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 김정은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빈소에 참배하고 있다.
연합뉴스-AP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급서로 20대 후반의 나이에 한 나라의 지도자로 등장한 김정은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에게 핵무기는 무엇일까? 아버지가 물려준 전략적 자산일까? 부채일까? 억측의 영역에 속할 수밖에 없는 질문들을 떠올린 이유는 북한을 포함한 한반도의 미래를 '김정은이 핵문제에 대해 어떤 선택을 내릴 것인가'라는 질문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아들 김정은 역시 혼란스러울 것이다. "대국들의 틈에 끼여 파란많던 이 땅을 영영 누구도 넘겨다보지"(노동신문 28일자) 못하게 하는 강력한 억제력으로 간주한다면 핵무기를 '자산'이라고 여겨질 것이다. 동시에 핵무기를 갖고 있는 상태에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유훈이자 자신의 당면 과제인 "인민들이 이밥에 고깃국 먹는" 세상을 만들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북핵의 또 다른 얼굴인 '부채'이다. 20대 후반의 나이에 짊어지기에는 너무나도 무거운 딜레마인 셈이다.
MB식의 화법은 '핵을 포기해, 그럼 도와줄게'이다. 뒤집어서 말하면 '핵을 포기하지 않으면 국물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핵무기를 보유한 나라가 '그림의 떡'을 보고 핵을 포기한 사례는 없다. 이는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인 '비핵개방 3000'의 참담한 실패로 거듭 입증되었다.
지금까지 한-미-일 정부가 택한 방법은 북한에게 고통의 크기를 늘려 핵포기를 유도·압박한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채찍론'이다. 그러나 북한 정권이 인민의 먹고사는 문제보다 국가안보를 우선시하고 중국이 버티고 있는 한, 채찍은 북한의 핵포기를 가져올 만큼 치명적일 수 없다. 이는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북핵'이라는 커다란 고민거리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남한도 핵무기를 개발하거나 미국 핵무기라도 들여와서 '공포의 균형'을 이뤄야 할까? 비현실적이고도 자학적인 방법이다. 지금처럼 남한은 미국의 핵우산 아래에서, 북한은 "핵 억제력"을 갖고 있는 상태에서 평화공존을 모색해야 할까? 북한이 핵을 보유한 것이 엄연한 현실이고, 과거 미국과 소련, 미국과 중국이 서로 핵을 가진 상태에서 데탕트를 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남북한 사이에는 핵을 제외하고도 풀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다는 점에서 고민해 봐야 할 문제이다.
그러나 서로를 절멸시킬 수 있는 독침을 품고 있는 상태에서의, 식은땀이 나는 상태에서의 평화는 냉전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치, 남북관계, 남북한 내부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한반도에서 '공포의 균형'과 평화공존이 양립하기 어렵다는 것이 냉엄한 현실이다.
대안은 '협상의 법칙'을 바꾸는 것밖에 없다. 한반도 비핵화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핵 협상의 피로감을 토로하고 북한의 핵포기 가능성에 회의론을 제기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협상다운 협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다. 한국과 미국은 실패한 외교를 김정일 체제를 비난하는 것으로 갈음하려고 했다. 김정일에게 기대할 것이 없다며 정권 교체나 흡수통일을 추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컸다. 이런 관행을 확 바꿔야 한다.
핵포기는 김정은 정권에게 엄청난 결단을 요하는 문제이다. 이는 거꾸로 김정은 정권으로 하여금 핵포기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한-미-일 3국에게도 이에 걸맞은 전략적 결단이 요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건 바로 적대관계를 청산하겠다는 의지와 정책을 가리킨다.
대북정책을 바꿔야 하는 이유나는 앞의 글을 통해 김정은 정권의 핵포기가 더욱 어려워진 이유를 국가 안보상의 '억제력'과 중국으로의 지나친 종속 견제, 그리고 북한 내부의 정치 문제로 나눠 설명한 바 있다. 북핵 해법은 바로 이 세 가지 이유를 뒤집을 수 있는 접근법에서 찾을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북한에게 '다른 수단에 의한 안보'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과 남북·북미·북일 관계 정상화를 통해 북핵의 뿌리를 캐내는 작업에 착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핵무장을 선택한 모든 나라가 그러했듯이 북한 핵무장의 가장 큰 동기는 국가 안보 때문이다. 이 점을 인식하고 또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하지 않는 한, 북핵 외교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신세를 벗어날 수 없다.
