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하게 선동적인 이것, 아~ 제대로 '웃프다'

[서평] 다큐멘터리 만화 <사람 사는 이야기>

등록 2012.01.20 16:59수정 2012.01.20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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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사람 사는 이야기> 표지

<사람 사는 이야기> 표지 ⓒ 휴머니스트

"제목이 조금 촌스럽지만"이라고 했다. 이 책을 추천한 이가 제목을 멋쩍어 하며 책을 보냈다. '사람 사는 이야기'라는 제목을 한참 바라봤다. 초등학교 6학년, 담임선생님의 요구에 어쩔 수 없이 만들었던 학급문집 '우리들의 이야기'가 떠오를 정도로 단순하기 그지 없는 제목에 편집자의 센스를 탓했다.

그러나 책을 다 읽고 난 뒤, 과연 이 책에 '사람 사는 이야기'라는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면 어떤 제목을 붙일 수 있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웃고 있지만 왠지 모르게 맹장 한구석 어딘가 따끔따끔한 그 기분, 요즘 말로 "웃프다"(웃기지만 슬프다)라고 하던가.


기왕 '사람 사는 이야기'라고 대놓고 운을 떼었으니, 내가 언제 '사람'임을 자각하고 사는지를 생각해보겠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임을 자각하기보다 사람임을 부정하는 순간이 많다. 어떤 절망적 상황에서 누구에게도 위로받지 못하고, 경건하게만 보이는 이 고결한 세상에서 나 혼자만 구질구질하게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의 그 절망적인 기분이란 '이렇게 살아서 뭐하냐'라는 비관만 품게 한다.

똥꼬 찢어지게 어려운 것도, 주변의 동정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생짜배기 가난뱅이가 아니니 옛날 말마따나 '나랏님'도 나를 구제해주지 않고…. 아차, 어차피 '나랏님'께서는 나를 구제해줄 생각이 아예 없었더랬지….

내가 지금 왜 이런 얘기를 장황하게 하냐면, 이 책을 소개하기 위한 운을 떼기 위해서다. 독후감도, 책 소개도 아닌 무려 '서평'인지라 한번 쓸 때마다 어지간히 품이 드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혹자는 "만화책이니 쉽게 읽고 금방 쓸 수 있을 것"이라 말한 바 있으나, 사실 '이런 류'의 책에 대해 평을 쓰는 것보다 차라리 인문과학서적이나 이론서에 대한 평을 쓰는 것이 곱빼기로 편하다고 생각하는 1인이다.

'사람'을 이야기하는 책에 대해 감히 코딱지만도 못한 글재주를 가진 내가 이러고저러고 손가락을 놀린다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냐는 말이다.

'만화책'이니 서평 쓰기 쉬울 거라고?


a  지난해 10월 삼화고속 노동자들의 총파업 출정식 모습

지난해 10월 삼화고속 노동자들의 총파업 출정식 모습 ⓒ 한만송



인천 삼화고속 노동자들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장기간 파업을 벌인 이야기(<24일 차>), '빚내는 청춘'들의 애달픈 이야기(<단돈 5만 원> <청춘은 아름다워?> <열심히 살자>), 가난하지만 아름다운 104마을을 위한 <재일교포 2.5세 노란구미의 신혼일기>, 지극히 소소한 일상을 다룬 <헬스 왕>, 굴곡진 만큼 역동적이었던 우리네 역사(<히스토리> <당당한 한국현대사1>)와 체 게바라의 전기를 다룬 <따뜻한 사람, 체>, 그리고 자연과 환경 이야기인 <나무 이야기> <도심 속 식물 여행>까지, '쌩뚱'맞을 정도로 전혀 공통점 없는 이야기들을 총집합했다. 단, 이런 조합이 어색하지 않다. 아주 일반적인 말이 되어버렸지만 이 모든 것이 '우리네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어떤 불의한 순간에, 그에 맞서 싸웠는가 생각해본다. 나, 단 한 번도 없었다. 초, 중, 고등학생이던 시절, 학교폭력을 목도하고도 모른 척했다. 부모님이 시장에서 생선장사를 한다고 초등학교, 중학교 내내 따돌림 당한 친구의 편에 단 한 번도 서주지 않았고, 장애인이었던 같은 반 여자애의 뺨을 때리던 '일진'들에게 단 한 번도 "왜 그러냐"고 반문해보지 못했다.

