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스타

100득점 신화 윌트 체임벌린

12.08.27 15:56최종업데이트12.08.27 15:56
원고료로 응원
올해는 윌트 체임벌린이 NBA 한 경기 100득점 기록을 세운 지 50주년 되는 해다. 이 불멸의 기록을 NBA는 기념했다. 지난 3월2일(현지시각) 필라델피아는 체임벌린 기념 경기를 치렀다. 이날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는 웰스파고센터에서 열린 홈경기에서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 105-83으로 이겼다. 팬들이 윌트 체임벌린에 헌사를 보내는 등 기념행사가 벌어졌다.

체임벌린은 귀가 솔깃한 기록을 세웠다. 체임벌린은 ▲ 한경기 최다 득점 100득점 기록 ▲ 9게임 연속 트리플더블 ▲ 한시즌 4000득점 이상 기록(4029)으로 역대 1위 ▲ 한시즌 평균득점 50점 이상 기록(50.4점)으로 역대 1위 ▲ 한시즌 역대 평균 리바운드 27.2개로 1위 ▲ 한시즌 리바운드 2149개로 역대 1위 ▲ 한시즌 평균 출장시간 48.5분으로 역대 1위 ▲ 한시즌 필드골 성공율 0.727로 역대 1위 ▲ 14경기 연속 40득점이상 기록으로 역대 1위 ▲ 신인최초 신인왕과 시즌 MVP 동시 수상 ▲ NBA역사상 최초 더블 트리플더블 기록(득점, 리바운드, 어시스트 각 20개 이상, 22득점 25리바운드 21어시스트) ▲ NBA역사상 총 8회 쿼드러플 더블더블 기록(득점, 리바운드 각 40개 이상) ▲평균 리바운드 22.7개로 역대 1위 ▲통산 11회로 최다 리바운드왕 ▲통산 최다 리바운드 (23924개) ▲7년 연속 득점왕으로 마이클조던과 공동 1위 ▲센터로서 최초로 어시스트 1위 등의 기록을 세웠다.

체임벌린이 100득점 올리던 날

1962년 3월2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허쉬스포츠아레나에서는 필라델피아 워리어스와 뉴욕 닉스의 경기가 열렸다. 필라델피아의 윌트 체임벌린은 4쿼터 3분을 남기고 89득점을 올리고 있었다. 경기 막판 관중들은 일제히 "We want a hundred"를 외쳤다. 종료 46초를 남은 상황에서 체임벌린은 골대 근처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공은 그에게 정확히 전달됐다. 체임벌린은 공중에서 공을 잡고 림에 꽂았다. NBA 역사상 최초이자 아직까지 깨지지 않고 있는 1경기 100득점 경기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만 25세의 체임벌린은 NBA에 새 역사를 썼다.

경기는 필라델피아가 닉스를 169-147로 이겼다. 팀 동료들은 체임벌린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216cm 125kg의 체임벌린이 페인트존에 자리를 잡으면 상대팀 입장에서는 곤란했다. 3초룰이 있었지만 체임벌린은 영리한 선수였다. 기민한 움직임으로 좋은 자리를 잘 잡았다. 동료들의 질 좋은 패스를 능동적으로 받아냈다.

체임벌린은 100득점을 올린 경기에서 2점슛 36개(63개 시도, 42.9%성공률)와 자유투 28개(32개 시도, 87.5%성공률)를 성공했다. 정확히 100득점(1쿼터23점, 2쿼터18점, 3쿼터28점, 4쿼터31점)을 기록했다. 리바운드 25개와 어시스트2개도 곁들였다.

체임벌린의 100득점 경기 전에는 몇 가지 심상치 않은 복선이 있었다. 100득점 경기 2달 전인 1962년 1월13일 시카고와 경기서 체임벌린은 73득점의 폭발력을 보여줬다. 이는 아직까지 NBA 역대 한 경기 개인 최고득점 5위다. 당시 체임벌린과 라이벌 관계에 있던 또 다른 레전드 빌 러셀은 "체임벌린을 라커룸에 묶어두지 않으면 한 경기 100득점도 올릴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그리고 러셀의 예언은 적중했다.

