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조명...그녀는 더욱 화려해 지고

[연재소설 - 하얀여우 10] 여행, 자고 있어야 할 인호가 사라지고

등록 2011.12.31 11:22수정 2011.12.31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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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도 다 지났는데 바람 한번 쐬러 갈까요? 단합대회도 할 겸해서."
인호가 여행을 제안했다.
 "그래요, 상범씨 우리 한 번 멀리 나가죠."
고윤희가 맞장구를 쳤다.

생각해보니 한번 나가야 할 시기도 된 듯했다. 참으로 비약적인 발전이었다. 사무실에서 가장 빠르게 진급한 케이스였다. 다단계에 발을 디딘지 단 6개 월 만에 난 '이사'로 진급했고 강사로서도 발판을 다지고 있었다. 남을 설득하는데 원래 소질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순박해 보이는 인상 덕분인지, 내 설명을 들은 사람들은 비교적 쉽게 다단계에 발을 담갔다.


내가 인도한 사람만 해도 열 명 가까이 됐고 한 다리 거쳐서, 그러니까 내가 인도한 사람한테 인도되어 들어온 사람까지 합하면 스무 명이 넘었다. 이들을 붙잡아 두려면 특별한 이벤트가 필요했다. 이들은 인호와 고윤희 하고도 관련이 있었다. 인호를 인도한 게 고윤희였고 나를 인도한 것이 인호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인호에게는 두 다리, 고윤희에게는 세다리 거쳐서 인연을 맺게 된 고객이었다.

오전 9시 경, 검정 세단 다섯 대가 일렬로 늘어서자 사무실 사람들 이목이 모두 우리에게 쏠렸다. 오전 10시가 돼서야 일행들이 모두 도착했다. 한 대에 네 명씩 나누어 탔다. 우리 목적지는 설악산이었다.

차를 양재동 사무실 앞에 죽 세운 다음 들뜬 표정으로 출발하는 것은 일종의 '쇼'였다. '너희들도 열심히 하면 우리처럼 비까번쩍하는 차를 타고 여행을 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계산된 행동 이다.

우리 일행이 도착하자 '벨보이' 몇 명이 황급히 뛰어와 문을 열고 가방을 받아 주었다, 호텔 이름을 보고 하마터면 '풋' 하고 웃음을 터뜨릴 뻔 했다. '화이트 폭스(하얀여우)'였다. 역시 고윤희다웠다. 몇 주 전 그녀와 함께 뜨거운 밤을 보낸 곳이다. 여행 계획은 모두 그녀가 짠 것이다. 

우린 인호에게 사귄다는 사실을 숨기고 최대한 쉬쉬하며 만나고 있었다.  우리가 사귄다는 사실을 인호한테 들킬까봐 늘 조마조마 했다. 그래서 인호와 함께 있을 때는 고윤희와 눈도 맞추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녀는 나에 비해 대담했다. 아니 그 아슬아슬함을 즐긴다고 해야 맞는 표현이다. 인호가 한 눈 팔 때 슬쩍슬쩍 내 손을 잡기도 하고, 때론 과감하게 볼에 입을 맞추기도 했다. 이렇게 아슬아슬함이 주는 짜릿함을 즐기는 그녀가 '화이트 폭스'를 숙소로 정한 것이다. 인호와 함께한 여행지에서.

어느 순간부터인가 난 그녀에게 서서히 길들여지고 있었다. 짓궂은 그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내 몸은 그녀가 전해 준 짜릿함을 잊지 못했다. 그녀에게 길들여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난 후에는 내가 먼저 그녀의 손이나 엉덩이 같은 곳을 슬쩍슬쩍 만지며 장난을 치기도 했다.

