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을 앞둔 신부가 아프다니... 어떡하지?

결혼식을 무사히 마치고 싶은 신부의 소망

등록 2011.12.31 11:33수정 2011.12.31 11:33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시계가 소리없이 9시를 가리켰다. 직장인의 경건한 출근시간이다. 2층 관사에서 1층으로 계단을 내려오면서 청년은 공중보건의가 된다. 간호사 선생님과 인사를 하고 주변을 둘러보니 발 하나가 침상 끝에 삐죽하니 나와 있다.


면사무소 민원실에 근무하는 이혜진씨는 한방 간호선생님과 친해 한방실에 자주 들른다. 외국인처럼 생겼다며 나를 '찰스 선생님'이라고 불러주는 그와 격의없이 지내게 되었다. 평소 결혼에 대한 걱정을 내비치던 혜진씨가 올해 좋은 짝을 만나 내일 결혼식까지 앞둔 예비 신부가 되었다.

한창 준비에 바쁠 그녀가 누워있다. 온 몸을 이불로 덮고 얼굴까지 마스크로 가린 모습에서 병마의 기운이 완연하게 느껴진다. 호흡 외에는 작은 움직임조차 없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조금씩 들썩이는 배 위의 이불이 미묘하게 떨릴 뿐이다.

단 잠일지 쓴 잠일지 모를 수면에 깊게 빠진 신부가 깨길 기다렸다가 양 손의 맥을 짚어보았다. 외부에서 들어온 차가운 기운이 피부 표면에서 몸을 지키는 정기와 맹렬히 자웅을 겨루고 있다. 수면 위로 올라온 물고기가 빠르게 자맥질 하듯이 맥은 위로 떠올라 바삐 뛰었다. 浮數(부삭). 1분에 111회 뛰는 맥은 정상적인 60, 70회를 크게 뛰어넘는 것으로 많은 열을 의미한다. 이마의 뜨거운 열만큼 내일에 대한 걱정도 펄펄 끓고 있을 혜진씨. 모 의류업체 광고 카피였던 '내일 뭐 입지?' 만큼 절실한 '내일 어떡하지?'였다.

결혼식을 마치고 다음 날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간다는데, 잘못 꿰진 첫 단추에 옷 맵시가 모두 틀어질 판이다. "침 맞으셔야겠네요." 작은 끄덕거림이 긍정을 표시한다. 소매를 걷어붙이고 양 손을 배 위로 올리게 한다. 병이 외부에서 왔기 때문에 외관혈(外關穴). 머리를 흐르는 양명경의 열을 빼주는 열결혈(列缺穴). 문제가 생긴 폐와 관련이 있는 대장경의 합곡혈(合谷穴). 모두 손목 주위의 혈들. 한 손에 3개씩 모두 6개의 침을 꽂고 자극을 준다. 몸에 얹힌 차가운 기운을 빼내기 위해 사법(寫法) 시행. 엄지와 검지가 침 자루를 쥐고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려준다.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얘기는 축구에만 해당되는 말은 아니다. '낫는다, 낫는다'를 되뇌이며 침을 놓을 때 환자 상태가 더 좋아지는 경우를 여러 번 보았다. 결혼식, 결혼식을 읊조리며 6개의 혈에 꽂힌 침을 계속 돌려준다.


a

쌀죽 한방 간호사선생님이 쌀죽에서 물을 건져담고 있다. ⓒ 최성규


판세를 보니 약도 들어가야 할 형편. 쌀을 끓여달라고 간호사 선생님에게 부탁했다. 먹을 것을 찾아 헤매던 방랑자들을 정착생활로 주저 앉힌 쌀에는 사람들을 먹이는 정기(精氣)가 듬뿍 담겨 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쌀 죽에서 김이 피어 오른다. 쌀알은 걸러내고 걸쭉한 물만을 담아 신부에게 진상했다. 입맛이 없어 아침도 걸렀다는데 꿀떡꿀떡 잘 넘기는 모습을 보니 몸에서 필요로 하던 게 맞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맥을 짚어보니 어느덧 1분에 99회로 떨어져 있었다. 오늘밤이 고비인 그녀에게 몸을 따뜻하게 하라하고 가정방문을 나섰다.