체임벌린의 100득점 기록 당시 경기에 쓰인 공은 2000년대 총 뉴욕 르랜드 경매소에서 55만1844달러(약 6억)에 낙찰됐다. 공을 경매에 내놓은 사람은 케리 라이먼이라는 한 시민이었다. 라이먼은 14살 때 100득점 경기를 직접 현장에서 봤다. 장내가 대기록 작성으로 혼란스러울 때 공을 몰래 챙겨 38년간 보관하다 경매에 내놨다. 공을 구입한 사람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경매를 진행한 르랜드 경매소는 15%인 8만2650달러를 커미션으로 챙겼다.

미국 프로스포츠 사상 가장 위대한 1962년

체임벌린은 캔자스대학을 졸업했다. 1959년 필라델피아 워리어스가 체임벌린을 1라운드 2순위로 지명했다. 체임벌린은 1960년 데뷔해 시즌 평균 50.4득점을 올렸다. 신인왕도 체임벌린 몫이었다.

체임벌린은 1961-1962시즌에 평균 50.4득점 25.7리바운드를 기록했다. 44경기에서 50득점 이상을 넣었다. 3월16일에는 NBA 최초로 3000득점을 넘어섰다. 당시 체임벌린이 기록한 시즌 총 득점 4029득점은 마이클 조던이 1986-1987 시즌 세운 3041점 보다 988득점 많다. 물론 포지션과 시대적 배경을 따지면 단순 비교는 무의미하지만 말이다.

미국 스포츠 전문채널 ESPN은 '스포츠 역사상 상징적인 몇 가지 기록들'이란 평가를 내놓은 바 있다. 체임벌린의 1경기 100득점 기록은 빌 러셀의 NBA 통산 11회 우승, 존 우든 감독의 NCAA 통산 10회 우승과 함께 농구분야에서 대표로 선정됐다.

또한 ESPN은 "미국 프로스포츠 사상 가장 위대한 시즌은 프로농구(NBA) 윌트 체임벌린의 1961-1962 시즌"이라고 2008년에 분석했다. 당시 2위는 프로야구(MLB)의 베이브 루스가 59개 홈런을 친 1921년이 꼽혔다. 3위는 아이스하키(NHL) 웨인 그레츠키의 1981-1982 시즌이 선정됐다. 4위는 타이거 우즈가 메이저 대회 9승을 올린 2000년 시즌이 뽑혔다.

하지만 아이러이한 부분도 있다. 이렇게 전설적인 기록과 최고의 시즌이 어우러진 1962년에 체임벌린은 큰 상 하나를 받지 못했다. 최우수선수(MVP)는 체임벌린이 아닌 러셀의 차지가 됐다. 기자 투표에서 체임벌린은 5표 밖에 받지 못했다. 러셀은 19표를 얻었다.

6반칙 퇴장 없는 전설

이 밖에도 체임벌린은 ▲ NBA 파이널 우승 2회(1967, 72년) ▲ 파이널 MVP 1회(1972년) ▲ 정규시즌 MVP 3회(1960, 66, 67, 68년) ▲ 퍼스트 팀 선정 7최(1960, 61, 62, 64, 66, 67, 68년) ▲ 수비 베스트5 2회(1972, 73년)를 수상했다.

체임벌린의 대표적인 기록으로는 7년 연속 득점왕(1960~66년)과 11회 리바운드 왕(1960-63, 1966-69, 1971-73년)이 있다. 깨지기 힘든 기록이다.

체임벌린은 자신의 가장 의미 있는 기록은 "빌 러셀과 맞붙은 경기에서 1경기 리바운드 55개를 잡은 것"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체임벌린이 말한 경기는 1960년 11월 25일을 말한다. 그만큼 체임벌린에게 러셀은 큰 벽이었다. 러셀도 체임벌린이 까다롭기는 마찬가지였다. 러셀은 "개인기량에서는 체임벌린을 이길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체임벌린과 러셀은 10년간 NBA 라이벌로 지냈다. 체임벌린은 이 기간 동안 1번 우승했지만 러셀은 9번 우승했다.

또한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체임벌린은 14시즌을 치르며 6반칙 퇴장으로 코트를 물러난 적이 없다는 점이다.

윌튼 체임벌린(Wilton Norman Chamberlain)

미국 출생(1963.08.21-1999.10.12)
216.0cm  체중 : 125.0kg

1968-1973 LA 레이커스
1965-1968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1962-1965 샌프란시스코 워리어스
1959-1962 필라델피아 워리어스

14시즌간 선수 생활
1978년 명예의전당 헌액

덧붙이는 글 http://blog.naver.com/komsy
윌트 체임벌린 체임벌린 NBA 100득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