세상에 저항하기>는 "저항하고 함께 참여하고 때로는 승리하는 능력을 보여줬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반전예술가모임의 예술가 수천 명은 자라르가 입었던 것과 똑같은 아랍어 티셔츠를 입고 JFK공항에 모여들었고, 무사히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연극 <갈등의 목소리>는 윌튼고등학교에서는 공연할 수 없었지만, 뉴욕의 유명 극장들이 자기 공연장을 이용하라고 제안했다. 결국, 뉴욕과 코네티컷의 극장에서 아홉 차례나 공연을 할 수 있었다. 지구온난화에 반대하는 집회는 '정치적 기온'을 계속 상승시켜 기후변화 문제를 국제사회의 주요 안건으로 만들기도 했다.

덕분에 우리는 이들의 행동에서 희망을 볼 수 있다. 작고 사소한 행동에서부터 비로소 변화가 시작된다는 희망. '고작 몇 명으로 현실을 바꿀 수 있겠느냐'고 미리 포기할 필요는 없다. "한 명으로 시작했어도 결국 여럿이 되는 것, 바로 그게 운동이다." 반전 이라크 참전군인회 활동가로 이라크 전쟁 투쟁에 앞장선 매든은 이렇게 말했다.

"제가 이 투쟁에 얽힌 계기는 동료가 어쩌다 전단지 한 장을 봤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기획하는 작은 이벤트를 쓸데없는 일로 평가절하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누가 본 전단지 한 장 때문에 병사 2000명이 서명을 했거든요. 이 일에 여러분들이 고무됐으면 합니다."

2000명이라는 숫자가 적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1969년 베트남전쟁 종결 탄원서에 1366명이 서명한 이래 이토록 많은 현역 미군 병사들이 공개적으로 반전 의사를 표명한 적은 없었다고 한다. 이 거대한 움직임이 전단지 한 장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은 아직 절망할 때가 아니라는 교훈을 준다.

고작 700여 명이 만든 희망... 그 끝은 창대했다

우리 사회에서도 희망의 증거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가장 가까운 예는 희망버스다. 희망버스는 평범한 시민과 노동자의 연대라는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고, 한진중공업 노사타결을 이끌어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희망버스가 아니었다면 한진중공업 사태가 이처럼 사회적 이슈가 되지도 못했을 것이고, 김진숙 지도위원은 아직도 크레인에서 외로이 농성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1차 희망버스 참가자는 700여 명에 불과했다. 희망버스의 시작은 초라했지만, 그 끝은 창대했다. 희망버스는 한진중공업 노사타결의 가장 큰 원동력이 됐고, 이제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희망텐트로 발전했다.

뿐만 아니다. 제주도 강정마을에서는 해군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제주도민들과 함께하고 있고, 재능교육 노동자들은 4년 넘게 정리해고에 맞서 싸우고 있다. 시그네틱스에서, 유성기업에서, 현대차 전주비정규직지회에서, KEC에서, 그리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불의에 맞서 크고 작은 싸움을 벌이고 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광기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의 작은 행동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그 행동에 동참한다면 희망은 더 커질 것이다.

"변화의 과정에 참여하기 위해 거대한 영웅적 행동에 착수할 필요는 없다. 작은 행동이라도 수백만의 사람들이 반복한다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하워드 진,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중에서)

덧붙이는 글 | <미친 세상에 저항하기> 에이미 굿맨·데이비드 굿맨 씀, 마티 펴냄, 2011년 7월, 1만3500원


덧붙이는 글 <미친 세상에 저항하기> 에이미 굿맨·데이비드 굿맨 씀, 마티 펴냄, 2011년 7월, 1만3500원

미친 세상에 저항하기 -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8가지 행동들

에이미 굿맨 & 데이비드 굿맨 지음, 노시내 옮김,
마티, 2011


#하워드 진 #데모크라시 나우 #애국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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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15기 인턴기자. 2015.4~2018.9 금속노조 활동가. 2019.12~한겨레출판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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