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직자 복장의 킬러, 외딴 섬에 도착했다!

[리뷰] 하들그리뮈르 헬가손 <살인청부업자의 청소가이드>

등록 2012.03.02 11:22수정 2012.03.02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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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살인청부업자의 청소가이드> 겉표지

<살인청부업자의 청소가이드> 겉표지 ⓒ 들녘

'킬러에게 성직자 복장을 입혀서 아이슬란드로 데려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아이슬란드 작가 하들그리뮈르 헬가손은 베를린의 한 호텔에서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고 한다. 그 생각을 소재로 쓴 작품이 바로 2008년에 발표한 <살인청부업자의 청소가이드>이다.


킬러가 성직자의 옷을 입는다면 그럴만한 사정이 있을 것이다. 성직자 복장을 하면 킬러라는 신분을 감추기가 쉬워서 또는 임무수행에 그만큼 도움이 되기 때문에 등.

대신에 번거로운 일도 생길 수 있다. 신자들이 다가와서 아는 척을 할 수도 있고 다른 성직자가 말을 붙일 수도 있다. 성직자 복장은 상대적으로 눈에 띄니까 사람들이 유심히 바라볼 가능성도 많다.

게다가 아이슬란드라는 장소도 킬러에게는 유리하지 않다. 2010년에 세계은행은 아이슬란드의 인구가 약 31만 7천 명이라고 발표했다. 이렇게 작은 섬나라에 들어온 킬러는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된다. 도대체 왜 킬러가 아이슬란드에 들어왔을까?

전쟁에 참전했던 30대의 킬러

<살인청부업자의 청소가이드>에서 킬러는 크로아티아 출신의 토미다. 어린 시절에 유고슬라비아 내전에 참전했던 토미는 전장에서 이미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전쟁의 기억은 그의 의식에 단단히 자리잡고 있다. 전쟁 도중에 그는 죄없는 민간인을 총으로 쏴 죽이기도 했다.


그런 일이 생기면 펑펑 울고 싶지만 그럴 눈물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빌어먹을 세상'을 저주했다. 자신의 조국 크로아티아와 거기에 맞선 나라 세르비아에서 벌어지는 지옥같은 전쟁을 원망했다. 전쟁의 기억이 그를 살인청부업자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토미가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은 아니다. 그는 뉴욕을 무대로 활동하며 60명이 넘는 사람을 죽였지만 항상 조국을 그리워한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에서 크로아티아의 수케르가 독일을 상대로 골을 넣었을 때를 자신의 인생 최고의 순간으로 꼽는다. 그 대회 4강전에서 크로아티아가 프랑스에 패했을 때는 전쟁터에서처럼 엉엉 울었다.


이렇게 토미는 약간 코믹한 캐릭터다. 그래서인지 그는 임무를 수행하다가 커다란 실수를 저지르고 미국을 떠나야하는 신세가 된다. 고향으로 달아나기 위해서 도착한 뉴욕의 공항에서 토미는 자신을 찾는 FBI 요원들의 눈을 피해서 화장실로 들어가고, 그 안에서 성직자 프렌들리와 마주친다.

토미는 순간적인 판단으로 프렌들리를 죽이고 그의 옷을 입는다. 이제 토미는 성직자로 변신했지만 프렌들리가 가진 항공권의 목적지는 바로 아이슬란드. 토미는 어쩔 수없이 아이슬란드로 향하고 그곳의 공항에서 '프렌들리 신부님!'이라는 팻말을 들고있는 남녀와 만나게 된다.

조금씩 변해가는 킬러의 모습

과거의 신분을 모두 잊고 새 장소에서 새 시작을 하는 사람의 이야기는 많다. 하지만 토미 만큼 많은 사람을 죽이고 새 시작을 하는 사람도 흔하지 않을 것이고, 토미처럼 극적인 상황에 놓이는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다. 토미에게는 아이슬란드의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하다.

아이슬란드의 수도 레이캬비크는 역사상 가장 적은 인구를 가진 수도처럼 보이고 밤 10시 30분이 되어도 태양은 중천에 떠있다. "최근에 여기서 전쟁이 있었나요?"라고 물으면 상대방은 "아뇨, 아이슬란드에는 군대도 없어요"라고 대답한다. 살인과는 가장 거리가 먼 곳에 토미는 혼자서 떨어진 것이다.

그곳에서도 토미는 고향을 그리워 하며 혼자서 크로아티아 국가를 부른다. 노래를 부르는 동안 눈 앞에는 2만 명의 크로아티아 사람들이 나타난다. 그들은 모두 빨간색과 하얀색 격자무늬의 축구국가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1998년 프랑스월드컵 스타디움에 모여서 목이 터져라 국가를 부른다.

살인청부업자의 이야기를 다룬 범죄소설은 많지만 이 작품처럼 독특하고 재미있는 킬러가 나온 작품은 거의 없을 것이다. 작품을 읽다보면 전쟁의 기억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토미의 내면에 공감하게 된다. 아이슬란드에서 토미의 여정은, 바로 그 과거에서 벗어나 자신의 숨겨진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덧붙이는 글 | <살인청부업자의 청소가이드> 하들그리뮈르 헬가손 지음 / 백종유 옮김. 들녘 펴냄.


덧붙이는 글 <살인청부업자의 청소가이드> 하들그리뮈르 헬가손 지음 / 백종유 옮김. 들녘 펴냄.

살인청부업자의 청소가이드

하들그리뮈르 헬가손 지음, 백종유 옮김,
들녘, 2012


#살인청부업자 #아이슬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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