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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12월 29일) 언론에 오보(誤報)가 있었습니다. 가슴을 쓸어 내렸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그럴 수는 없지! 저는 그 참에도 딴 생각에 일부러 젖어 보았습니다. 왜 잘못 전해진 '죽음' 소식은 그 사람을 더 오래 살게 한다는 속설이 있잖아요. 저는 김근태 선배를 억지로 그런 범주에 넣어 생각했습니다.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그가 아직 세상을 떨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64세의 연치(年齒)는 이 세상과 이별하기에 너무 아까운 나이입니다. 지금은 의학의 발달로 100세 인생을 운위할 정도가 아닙니까. 아니 그것보다도 그가 우리를 위해 한 일들이 너무 크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없었다면 이 땅의 민주화도 지금보다 많이 지체되었다면 과찬이 될까요?
1970대 말에서 80년대를 지나 90년대에 이르기까지 김근태 선배는 운동권 후배들에겐 거목으로 우뚝 서 있었습니다. 우리의 나침반 역할을 했습니다. 박정희 정권을 이어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이 철권을 휘두르고 있을 때에도 불의를 향한 그의 발걸음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운동가로서의 소양을 두루 갖추고 있었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아도 아주 드문 분이었습니다. 인성과 덕성 그리고 지성에 합당한 논리까지. 하지만 저는 무엇보다 그의 넉넉한 덕성을 높이 평가합니다. 어려운 상화에 처한 후배들에게 늘 포근한 마음을 베풀며 다독거리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그는 운동가의 살아 있는 증인요 모델이었습니다. 1983년대 중반 그 엄혹하던 시절,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결성은 본격적 조직 운동의 시발(始發)이라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학생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잡혀가고 더 의식이 강고해져서 나온 청년들 중심으로 조직한 운동단체가 바로 민청련이었습니다. 독재와 불의 그리고 부패에 대한 그들의 문제 제기는 얼어붙은 이 땅을 녹이는 훈기 역할을 했습니다. 그 단체를 결성해서 초대 및 2대 의장을 역임한 분이 김근태 선배입니다. 그가 주위 선후배들에게 두로 신망과 존경을 받게 된 것은 생각과 행동을 일치시켜 실천으로 옮긴 데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는 운동권에서도 언행이 일치하는 몇 안 되는 활동가로 통했습니다. 그는 그 고삐를 세상을 뜰 때까지 놓지 않는 치열성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마음의 상처가 다시 되새겨집니다. 1987년 대선 국면은 운동권 전체에 심한 몸살을 안겨주었습니다. 하지만 김근태 선배의 아픔은 그 누구보다 컸을 것입니다. 운동 노선 투쟁이라는 말로 포장들을 합니다만 저는 솔직히 정치권에 종속된 운동권의 유약성을 그대로 드러낸 진흙탕 싸움의 측면이 없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아시다시피 그 때 운동권이 대선에 임하는 입장은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비판적 지지, 후보 단일화, 독자후보론이 그것입니다. 마음에 차지는 않지만 상대적으로 운동권과의 동질성이 가깝다고 판단되는 김대중 후보를 비판적으로 지지하자는 주장이 '비판적 지지론'입니다.
6월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인 군부가 쇠퇴해 가는 와중이라고 하지만, 군 출신 후보 노태우를 꺾기 위해서는 김대중 김영삼 양인이 후보 단일화를 이루어야 승산이 있다고 보고 무조건 두 사람 중 하나로 단일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후보 단일화론'입니다. 마지막으로, 민중 후보를 독자적으로 낼 때이며 적임자로 백기완 후보를 내세워 그를 지지하자는 주장이 '독자후보론'이었습니다. 당시 김근태 형은 감옥에 있으면서 비판적 지지론을 논리적으로 옹호하며 주장했습니다. 당시 지역과 부문을 가맹단체로 거느리고 있던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의 서울지부 격인 서울민통련에서 활동하던 저를 비롯한 일부 회원들이 민통련을 탈퇴하고 서울민중연합을 조직해서 후보 단일화 운동을 관철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김근태 선배와는 노선을 달리하고 있었습니다.
