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오후 서울 강남구 삼성동 A 빌딩. 이곳에 입주해 있는 중소 정보통신업체 B사의 재무담당자 김아무개 부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최근 자신이 근무하는 회사에 기업형 초고속인터넷과 전화 등을 통합하는 서비스를 구축하기 위해 통신회사 등과 접촉해봤다. 하지만 이들 회사로부터 예상 외의 답이 돌아왔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KT를 뺀 나머지 회사들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김 부장은 "회사의 업무 효율과 비용 절감 등 여러 면을 고려해 통신회사들에 문의했는데 이해하기 어려운 답변을 들었다"면서 "(인터넷) 라인을 깔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 웬만한 가정에서도 업체들끼리 경쟁이 치열해, 소비자 입장에서 가격 등을 비교해서 결정하는데..."라며, "현재 쓰고 있는 KT 쪽을 계속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전기통신 설비를 제공할 의무 있는 KT의 자사 이기주의?
왜 그럴까. KT는 과거 공기업 시절부터 구축해 온 전국적인 통신망을 사실상 독점적으로 운영 및 관리해 왔다. 전봇대(전주)를 비롯해, 광케이블, 선로 등은 유선 통신을 위한 필수설비들이다. 이런 설비는 대개 지하에 묻혀 있거나 건물이 지어질 때 설치된다.
SK브로드밴드 시설관리 담당자는 "뒤늦게 통신사업에 진출하는 기업들의 경우, 이들 설비를 따로 구축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면서 "이 때문에 여전히 많은 지역에서 KT 쪽 설비를 빌려 써야 할 처지에 있다"고 말했다.
이는 현재 법으로도 규정돼 있다. 현행 전기통신설비 제공조건 등에 KT는 SK브로드밴드나 LG U 플러스, 케이블TV방송사(SO) 같은 경쟁 사업자에 필수설비를 제공하도록 돼 있다. 또 정부는 지난 2009년 KT가 무선통신 자회사인 KTF와 합병할 때, 당시 합병인가 조건으로 필수설비 제공을 못 박기도 했다.
KT 필수설비를 다른 통신 사업자들이 빌려 쓰면서, 자칫 우려되는 업체 간 과잉 중복투자를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소비자들의 통신서비스 선택권도 커진다는 점도 이유였다.
문제는 이 같은 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후발 사업자들은 지난해부터 KT가 통신망을 제대로 빌려주지 않고 있다고 볼멘소리를 내 왔다. 하지만 KT 쪽에선 정당한 사유에 따라 제공되지 않는 부분이 있을 뿐이라며, 업체들의 주장을 일축해 왔다.
방통위가 직접 현장에 나가보니... "KT 설비제공 의무 미진"
누구의 말이 맞을까. 방송통신위원회(방통위)가 작년 11월부터 1년여에 걸쳐 전국의 77개 통신망을 직접 확인해 내놓은 결과는 'KT의 판정패'다. 예를 들면 올해 초 KT는 서울 서대문구를 비롯해 용산구 등에서 후발 사업자들의 설비 제공 요청을 받았지만 응하지 않았다. 이유는 '여유 관로가 없다'는 등이었다.
하지만 실제 방통위 조사관이 직접 현장에 나가 확인해보니, 충분히 설비를 제공할 수 있는 여건이었다. 후발업체 한 관계자는 "(KT 쪽에) 설비 제공을 신청하면, 이런저런 이유를 들며 시간을 끌면서 응해주지 않는다"면서 "현장에서 보면 충분히 여유가 있는 공간인데도, 광케이블을 받을 수 없다면서 거부해 왔다"고 토로했다.
실제로 그동안 KT가 후발사업체들에 설비를 제공한 실적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방통위가 지난달 개최한 필수설비 제공을 위한 공청회에서 내놓은 자료를 보면, KT가 올해 후발사업체들에 제공한 필수 설비건수는 325건에 불과했다. 이는 지난 2009년 KT 합병 당시 사업자들끼리 합의한 수준인 3만600개(2011년)의 1.1% 수준이다.
박경주 방통위 통신자원정책과 사무관은 "중앙전파관리소에서 지난 1년여 동안 KT의 설비제공 현황을 점검한 결과, KT의 설비제공 거부 사례가 확인돼 시정조치를 내렸다"면서 "지난 2009년 KT 합병인가 조건으로 그동안 필수설비 제공에서 일부 개선이 있었지만 여전히 미흡한 부분이 많아, 관련 법 개정안을 추진 중"이라고 설명했다.
KT, "매년 유선 시장에 엄청나게 투자해왔는데...투자 위축 시킬것" 반발
방통위가 현재 추진중인 전기통신 설비 제공 등에 대한 개정안은 KT의 설비 제공 기준을 완화하고, 광케이블 등 제공 범위를 넓히는 것이다. 현재 광케이블의 경우 2004년 이전에 만들어진 것만 제공 대상에 포함돼 있다. KT 전체 광케이블의 17%에 불과해, 그동안 제도자체의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돼 왔었다.
이에 따라 방통위는 2004년 이후 구축된 광케이블도 제공 대상에 넣을 방침이다. 대신 KT 구축한 지 3년이 지나지 않은 경우에는 제외하기로 했다. 현재 이같은 내용을 담은 개정안이 오는 30일 방통위 전체회의 안건으로 올라갈 예정이다. 이후 본격적인 개정 절차를 밟아, 빠르면 내년 1월부터 시행에 들어간다.
물론 이같은 움직임에 대해 KT 쪽에선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일부 현장에서 필수 설비 제공에 문제가 있었지만, 이 때문에 제도 자체를 손질할 정도는 아니라는 입장이다. 오히려 방통위의 법 개정이 향후 KT의 투자를 위축시켜, 관련 업계가 피해를 입을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KT 관계자는 "매년 1조8000억 원 가량을 유선망 설비에 투자해 왔다"면서 "이를 통해 초고속인터넷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유지해왔으며, 자칫 이번 결정으로 향후 투자를 위축시킬 수도 있다"고 반발했다. 그는 이어 "2004년이후 광케이블망까지 개방하라는 이야기는 오히려 특정 후발 사업자에 대한 특혜이면서, 민영화된 KT 입장에선 막대한 손실을 끼칠 수 있는 사안"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방통위 관계자는 "단순히 필수 설비를 경쟁업체들에게 내주라는 이야기가 아니다"면서 "법적으로 제공해야 할 필수 설비에 대한 보다 명확한 기준을 세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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