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남자들, 화장실 문화가 독특하네

[불혹 배낭여행기 ⑥] 1200km를 달려 겨우 얻었다, 이란 여행비자

등록 2012.12.23 11:31수정 2013.03.22 17:16
0
원고료로 응원
a

터키 국경을 넘어 이란으로 가기 위해 사흘을 머물렀던 마을 도우베야짓. 마을 외곽에 오래 전 축조된 궁전이 있다. ⓒ 홍성식


이란에 가닿는 길은 멀고도 힘겨웠다. 터키의 세 도시를 분주히 오가며 1200km를 달려 겨우겨우 얻어낸 이란 여행비자. 나는 왜 그토록 이란에 가고 싶어 했을까?

세칭 '9·11 테러'를 이유로 미국이 두 번째로 이라크를 침공했을 때다. 선후배들과의 모임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 기억이 있다.


"많은 기자들이 이라크 바그다드로 취재를 가고 싶어 하는데 이해가 잘 안 된다. 총알에는 눈이 달리지 않았으니 그게 기자들만 피해서 날아갈 리 없다. 미군이 뿌려대는 폭탄과 총알에 아이와 노인들도 죽어가는데, 무슨 용기들인지 모르겠다."

그랬다. 나는 사실 용기 있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다. 그랬던 내가 이라크 바로 옆에 위치한 나라이자, '위험스런 불량국가'로 이야기되는 이란엘 왜 그렇게 가려 애썼는지 스스로도 의문이다. 아마 가보지 못한 미지의 공간에 대한 동경 탓이었을 것이라 추측해보는데 그것도 확실치는 않다.

a

버스 안에서 내다본 이란의 풍광. 사막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 홍성식


어렵다... 눈동자 색깔까지 적으라고 하는 이란 비자신청서

지난해 봄. 우크라이나 키예프를 경유해 터키 이스탄불에 도착해 가장 먼저 한 일은 이란대사관을 찾아 여행비자를 신청한 것이었다. 인터넷을 통해 접수해야 했는데, 적어야 하는 항목이 100개가 넘었고, 질문도 까다롭기 짝이 없었다. 내 눈동자의 색깔과 이미 사망한 내 아버지의 이름, 결혼 여부까지.

끙끙대며 항목 하나하나를 상세히 적어 서류를 전송해놓고 2주를 기다렸다. 그러나, '여행비자가 발급됐다'는 답장이 없었다. 이쯤 되니 화가 난다기보다 오기가 생겼다. 혼잣말을 했다. "이란, 반드시 가고야 만다."


풍문을 들으니 이스탄불보다는 다른 도시에서 신청하는 게 비자 받기가 쉽다고 했다. 역으로 가서 기차표를 끊었다. 터키 동부 에르주름으로 가는 티켓이었다. 이스탄불에서 1200km가 넘는 거리. KTX처럼 빠른 기차가 터키엔 없었다. 연착을 거듭한 끝에 34시간 만에 에르주름에 도착했다. 거기서 하루를 자고 러시아와 이마를 맞대고 있는 흑해 연안의 항구도시 트라브존으로 내처 달렸다. 다시 버스로 5시간. 

트라브존은 이란 여행비자가 가장 신속하고, 쉽게 발급되는 도시라고 했다. 이란영사관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앞서 말한 100여 개 항목의 질문이 있는 비자신청서를 다시 써야한단다. 쓰라니 쓸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돌아가신 내 아버지의 이름을 또 한 번 썼고, 내 눈동자 색깔이 '다크 브라운'이라는 걸 새삼 확인했다. 결혼은 왜 안 했느냐 물어서 "여행에서 돌아가면 할 것"이란 거짓말까지 했다. 무슬림 국가에서는 미혼의 단독여행자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마지막 순서는 터키 중앙은행 트라브존 지점으로 가서 비자 비용을 송금하는 것.

