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계절에 생각나는 긴 호흡의 시선

김기덕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등록 2012.12.11 10:01수정 2012.12.11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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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거 기간은 국민들의 다양한 소원과 욕망이 후보들의 입을 통해 폭발하는 시기이다. 선거일이 코앞으로 다가옴에 따라 박근혜, 문재인, 이정희 등 대통령 후보들이 모두 "소원을 말해봐, 다 들어줄게"식으로 달콤한 공약을 쏟아내고 있다. 

19일이 지나면 한 후보가 대통령이 될 것이고 그녀/그를 지지했던 사람들은 환호하고 다른 후보를 지지했던 많은 이들은 낙담하게 될 것이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자기를 희생하며 선거 캠페인에 참여했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이 지지했던 후보가 떨어진 사람들은 심각한 스트레스와 절망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들에게 올 겨울은 더욱 추울 것이다. 늘 보아왔듯이, 환호했던 사람들을 포함한 대다수 국민들은 대통령 취임 1년이 지나지 않아 그녀/그의 공약이 모양내기 빈 공약이 되었다고, 그럴 줄 진작부터 알았다고 하면서도 분통을 터뜨릴 것이고, 그녀/그의 재임기간 5년 동안 결핍과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 할 것이다.


이것이 5년마다 되풀이되는 한국 정치 시스템이다. 소원과 약속과 절망과 인고의 사계절에 이어 다시 소원과 약속과 절망과 인고의 사계절이 되풀이되는 것이다. 이럴 때 보고 싶은 영화가 있다. 답답한 현실에 절망하거나 허무감에 빠지는 이에게 한 호흡 더 긴 시선을 주는 영화가 있다. 김기덕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김기덕 감독의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김기덕

영화는 나무들이 울창하고 맑은 계곡물이 흐르는 산들로 둘러싸인 신비스런 호수 위에 떠있는 절 인생암에서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다시 봄에 일어나는 이야기이다. 주인공은 한 남자이지만 그는 계절이 지남에 따라 동자승에서 소년승, 청년승, 장년승, 노년승으로 변화한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 날, 천진난만한 동자승은 맑은 물 흐르는 계곡에서 잡은 물고기, 개구리, 뱀에게 짓궂게 돌을 매달면서 즐거워한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노승은 잠든 동안 동자승의 등에 돌을 묶어 매단다. 아이가 깨어나 힘들어 하자 노승은  그가 한 짓을 되돌려 놓지 못하면 평생 돌을 마음에 지니고 살 것이라고 말한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김기덕 감독의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김기덕

만물이 무성하게 자라는 여름, 이제 동자승은 소년승으로 자랐다. 그는 산사에 요양하러 온 소녀를 뜨겁게 사랑하게 된다.  병이 나아 소녀가 떠나자 소년승은 사랑의 욕망을 따라 산사를 떠난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김기덕 감독의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김기덕

숲이 울긋불긋하게 물든 가을, 절을 떠난 후 십여 년 만에 소년승은 이제 청년이 되어 돌아온다. 자신을 배신한 아내를 죽이고 산사로 도피해 온 것이다. 그는 아내를 소유하려는 집착과 배신에 대한 분노로 고통스러워하다 불상 앞에서 자살을 시도한다. 그를 노승은 매질한 후 마룻바닥에 반야심경을 써준다. 청년은 밤새 반야심경을 칼로 새기고 경찰과 함께 절을 떠난다.


사방이 얼어붙은 겨울, 노승이 죽고 오랜 시간이 지나 감옥 간 청년은 장년이 되어 폐허가 된 산사로 돌아온다.  노승의 사리를 거두고 심신을 수련하는 동안 이름 모를 여인이 찾아와 아이를 남겨놓고 떠나다가 그가 세수하던 얼음구멍에 빠져 죽는다. 남자는 머리를 깎고 멧돌을 끌고 반가사유 부처상을 들고 높은 산위로 올라간다. 온 힘을 다해 산 위에 오른 그의 눈앞엔 무수한 산들이 첩첩이 쌓여 있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김기덕 감독의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김기덕

      
 김기덕 감독의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김기덕 감독의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김기덕

