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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라카지>...정체성에 대한 거짓, 앨빈만이 아닙니다

[박정환의 뮤지컬 파라다이스]자기모순에 빠져야 동성애를 받아들일 수 있다?

12.08.03 17:13최종업데이트12.08.03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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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환 시민기자는 찰나의 순간 가운데서 영원을 바라보고프며, 화불단행과 소포모어 징크스를 경계하는 비평가입니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면서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을 추구합니다. [편집자말]

▲ 뮤지컬 <라카지> 넘버 "I am what I am"을 열창하는 앨빈(정성화) ⓒ 박정환


처음부터 플라톤의 <향연>을 들먹인다 해서 지레 겁먹지 말길 바란다. <라카지>를 철학으로 분석하기 위함이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나뉘었나에 관한 아리스토파네스의 이야기를 말하기 위해 <향연>의 이야기를 슬그머니 끄집어내는 거니까. 태초의 인간은 지금 우리가 아는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고 한다. 원래 태초의 인간은 지금 우리의 모습인 머리 하나, 팔과 다리는 두 개씩인 모습이 아니다. 머리는 둘이요, 팔과 다리는 각각 네 개씩 달렸다고 한다.

둘이 한 몸 안에 있던 태초의 인간은 '남자와 여자'라는 다른 성만 한 몸이었던 게 아니다. '남자와 남자' 혹은 '여자와 여자'처럼 같은 성을 한 몸 안에 갖고 있던 사람도 있었다. 제우스에 의해, 인간을 둘로 나눌 때 '남자와 여자'로 분리된 사람은 '이성애자'가 되지만, '남자와 남자', 혹은 '여자와 여자'로 분리된 사람은 '동성애자'가 된다. 둘로 나눠지기 이전의 남자 혹은 여자를 찾는 작업이 지금의 방식으로 표현하면 '사랑'이다.

그렇다. <라카지>는 <향연> 가운데서 아리스토파네스가 이야기한, 둘로 나눠진 사람과 사람이 만나 짝을 이루이잠 그 짝이 여자가 아닌 남자끼리의 짝, 게이 커플의 이야기를 다룬다. 게이 부부인 조지와 앨빈은 남자와 남자로 맺어진 인연이다. 하나 이들 게이 커플에게 균열이 생기면서 뮤지컬의 본격적인 이야기가 전개된다.

▲ 뮤지컬 <라카지> 넘버 "With Anne on my arm"를 노래하는 장 미셀(이창민) ⓒ 박정환


앨빈이 여자라는 정체성을 지워야 하는 서글픈 이유

조지의 생물학적 아들인 장미셀의 결혼 발표는 조지-앨빈 부부에게 있어 일상의 평온을 뒤흔드는 균열이 된다. 문제는, 예비 며느릿감인 안느의 아버지가 매우 엄격한 보수주의자이기 때문에 조지와 앨빈이라는 '게이 사돈'을 용납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동성애자가 보통의 이성애자로 보이기 위해 앨빈은 '미미크리(흉내 내기)'를 해야만 한다.

사랑하는 아들 장미셀의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예비 사돈이자 보수주의자인 딩동을 속여야 한다. 이를 위해 앨빈은 예비 사돈과의 원만한 상견례를 위하여 겉모습과는 달리 내면의 정체성은 여성이지만 남자 행세를 해야 한다. 앨빈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인 엄마 행세를 하는 날에는 보수주의자인 딩동에게 그 자리에서 파혼 당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남자인 '미미크리'로 위장해야 하는 '슬픈 엄마'가 되고 만다.

제목인 <라카지>라는 문장에는 '새장'이라는 프랑스 단어가 포함된다. 제목이 의미하는 '새장'을 알레고리적인 의미로 살펴보면 동성애자를 바라보는 세상의 '편견'을 의미한다. 동성애자, 게이라는 세상의 편견 가운데 놓인 조지-앨빈 커플 말이다. 동성애 부부라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채 앨빈이 남자 흉내를 내야만 한다는 건 동성애자가 세상의 편견이라는 '새장'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의미와 맥락을 같이 한다.

1983년도에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되었던 이 작품이 한국에서는 2012년에야 무대에 오를 수 있다는 것도 동성애를 향한 뮤지컬 <라카지>의 제목 속 단어인 '새장'과도 같은 그간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했음을 의미하는 반증이다. 소극장에서 간신히 명맥을 이어오던 동성애 뮤지컬이 이제야 대형 무대에 올라올 수 있다는 점은 한국 사회에서 동성애를 향한 '새장'이라는 빗금이 그만큼 견고하였음을 의미한다.