이 모든 과정을 거친 끝에야 비로소 '이슬라믹 리퍼블릭 오브 이란'(Islamic Republic of Iran) 글자가 선명한 비자를 얻을 수 있었다. 영사는 여행비자를 붙인 여권을 돌려주며 이란 지도까지 덤으로 줬다. 수염이 가시처럼 돋은 험상궂은 표정과는 전혀 다르게 선량하게 웃으며.

a

이란 이스파한의 이맘광장. 저물녘이다. 이곳을 다녀온 프랑스의 한 시인은 여기를 "세상의 절반"이라고 했다. ⓒ 홍성식


a

이슬람 전통의상 차도르로 몸을 가린 이란 여성들. ⓒ 홍성식


그랬다. 이슬람성당인 모스크와 모스크를 호위하듯 서 있는 거대한 기둥 미나렛(minaret), 무슬림들의 기도 시간을 알리는 에잔(Ezan)과 눈을 제외하고 온몸을 검게 휘감은 차도르(Chador)로 상징되는 이란을 여행할 수 있는 기본적인 준비를 갖추기까지 이렇게 애를 먹었다.

어렵게 얻은 여행비자를 가지고 이란과 국경을 접한 터키의 동북부 끝마을 도우베야짓을 향했다. 거기까지 또 버스로 10시간.

성서 속 '노아의 방주'가 발견됐다는 도우베야짓에서 사흘을 머물며 이란에 들어갈 준비를 했다. 거기서 우연찮게 너무도 친절한 쿠르드족 사람들을 만나 잊기 힘든 몇몇 추억을 쌓았으나 그 이야기는 잠시 미뤄두고자 한다. 

a

성서 속 '노아의 방주'가 발견됐다는 아라라트산. 도우베야짓에선 그 산이 한눈에 보인다. ⓒ 홍성식


닥쳐온 위기, 말도 글도 모르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마침내 머리 위 태양이 무섭게 내려쬐던 2011년 5월 어느 날. 터키 국경검문소를 넘어, 군인들이 순찰을 도는 입국장까지 통과했다. 이란에 온 것이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영어가 통하지 않았다. 여행 4개월 동안 태국과 캄보디아, 라오스와 베트남, 우크라이나와 터키에선 그래도 어영부영 먹혀들던 내 '엉터리 영어회화'는 이란에서 온전히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a

친절하고 선량한 이란 사람들. ⓒ 홍성식


조그만 국경마을 바자르간. 막막했다.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노인들 중 누구도 버스터미널을 찾는 내 조악한 영어에 답하지 못했다. 손짓에 발짓, 거기에 의성어까지 동원해 겨우겨우 테헤란 행 버스가 정차된 터미널을 찾았다. "오늘 안으로 테헤란 가는 버스를 타야한다"는 의사를 몸짓으로 전했다.

턱과 가슴에 장비 같은 수염을 매단 덩치 큰 버스회사 직원이 승차권을 끊어주며 "여기서 기다려요(Stay Here)"라고 했다. 이란에 들어와 들은 영어 중 가장 긴 문장이다. 그런데 이것 봐라. 승차권을 보는데 도대체가 단 한 글자도 읽을 수가 없다. 출발 시간과 좌석 번호, 승강장 위치와 차비까지가 모조리 '난해한 암수표' 같은 페르시아어로 적혔다.

숫자도 아라비아 숫자가 아닌 '파르시'다. 말 안 통해, 거기에 글자까지 읽을 수가 없으니 이건 눈 뜬 장님이 따로 없다. 버스비를 바가지 쓰지 않고 제대로 지불한 것인지, 출발 시간은 언제인지, 저렇듯 많은 버스 중 내가 타야할 것은 대체 어떤 차인지 하나도 알 수가 없다.

a

페르시아어로 적힌 화장실 안내판. 그림이 고마웠다(?) ⓒ 홍성식


a

이란 버스 티켓. 문자는 물론, 숫자도 읽을 수가 없었다. ⓒ 홍성식


일순 공황상태에 빠진 나. 하지만, 눈치를 보아하니 차가 곧 출발할 것 같지는 않다. 근처 식당에서 밥부터 먹기로 했다. 바자르간에서 테헤란까지는 최소 12시간이 걸린다는 이야기는 다른 여행자들로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에 일단 허기부터 끄기로 한 것이다.