각자 방에 들어가 짐을 풀고 자유롭게 휴식을 취한 후 밤에 호텔 지하 나이트 클럽에서 모였다. 작은 클럽이었다. 우리 일행이 들어서자  홀이 꽉 찼다. 우리 일행 외에는 손님이 없어 얼핏 보면 나이트클럽을 통째로 빌린 형상이었다. 술잔이 몇 순배 돌아간 다음 고윤희가 스테이지에 나가 춤을 추며 분위기를 잡자 모두 따라 일어서 스테이지로 향했다. 그녀는 화려했다. 늘 그렇듯 화려한 조명아래에서 그녀는 더욱 화려해졌다.   

"상범씨 정말 이럴 거야?"
"안 돼, 오늘은 그러면 안 돼, 인호 눈치도 있고."

그녀 몸이 뜨거워져 있었다. 밖으로 나가자고 보채는 것을 달래는 것도 고역이었다. 인호가 옆에 있어서 도저히 그녀와 함께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우리 둘이 사라지면 인호가 이상하게 생각할 게 뻔했다. 그렇지 않아도 요 근래 인호가 무엇인가 눈치 챈 것 같아서 신경이 쓰이던 참이었다. 인호는 술에 많이 취했는지 눈이 거의 풀려 있었다. 

"형 어디 가서 한잔 더 하자."
"안 돼 그만 해, 이제 방에 들어가서 자자."

인호를 부축해서 나이트클럽에서 나왔다. 일행들도 각자 자기 방으로 흩어졌다. 한 잔 더 하자는 인호를 달래서 방으로 들어왔다. 침대에 눕히자마자 인호는 그대로 골아 떨어졌다. 인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같은 방에서 잠을 자기로 했는데, 먼저 골아 떨어지자 갑자기 허탈감이 몰려왔다.

인호에게 고윤희와의 관계를 솔직히 고백한 다음 축복해 달라고 말하려고 단단히 마음을 먹었던 터였다. 텔레비전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며 허무감을 달래고 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상구였다.  

"잠도 안 오는데 한 잔 할까?"
"그래 상구야, 내가 네 방으로 갈게."

상구 방에 길용이, 국진이도 함께 있었다. 길용이 국진이 모두 시골에서 함께 자란 배꼽친구들이다. 모두 나를 믿고 다단계 사업을 시작한 녀석들이다. 녀석들은 팬티 바람으로 둘러 앉아 맥주잔을 기울이며 옛날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상범아 어서 와라, 그렇잖아도 네 얘기 하고 있었어."
상구가 앉으라는 손짓을 하며 말했다.

 "무슨 이야기?"
 "음~네 덕에 호텔 이란 곳도 와 본다고…… 뭐 그런 얘기 하던 중이야."
 "싱겁긴! 오늘 재미있었어?"
 "당연히 재미있었지, 그 고윤희란 여자 굉장하더라, 혹시 백댄서 출신 아니냐?"
 "백댄서는 무슨……! 그래 일은 할 만해?"

고윤희 이야기가 나와서 난 얼른 화제를 돌렸다. 인호에게 고백을 하지 않은 이상 난 고윤희와의 관계를 철저하게 숨길 필요가 있었다. 이들도 인호, 고윤희와 얼굴을 계속 마주칠  사람들이었다. 되도록 나와 고윤희와의 관계를 눈치 않도록 해야 했다. 맘 편한 친구들과 함께 잔을 기울이니 술이 술술 잘도 넘어갔다. 얼마나 마셔댔는지... 창문 커튼을 비집고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올 때가 돼서야 하나 둘 골아 떨어지면서 술자리가 끝이 났다. 

눈을 붙이려고 방에 돌아와 보니 인호가 보이지 않았다. 분명 쿨쿨 자고 있어야 할 인호 모습은 보이지 않고 베개만 덩그러니 침대를 지키고 있었다. 혹시 어디 가서 쓰러져 있는 게 아닌가 하고 걱정이 들었지만 몸이 무거워 찾아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이미 버티지 못할 만큼 취해 있었고 눈꺼풀도 천근만근이었다. 

덧붙이는 글 | 연재8회가 '연재' 에서 빠졌어여..


덧붙이는 글 연재8회가 '연재' 에서 빠졌어여..
#하얀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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