그리고 다시 봄 날, 노승이 된 남자는 자라난 동자승과 산사에 평화롭게 살고 있다. 동자승은 노승이 어렸을 때처럼 개구리와 뱀의 입속에 돌멩이를 집어넣고 천진한 웃음을 터트린다. 이 때 카메라는 천진하게 웃는 동자승의 얼굴에서 그가 사는 절 인생암과 호수 그리고 주변의 첩첩한 산들을 바라보는 반가사유 부처의 시선으로 이동한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김기덕 감독의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김기덕

반가사유 부처의 시선을 보여주는 마지막 쇼트는 영화의 주제를 잘 표현하고 있다. 인생의 계절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1회 순환, 즉, 욕망과 만족 또는 좌절의 단순 드라마로 끝나지 않는다. 봄이 다시 돌아온다. 그러나 만물이 소생하는 이 봄은 순수한 무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순수하고 천진한 새 생명엔 불교적으로 말하면 지난 많은 생의 총업(總業),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원죄인 욕망이 꿈틀거린다. 대상을 만나게 되자 이 욕망은 또다시 탐욕과 집착과 분노와 절망의 드라마를 짓는다. 

번뇌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자는 첩첩이 쌓인 업장을 없애야 하는데, 업장을 녹이는 지혜의 길은 무엇보다도 부처의 시선, 즉, 욕망의 주인인 내(我)가 실체가 아니라 수 많은 인연의 계열이 만나는 지점에 일어나는 상(假我)임을 깨닫는 것이다. 영화의 인생암이 호수에 떠 있는 것은 모든 것이 본질적 실체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 과정 속의 현상임을 상징한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김기덕 감독의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김기덕

<인생암>에 사는 주인공이 동자승, 소년승, 청년승, 장년승, 노년승으로 변하는 동안 이를 연기하는 배우가 모두 다른 것 또한 우리의 자아가 고정된 실체가 아님을 나타낸다. '나'라고 하는 것이 가아이기 때문에 나의 만족과 좌절, 행복과 불행, 희망과 절망, 유토피아와 지옥, 삶과 죽음은 무수한 사업(私業)과 공업(公業)의 인연이 만나 일어나는 현상일뿐이다. 이를 바라보는 참된 나(眞我)는 현재의 나와 나를 둘러싼 인연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현재의 나와 나를 둘러싼 인연이 없다거나 무가치하다고 하지 않는다. 현재의 나와 나를 둘러싼 인연을 떠난 참된 나는 없다. 지금 이곳에서 현실의 나와 나를 둘러싼 무수한 인연을 좋게 만들기 위해 온 노력을 다하지만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성취나 좌절에 마음을 묶지 않는다. 여기에 부처의 시선의 넓고 그득함이 있다.

개인의 수양 드라마처럼 사회의 혁명 드라마도 모순, 혁명, 유토피아로 구성되는 1회 단막극으로 끝나지 않는다. 한 번의 혁명 뒤엔 첩첩이 쌓인 혁명의 길이 놓여있다. 사실이 이럴진대, 한 번의 희망이 무너지는 것은 큰 일이 아니다. 대수롭지도 않은 일이다. 진정 희망을 품는 자는 희망을 첩첩이 가져야 한다. 이번 정치의 계절에 봇물처럼 소원을 말했던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아마도 삶의 호흡을 더 길게 바라보게 해주는 <인생암>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지지한 후보가 당선되든 낙선되든 다 함께 행복한 사회로 가는 길은 첩첩산중의 길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정경훈 아주대 영문과 교수가 썼습니다.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은 1,000여명의 교수 회원들로 구성된 교수단체이다. 87년 창립된 이후 현재까지 사회민주화와 교육개혁을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을 해왔다. <영화를 읽다>는 민교협 회원들이 돌아가면서 연재하며, 매주 1회 화요일에 게재한다. 이 칼럼은 민교협의 홈페이지에도 함께 올라간다.
#민교협 #정경훈 #영화를 읽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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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는 1000여 명의 교수 회원들로 구성된 교수단체다. 1987년 창립된 이후 현재까지 사회민주화와 교육개혁을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을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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