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스타

'40대라는 호명' <신사의 품격>

90년대 문화소비 주체의 현재적 재구성

12.07.13 17:53최종업데이트12.07.14 10:12
원고료로 응원

▲ <신사의 품격> sbs 주말 드라마 <신사의 품격> ⓒ sbs


요즘 90년대가 화제다. 얼마 전 <건축학개론>의 흥행, 그리고 현재 방영중인 드라마 <신사의 품격>. 김선영, 황진미 평론가가 지적했듯, <신사의 품격>은 90년대라는 추억의 매개에 기입한 판타지다. 드라마는 90년대의 세례를 받은 이들을 이제는 불혹이란 이름으로 호명한다. 그렇다면 왜 하필 90년대일까. 아니, 이 물음은 왜 40대일까로 대치돼야 할 것이다. 90년대의 향수는 <신사의 품격>의 기착지일 뿐, 종착지는 40대라는 특정 세대다.

40대는 자신이 사라지는 소실점이다. 자녀의 보호자, 가족의 부양자. 자녀의 교육과 가족에 대한 책임은 소득을 온전히 자신을 위해 쓸 수 없게 만든다. 이 소득지출의 자기 귀속성 정도는 여가를 위한 문화 컨텐츠에 대한 구매력과도 비례한다. 버거운 부양의 의무는 더 이상 관심사가 개인적 여가에 집중되지 못하도록 간섭한다. 따라서 현재 문화산업에 대해 최대의 구매력을 소지한 세대는 30대다. 그리고 20대의 시작과 끝을 90년대와 함께한 70년대 초반생들은 30대를 마감하고, 이제 막 40대에 진입하고 있다.

이들은 기존 40대와 차별화되는 주체다. 일종의 문화적 '리터러시'(literasy)의 문제. 90년대는 대중문화가 만개한 시기다. 신승훈, 전람회등 모던한 발라드. 듀스, 서태지와 아이들의 댄스와 힙합. 현재 아이돌 그룹의 시원인 H.O.T, 핑클. 문화적 자율화에 따라 영화와 드라마에서도 표현의 다양성이 급격히 확충됐었다. 즉 90년대에 20대를 보낸 70년대 초반생들은 현행 대중문화 감수성을 공유하는 마지막 세대란 얘기다. 그리고 90년대에 이뤄진 폭발적인 기술 발전과 보급은, 이들을 문화컨텐츠 접근과 소비를 위한 각종 테크놀로지 (인터넷, 컴퓨터, 각종 스마트 기기) 적응 능력의 세대적 보루로 만들었다.

<건축학개론>, <신사의 품격>으로 이어지는 단류는 이제 막 대중문화 향유의 변곡점을 통과하는 이들을 소비시장에 묶어두려는 시도다. 대중문화의 만개를 각인한 최초의 세대. 아직 충분한 문화적응력과 구매력, 접근능력을 소지하고 있지만, 대중문화와 해리되기 시작하는 70년대 초반생들을 만류하고 공략하는 것이다. (아울러, 역시 90년대의 일각을 잠재한 젊은 세대들까지 포섭하려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다행히도 90년대의 컨텐츠는 무궁무진하다. 그것들을 하나씩 현시하며, 예전의 감수성과 향수를 자극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90년대'는 문화자본의 수요창출 전략으로서 앞으로도 한동안 소환될 가능성이 높다.

<신사의 품격>은 90년대의 향수와 판타지를 조합하며 이런 전략을 충실히 수행한다. 90년대 홍콩느와르 bgm을 배경으로, 40대 아저씨들이 자장면을 먹으며 당구를 친다. 90년대 대학가, 90년대 히트 발라드가 현현하는 주점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과거를 재생한다. 아기자기한 설정을 통해 옛 추억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동시에 세월의 흐름과 관계없이 여전히 멋지고 근사한 불혹의 남자들의 '현재'를 전시한다. 문화적 향수를 자극하며, 당신들은 아직도 문화소비를 즐길 만큼 멋지고 세련된 주인공이라 자존감을 주입하는 것이다. 김선영 평론가가 <신사의 품격>을 '90년대 신세대의 후일담 판타지'라고 정의했다면, 나는 '90년대 문화소비주체의 현재적 재구성'이라 표현하고 싶다.

문제는 황진미 평론가가 지적했듯, <신사의 품격>이 제공하는 '현재'가 너무도 현실과 이격돼있다는 것이다. 선망과 동경의 정서를 유발하는 유사 판타지물은 대개 동일시와 대리만족의 타협으로 구성된다. 하지만 <신사의 품격>이 현전하는 현재, 그 어디에도 동일시가 드러설 자리는 없다. 신사들은 세련되고, 멋지고, 여유작작하다. 그들은 멋들어진 독신의 삶을 살고, 또래 패거리와 여가를 즐기며 희희낙락거린다. 그리고 그들의 판타지, 아니, 그들의 '품격'을 가능케 하는 원천은 물질적 풍요와 기반이다. 하지만 과연 '90년대의 신세대' 중에서 그들의 '현재'를 공유하고 있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현실에서 40대는 과로사 비율이 가장 높은 세대다. 그들에게 허락된 건 '신사'들의 '품격'을 감상하는 대리만족일 뿐, 드라마 속 그 어디에도 현실이 발 디딜 여백은 없다.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악몽과 단꿈, 둘 중 과연 어떤 것이 진정한 악몽일까. 악몽은 현실보다 꿈속이 두렵다는 거다. 반대로 단꿈은 현실보다 꿈속이 훨씬 달콤하단 것. 어차피 꿈은 꿈. 꿈에서 깨면 다시 장구한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 악몽에서 깨어나면 현실에 안도하지만, 판타지란 백일몽은 현실을 자조하게 만든다. 우리의 현실 어디에도 신사들의 일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과 동떨어진 판타지는 '90년대'란 과거를 소진할 뿐, 현재와 대면하지 않는다. <신사의 품격>이 발성하는 '40대란 호명'. 결국 그것은 현재를 사는 세대가 아닌 '문화소비의 주체'로서의 허구적 호명일 뿐이다. 과거를 빌미로 현실을 자조하게 만드는 드라마. '40대란 호명'은 결국 지나간 세월이 아늑한 향수만은 아니란 걸 일깨우는 셈이다.

신사의 품격 90년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