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난전화 2만3천 건... 소방관만 탓할 건가

[주장] 암행어사와 매뉴얼... 김문수 도지사는 매뉴얼 잘 지키고 있나

등록 2011.12.29 10:35수정 2011.12.30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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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수 경기도지사(자료사진). ⓒ 권우성

김문수 경기도지사(자료사진). ⓒ 권우성

'나 도지사 김문숩니다'

 

조선시대 암행어사의 핵심은 궁색한 차림새였다. 어사또가 "암행어사 출도요!"를 외치며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는 건, 수령들의 불법, 비리 사실이 탐지되었을 때였다. 공개적으로 직무집행을 개시한 암행어사는 문서를 읽고 창고를 점검하는 등 관리들의 업무에 대해 적정 여부를 검토한 후 봉고파직과 같은 처벌을 내렸다. 이름을 감추고 사태를 파악한 뒤 적절한 과정을 거쳐 조치를 취한 것이다.

 

지난 19일 자신이 건 119 문의 전화에 불친절하게 응대한 당시 소방관 두 명을 질책한 김 도지사의 태도가 옛 암행어사들과 사뭇 대조된다.

 

소방당국은 '매뉴얼대로 관등성명을 대지 않아' 처벌을 내렸다지만, 정황상 '도지사 김문수'를 알아보지 못한 괘씸죄를 적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어 그래, 나 도지사 김문숩니다"라며 김 도지사는 전화연결이 되자마자 자신이 누구인지부터 말했다. 소방관은 "무슨 일 때문이냐"고 용건을 물었고, 김 도지사가 대답 대신 소방관 이름을 묻자 장난전화라 생각한 소방관이 전화를 끊었다.

 

김 도지사가 전화를 다시 걸어 '도지사 김문수'임을 재차 강조하고 조금 전 근무자의 이름을 물어봤지만, 두 번째 소방관도 이를 믿지 않았다. 소방관은 "이 전화는 비상전화다. 무슨 일 때문에 전화 했는지 이야기 하라"고 물었고, 김 도지사는 "도지사가 누구냐고 묻는데 대답을 안 하느냐"고 언짢아하다 결국 전화를 끊었다. 김 도지사는 곧바로 경기도소방재난본부장에게 전화를 걸어 '전화 응대교육을 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두 소방관은 며칠 뒤 23일 포천과 가평소방서로 인사 조치를 받았다.

 

장난전화 2만3천 건 현실... 소방관만 탓할 것인가

 

소방방재청 통계에 따르면 2010년 한 해에만 119신고전화는 1300만 건이 넘고, 이중 장난전화가 2만3천 건에 달한다. 하루에 수백 통씩 되는 전화 가운데 정말 긴급한 신고를 가려내기 위해, 소방관들은 신속하게 전화의 내용을 파악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 대고 자신이 누군지 알아 달라고, 또 이름이 뭔지 물어보는 전화가 온다면 근무자는 어떤 생각을 할까? 다짜고짜 '도지사 김문수' 운운하며 용건을 말하는 대신 근무자의 이름을 물으니, 소방관들에겐 "거기 중국집이죠"와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설령 도지사 대하는 태도에 잠시 기분이 나빴다 할지라도 자신이 먼저 전화한 이유를 설명했다면 문제될 일이 없었다. 부족한 인원으로 2교대 근무를 하는 소방관들에게 김 도지사는 감정노동자의 친절까지 기대한 것이다.

 

물론 근무 규정을 지키지 않은 공무원에 대한 처벌은 중요하다. 하지만 처벌은 단지 특정 상황을 두고 내릴 것이 아니라, 그러한 상황이 나타나는 근무 환경과 현황을 고려해 모두가 수긍할 수 있도록 결정해야 한다. 규정대로 하지 않은 잘못에 대해 처벌하려면 규정대로 하기 힘든 근무현실을 충분히 검토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 수없이 장난전화를 받는 119소방관들 입장에서는 김 도지사를 알아채는 일보다 촌각을 다투는 긴급한 전화에 대비하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하다.

 

그러므로 김 도지사가 직접 처벌명령을 내리진 않았다 하더라도, 이 일로 인해 두 소방관이 인사조치를 받았다면 이에 대한 철회를 관계자에게 요청해야 한다. 민생을 겪어보겠다며 택시기사 자격까지 딴 김 도지사이니, 일일 소방관이 되어 119전화를 직접 받아보고 처벌을 요청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일 것이다.

 

암행어사와 도지사의 차이

 

암행어사들은 자신을 감추는 대신 사람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춘향가에 어사또가 되어 남원에 돌아간 이몽룡을 '비렁거리', 즉 거지로 표현하는 데서 그 행색을 짐작해볼 수 있다. 폐포파립(弊袍破笠) 남루한 선비 모습으로 변장하고 저잣거리를 돌며 고을 관리들의 근무행태를 파악한 것이다. 부정을 자행하거나 부패한 관리들은 암행어사가 언제 나타날지 몰라 두려워했고, 그만큼 백성들은 암행어사의 비밀스런 등장을 바라곤 칭송했다. '나 김문수요' 하고 나타나 관등성명부터 대라는 그런 어사또였다면, 관리들의 잘못을 찾아내지도 못했을 뿐더러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기도 어려웠으리라.

 

경기도는 강원도를 제외하고 소방항공대의 운항횟수가 514건으로 가장 많은 지자체다. 운항횟수가 563건인 강원도에 산악 지형이 많은 것을 감안하면 사실상 전국에서 소방항공대가 가장 자주 출동하는 지역이 경기도인 것이다.

 

이런 경기도에 배정되어 있는 헬기는 3대뿐이다. 김 도지사가 2006년부터 올해 6월까지 총 93회에 걸쳐 이용했다는 소방헬기는, 소방항공대가 보유한 26대의 헬기 중 경기도가 보유한 3대 중 한 대다. 1200만 시민을 위해 마련된 헬기를 자가용처럼 이용한 김 도지사는 근무 중 매뉴얼을 잘 지키고 있는 것일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온라인 미디어 <단비뉴스>(www.danbinews.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합니다.

2011.12.29 10:35 ⓒ 2011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온라인 미디어 <단비뉴스>(www.danbinews.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합니다.
#김문수 #소방관 #최원석 #도지사 #단비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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