동성애자 엄마 앨빈의 '미미크리'를 다룸에 있어서는 비장함이나 심각함을 탈색하고 아들을 향한 엄마의 사랑으로 표현한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라며 탄식하던 홍길동의 탄식처럼 앨빈의 비애를 비장하게 묘사하지 않는다. 도리어 남자로 왜 가장해야 하는가를 설득하는 남편 조지의 설득에 마지못해, 아들의 원만한 상견례를 위해 아내 혹은 엄마의 정체성을 희생하는 엄마 앨빈의 모성애로 '미미크리'의 당위성을 표현한다.

관객은 엄마에게 남자 역할을 강요하는 장미셀이나 남편인 조지보다는 앨빈에게 감정이입할 가능성이 크다. 여자의 정체성을 떳떳하게 드러내지 못하는 비애로 말미암아, 여자라는 정체성을 남자로 속여야 하는 '자기모순'을 당해야 함에도 아들의 순탄한 결혼식 상견례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모성애'에 때문에 관객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감정이입하게 된다.

▲ 뮤지컬 <라카지> 다채로운 쇼잉을 선사하는 라카지 걸 ⓒ 박정환


딩동이 자기모순에 빠져야 동성애를 받아들일 수 있다

장미셀이 상견례에서 앨빈에게 남자 역할을 해달라고 부탁하며 동시에 생물학적인 진짜 엄마를 불러달라고 조지에게 부탁하는 건 낳은 정이 기른 정을 압도한다는 걸 뜻하기도 한다. 같은 젠더인 남자로서의 엄마 앨빈은 예비 장인 딩동의 기준으로 본다면 절대 용인하지 못할 존재다. 이에 장미셀은 자신을 길러준 엄마 앨빈에게 남자가 되어주길 강요한다.

하지만 그간 얼굴 한 번 제대로 보지 못했던, 자신을 낳아준 엄마는 상견례에 기꺼이 참석해주기를 바란다. 장미셀이 딩동에게 합격점을 받기 위해 앨빈에게 남자 역할을 요청하고 생물학적 엄마를 초청한다는 건, 앨빈이 그간 장미셀을 키워주었다는 기른 정보다는 생물학적 엄마라는 낳은 정을 우선시하는 행동이다. 

극우 보수주의자 딩동이 조지-앨빈이라는 동성애자 사돈을 받아들이는 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자기모순'에 빠질 때 가능한 일이었다. 딩동은 동성애를 결코 용납하지 못하는 보수주의자다. 조지-앨빈이 동성애자라는 걸 아는 날에는 결혼은 저 멀리 루비콘 강을 건널 것이다. 뮤지컬 <라카지>가 파혼이라는 극한으로 치닫지 않는 건 딩동이 동성애를 용인해야 가능한 일이다.

한데 딩동에게 동성애를 용인하게 만든다는 건 논리적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당선만 된다면 동성애자 클럽을 이 도시에서 박멸하겠다면서 보수주의자의 결집을 노리는 딩동이니 말이다. 이러한 딩동이 동성애자를 예비 사돈으로 받아들이는 건 자신이 동성애자의 입장에 서는 '자기모순'에 빠질 때에야 가능한 일이다. 딩동이 동성애자의 입장에 서지 않고서는 딸과의 결혼을 승낙하는 일에 있어서는 물론이요 정치적 위기도 극복할 수 없어서다.

'자기모순'은 뮤지컬 <라카지>의 1막과 2막을 관통하는 공통된 코드 가운데 하나로 관찰된다. 딩동이 보수주의자라는 경계를 깨는 '자기모순'에 빠져들어야 장미셀과의 결혼이 성사되고 정치적인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건, 아들의 결혼 상견례를 순조롭게 성사시키기 위하여 앨빈이 아내와 엄마라는 정체성을 깨고 남자를 흉내 내는 '자기모순'에 빠져야 하는 상황과 밀접하게 맞물린다. '자기모순'은 앨빈과 딩동이 그간 갖고 있던 기존의 정체성을 숨기고 다른 정체성으로 위장하게 만드는 심적 동인으로 작용한다.

라카지 남경주 정성화 천호진 이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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