두 가구 출장 진료를 끝내고 골목길을 나서는데 낯익은 할머니들이 한데 모여 어디론가 향하는 중이다.

"조점심 어머니. 어디 가세요?"
"응. 잔칫집 가서 밥 먹을라고. 자네도 갈란가?"

a

잔칫집 가는 길 마을 어르신들이 잔칫집에 가기 위해 뭉쳤다. ⓒ 최성규


결혼하는 집에서 마을 사람들을 대접하기 위해 잔치를 열었다. 신부 상태도 확인할 겸 인사나 드려볼까? 조용한 남양마을에 오랜만의 경사. 환갑 잔치 이후로 무료했던 어르신들은 떠들썩한 분위기를 즐겼다. 환하게 불이 켜진 마당과 사람들의 형체가 분주한 마루. 하나씩 건네지는 덕담에 피어나는 웃음. 보기에 좋았으나 끝맛이 씁쓰레했다. 한동안 기쁜 일이 없던 마을에서 간만의 경사는 그만큼 기쁘지만, 축제가 끝나면 한동안 다 같이 축하할 일은 보기 힘들 것이다. 사막을 헤매는 목 마른 자에게 당장의 물 한 모금은 달면서도 앞을 기약할 수 없는 기다림에 쓴 맛도 안겨 주는 것이다.

신부는 목욕탕을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낮에 얘기했던 대로 재활훈련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는 모양이다. 인사만 하고 가려던 나는 주인 아주머니에게 붙잡혔다.

"음식을 싸줄 수도 없고 그냥 가면 아무 것도 못 준디. 먹고 가시게."

잔칫집에서 손님의 민폐는 주인에게 민폐가 아님을 알기에 주저 앉았다. 작은 방 안에 보건지소 단골들이 모여 있었다. 그네들에게 젊은 피가 영 반갑다.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하는 나는 앉은 자리에서 국과 밥을 바로 바로 비워냈고, 어르신들은 손주 보듯 바라보았다.

  "왜 꼬막을 안 먹으요?"
  "먹고 있습니다."
  "내가 까주까? 내가 잘 까."
  "냅두소. 꼬막 못 까는 사람도 있당가?"

한 할머니의 만류에도 기어코 손은 꼬막을 향했다.

  "나바. 까주께. 내가 그냥 까. 손톱도 안 다. 대기만 하면 그냥 까지제."

집어들었다 하면 여지없이 혀를 빼물고 입을 벌리는 적의 무리. 잘 먹는 것이 민폐가 아님을 알기에 바로 바로 집어드는 나에게 할머니는 고맙다고 말했다.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서로 고마운 일이었다. 주인 아주머니는 밥상마다 돌아다니며 인사를 한다. 보건지소 단골 할머니들이 봉투를 그러모아 손에 꼭 쥐여주었다.

  "이거. 이거 받게."
  "아이고. 이런 걸 왜 준당가? 고맙네. 고마워."

a

흥겨운 잔칫상 오랜만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 식사를 즐기고 있다. ⓒ 최성규


한방파스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 넉넉히 담은 종이백을 한 쪽에 밀어넣고 나왔다. 활짝 열린 대문에는 집 주인을 알리는 명패가 달려 있었다. 여느 때엔 어두운 골목길에 함몰되었을 명패는 마당의 빛과 길가에 드리워진 어둠에 걸쳐 있어 적당히 밝고 적당히 어두웠다. 주인 아주머니와 아저씨의 이름. 한 분은 안 계시지만 다른 한 분이 두 몫을 해내고 있었다. 마스크를 벗고 신부가 결혼식장에 나타나는 내일, 홀로 계신 그 분은 무거운 짐을 벗을 것이다.
#결혼식 #시골 #남양면 #공중보건의 #한의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검찰 급했나...'휴대폰 통째 저장', 엉터리 보도자료 배포
  2. 2 재판부 질문에 당황한 군인...해병대 수사외압 사건의 퍼즐
  3. 3 [단독] 윤석열 장모 "100억 잔고증명 위조, 또 있다" 법정 증언
  4. 4 "명품백 가짜" "파 뿌리 875원" 이수정님 왜 이러세요
  5. 5 '휴대폰 통째 저장' 논란... 2시간도 못간 검찰 해명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