김근태 선배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주어진 주객관적 조건에서 비판적 지지가 운동권이 택할 노선이라며 후배들을 설득했습니다. 그는 영어(囹圄)의 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면회 오는 사람들에게 그의 주장을 전하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는 비판적 지지의 전도사를 자처하는 듯 보였습니다. 어느 노선이 옳은 것이었는지 타산하는 데는 고도의 운동 및 정치 셈법이 요구됩니다. 저는 그 때 김 선배와 노선을 달리한 것에 대해 인간적 미안함을 지금도 갖고 있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소원하게 지내게 된 것은 저의 좁은 마음의 결과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 선배는 인간의 한계를 초극(超克)한 사람입니다. 운동권 사람들에겐 공공연한 비밀이었던 '고문'을 만 천하에 폭로한 사람입니다. 그는 민청련 활동으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을 때, 공개적 운동 단체에 몸담은 정당성을 항소 이유서에 담았습니다. 덧붙여 운동권 인사들에겐 '저승사자'로 알려져 있던 고문 기술자 이근안을 공개적으로 거명하며 정부의 불법 부당성을 폭로했습니다. 이 사실이 전 세계에 알려져 그의 석방을 탄원하게 했습니다. 이 명문의 항소 이유서가 그 뒤 <남영동 대공분실>이라는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김 선배의 별세 소식이 알려지자 동시에 '이근안'이라는 이름도 검색 순위 상위에 랭크되고 있다는군요. 이근안이 목사 안수를 받고 목회를 한다는 말에 같은 목사로서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됩니다.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하나님이 부르시면 그 일을 할 수 있는 것일 테지만 철저한 회개와 거듭남이 전제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근안은 민주 인사들을 고문하며 자백을 받아낸 것을 애국적 행위라느니, 고문은 하나의 예술이라는 등의 뚱딴지같은 얘기를 하고 다닌답니다. 김 선배 앞에 목회자의 한 사람으로서 얼굴이 화끈거려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민주화가 어느 정도 진척을 보이고 있다고 하지만 아직 사회 곳곳에서 독재의 잔재들이 꿈틀대고 있습니다. 시대를 역린(逆鱗)하려는 시도들이 여기저기서 산견(散見)되고 있습니다. 이런 보수 세력의 움직임에 민주 진보 세력은 통합으로 대응하고 있습니다. 이 통합 작업에도 김근태 선배가 숨은 공을 세웠다는 것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압니다. 내년 4월 총선과 12월 대선에 민주 민족 세력이 단일 대오를 형성해서 보수 극우 세력에 승리해야 합니다. 김 선배의 지도력이 절실한 때, 그는 우리 곁을 훌쩍 떠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김근태 선배를 잃은 인간적 슬픔도 크지만 이 땅의 민주화와 통일 운동에 밀알 역할을 하고야 말 그분을 잃은 아픔이 더 큽니다.
생을 가늘며 길게 산 사람이 있는 반면 짧으면서도 굵게 산 사람도 있습니다. 후자의 삶을 사회에 기여한 가치로운 삶이라고 말들 합니다. 64세의 길지 않은 삶을 살다간 김근태 선배는 후자의 삶을 산 사람에 속할 것입니다. 그가 못다 한 일은 남은 우리의 과제로 넘겨졌습니다. 남은 자들이 더욱 분발해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분열보다는 통일을, 이기(利己)보다는 이타(利他)를, 강자 중심보다는 약자와 더불어 살아가는 방향으로 우리의 힘을 모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김근태 선배의 유지를 받드는 길이 될 것입니다.
한 친구가 김근태 선배의 부음을 알리는 전화를 해왔습니다. 그 친구는 김 선배가 이 땅을 얼마나 사랑했으면 2년에 걸쳐 장례를 치러야 할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해를 바꾸어 장례 일정이 잡히는 것을 두고 한 말입니다. 오늘 정오 가까이 돼서 또 연락이 왔더군요. 5일장의 '민주주의자 김근태 사회장'으로 장례 일정이 잡혔다고 합니다. 김근태 선배를 고인으로 불러야 한다는 것이 마음 아픕니다. 지방에 살면서 안부도 자주 묻지 못하고 산 것이 회한(悔恨)으로 남습니다. 부인되시는 인재근 형수님과 두 자녀에게 심심한 조의를 표합니다. 그리고 김근태 선배의 가열 차면서도 따스함을 잃지 않은 삶에 삼가 경의를 표합니다. 고문과 고통이 없는 천국에서 안식을 취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아~아, 사랑하는 김근태 선배님!
2011.12.31 11: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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