둘째는 북한에 대한 중국의 과도한 영향력을 견제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핵무장이 아니라 남북·북미·북일 관계 정상화에 있다는 인식을 북한과 공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 역시 이미 이 점을 잘 알고 있고, 지난 20년간 대외 관계 정상화를 위해 협상과 벼랑끝 전술을 반복해왔던 이유 가운데 하나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등거리 외교' 전략이 김정은 체제에서 달라질 이유는 없다.
김정은 등장 이후 '북한의 살 길은 개혁개방에 있다'는 목소리가 더욱 높아지고 있지만, 한-미-일 3국이 빗장을 걸어 잠그고 있는 한, 이는 공허한 말장난에 불과하다. 한-미-일의 적극적인 대북 관계 개선 노력이 가시화될 때, 비로소 김정은 정권의 개혁개방과 대중 관계, 그리고 '약자의 한(恨)'이 서린 핵무기에 대한 인식과 정책의 변화가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셋째는 북한의 군부를 비롯한 강경파의 영향력을 견제하고 온건파와 협상파의 입지를 강화시켜 줄 수 있는 섬세하고도 전략적인 접근이 요구된다. 불필요하게 과도한 대북 군사 태세를 취하고, 북한 급변사태를 언급하는 것 자체가 북한의 강경파를 돕는 일이고, 김정은 체제의 운신의 폭을 좁히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러한 조건과 환경에서 김정은 정권이 핵포기라는 '통 큰 결단'을 내리기란 불가능하다.
일각에서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유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김정은 체제가 선대(先代)의 노선을 비판·수정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며, '김정은의 북한'이 달라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고 지적한다. 일리 있는 말이다. 그러나 김일성-김정일의 부정적인 유산 못지않게, "조선반도 비핵화", "적대관계의 평화관계로의 전환", "정전체제의 평화체제로의 전환", "인민들이 이밥에 고깃국 먹는 세상"도 이들의 못 이룬 꿈이자 후계자에게 남긴 유훈이다. 그리고 이러한 유훈의 실현 여부는 김정은 정권 스스로의 선택 못지않게 외부와의 상호작용이 대단히 중요하다.
복잡한 한반도 문제의 궁극적 단순함은 '냉전 종식'아마도 한국을 포함한 국제사회가 공유하고 있는 '김정은의 북한'에 대한 핵심적인 판단 기준은 핵문제에 대한 김정은 정권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당분간 김정은이 아버지를 뛰어넘는 혁신적인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할 것이다. 우려되는 것은 '김정은에게도 기대할 것이 없다'는 부정적 인식이 팽배해지면서 중대 전환기를 또 다시 허송세월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이다.
'북핵'은 60년 넘게 누적되어온 한반도 문제의 '모순 덩어리'다. 핵문제를 북한 체제나 지도자의 문제로 국한해서 바라보는 한, 문제 해결에 한 발짝도 다가설 수 없다. 냉전 병(病)을 앓아온 한반도 전체의 체질을 바꿀 때에 비로소 그 치유법을 모색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만큼 어려울 수도 있고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그러나 외교에서 시간의 중요성은 물리적인 길이가 아니라 화학적인 반응에 있다.
'북핵' 문제가 대단히 풀기 어려운 고차 방정식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런데 모든 고차 방정식은 1차 방정식으로 환원된다. 스티브 잡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복잡함의 궁극은 단순함에 있다."
반세기 넘게 너무나도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한반도 문제의 궁극적 단순함이란, 바로 '냉전'에 있다. 바로 이 단순함에 주목해 탈냉전을 향한 거보(巨步)를 내딛을 때, 북핵 문제 해결의 문도 열리게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정욱식 블로그 뚜벅뚜벅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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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네트워크 대표와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저의 관심 분야는 북한, 평화, 통일, 군축, 북한인권, 비핵화와 평화체제, 국제문제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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