스물 몇 살까지 머릿속을 맴도는 몇 가지 폭력의 기억들이 아직도 나를 죄인처럼 만들고, 다시 '사람이었는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민주노조 사수를 위해 해고와 각종 징계를 견딘 삼화고속 노동자들의 그 싸움이, '철거용역 알바'를 하고 번 돈 '단돈 5만 원'이 부끄러워 "허리가 끊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무밭에서 무나 뽑으러 가자" 말하는 청년들의 순수함이, 학자금대출과 각종 생활비로 연애 한 번 '까리하게' 못하는 '청춘'이지만 '비겁해지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들의 아름다움이, 평생을 부끄럽게만 살아온 나를 (이거 조금 부끄럽지만) 눈물 나게 만들었다. 정말 만화책보다 운 것은 <꽃보다 남자> 29권을 본 이후 처음이었다.

a  지난해 8월 서울 명동3구역 카페 마리에서 재개발 시행 업체측 철거 용역 직원들(건물 안)이 세입자대책위원회 소속 상인들을 강제로 몰아내고 있다.

지난해 8월 서울 명동3구역 카페 마리에서 재개발 시행 업체측 철거 용역 직원들(건물 안)이 세입자대책위원회 소속 상인들을 강제로 몰아내고 있다. ⓒ 유성호


'가난'은 부끄럽지도, 그렇다고 아름답지도 않다

얼마 전까지 '사람 사는 이야기'란 타이틀은 언제나 가난함을 아름답게만 포장하는 데 그치곤 했다. 가난한 이들이 가난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를, 가난한 이들의 치열한 싸움을, 없는 자가 있는 자에 대항하는 그 지난한 과정은 싸그리 무시한 채 "가난하지만 아름다운" 등의 수사 따위로 겨우 이어져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우리가 왜 끊임없이 일해도 평생 가난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 알게 됐다. 가난은 부끄럽지도 않고, 또 아름답지도 않다. 가난은 가난 그 자체이며, 개인의 무지와 게으름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닌 사회구조적 문제가 분명히 존재한다.

<사람 사는 이야기>는 그동안의 '아름다운 가난함'이란 수식을 벗어난다. 먹고, 싸고, 자는 데에만 급급한 기본적 욕구만이 아니라 인간이 정말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돈' 외에 어떤 '내외적' 요건과 환경들이 갖춰져야 하는지도 보여주고 있다. 경박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묵직하지 않게 적당한 '농도'와 '악력'과 '글빨'(혹은 '말빨')로 사람을 '쥐락펴락'하는데… 내가 '울컥'한 게 거짓말이 아니다.

<사람 사는 이야기>가 참 좋은 책이라고 이만큼 '핥아'주었으니 이제 그만 글을 마치려고 한다. '시즌 1'이라고 하니 언젠가 <사람 사는 이야기>의 시즌 2, 시즌 3이 출간될 것이다. 삶은 무한하고, 백 명의 사람이 모이면 백 가지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법, 또 다른 시즌에서는 과연 어떤 이야기가 이어질 것인지 기대된다.

상기하시라. 글자를 읽을 줄 알고, 문맥 파악에 어려움이 없는 독자라면 이 책은 30분 만에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마음'만큼은 오래간다. 딱히 "정말 감동받았어(눈물)"라며 '질질 짤' 필요는 없다만, '치졸'하고 '비열'한 이 사회구조 안에서(누군가는 이를 '치열하다'라고 오해하기도 하드만) 나만 절망하고, 상처받는 것이 아님을, 가끔 살며 부끄러운 짓을 할 때도 있고, 후회하기도 하며, 다짐을 연속하는 인생을 나만 살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한다.

나이를 스물 몇 개, 서른 몇 개 먹을 때까지 도무지 '철이 들지 않아' 비싼 칼슘 보충제라도 한 통 사먹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 그대들에게 '강추'하겠다. 이 절망을 위로하는 것은 고통받고 상처받은 사람들의 '고통의 연대'임을, 이 한 권의 책을 읽고 자신을 위로하고, 상대를 위로할 줄 아는 사람이 된다면 이 '잣' 같은 세상, 언젠가 좋아질지 모른다는 희망을 코딱지만큼 가져보리라.

덧붙이는 글 | <사람 사는 이야기> 편집부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 2011년 12월, 310쪽, 1만5000원


덧붙이는 글 <사람 사는 이야기> 편집부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 2011년 12월, 310쪽, 1만5000원

사람 사는 이야기 - 다큐멘터리 만화 시즌 1

최규석.최호철.이경석.박인하 외 지음,
휴머니스트, 2011


#사람 사는 이야기 #최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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