풀풀 날리는 밥 위에 양념한 양고기 꼬지를 올린 '이름 모를' 음식을 역시 손짓으로 주문했는데, 냄새부터가 수상스럽다. 물기 한 점 없는 이란 요리. 그 퍽퍽함과 오묘한(?) 향기를 견디기 힘들어 한국에서라면 1년 가야 두어 번도 마시지 않는 콜라를 연거푸 2병이나 벌컥벌컥 들이켰다.

의사소통 불가에, 입에 맞지 않는 음식. '정말이지 이란 여행 쉽지 않겠구나'라는 생각에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게다가 이란은 '신성 무슬림 국가'라 술도, 술집도 없다. 음주가 불법인 나라에 찾아온 술 좋아하는 나.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아주 잠깐 슬퍼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란 도착 첫날 내가 한 걱정은 정말이지 기우에 지나기 않았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99% 이란 사람들의 무조건적인 선량함과 친절을 몰랐던 것이다.

a

이란에서 자주 먹었던 음식. 양고기를 다져 굽고, 향신료와 버터를 넣어 밥을 짓는 듯 했다. 구운 토마토도 엄청 많이 먹었다. ⓒ 홍성식


이란을 여행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바로 이것

가장 큰 문제로 생각됐던 의사소통의 힘겨움. 그게 해결된 건 우습게도 테헤란 버스터미널 화장실에서였다. 분명 남자 그림이 그려진 화장실로 들어왔는데 소변기가 없다. 여자화장실로 잘못 왔구나 싶어 깜짝 놀라 돌아나가는데 한 청년이 "여기가 남자용이 맞다"며 웃었다.

한참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이란 남자화장실엔 소변기가 없다. 이란 남자들은 화장실 칸막이 속으로 들어가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소변을 본다. 이게 이슬람 스타일이고, 이런 걸 '문화충격'이라고 해야 하나.

어리둥절해 하며 볼일을 마친 날 붙들고 그 청년이 묻는다. "어디에서 왔냐"고. 이 친구는 영어를 곧잘 한다. 반갑기 그지없어 지금껏 겪은 어려움을 서툰 영어로 주절주절 쏟아냈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대체 앞으로 숙소와 여행지를 어떻게 찾아다녀야 하냐"는 걱정에 그가 내놓은 해결방안은 너무나 간명했다.

"당신이 찾고 있는 호텔 이름과 동네 이름이 뭐냐"고 물어보는 청년. 얻어들은 정보를 통해 알고 있던 거리와 숙소 이름을 말해줬다. 그랬더니 다짜고짜 자신의 노트 한 장을 찢어 '휘황한' 페르시아어를 두어 줄 휘갈겨 건넨다. 내가 찾아가야할 장소와 '이 사람을 도와주세요'라는 문장이란다.

아, 이런 방법도 있었구나. 그때부터였다. 이란 여행 17일 동안 영어를 할 줄 아는 이를 만나면 만사 제쳐두고 가고 싶은 다음 도시와 외국인이 머물 수 있는 숙소, 주요한 관광 포인트를 페르시아어로 써달라고 부탁했다. 그게 가장 든든한 여행지도가 되고 가이드북이 돼준 것.

그런데, 그걸 보여줘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으면 무슨 소용일까란 고민은 하지 않아도 된다. 내 경험에 미루어 보면 10명 중 9명의 이란 사람들은 그 쪽지를 본 순간 소매를 끌고 당신이 가고자 하는 바로 그 동네, 그 장소까지 정확하게 데려줄 것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계간문예지 <문학의오늘>에 연재되고 있는 여행기입니다.
#이란 #이란비자 #이슬람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61세, 평생 일만 한 그가 퇴직 후 곧바로 가입한 곳
  2. 2 천연영양제 벌꿀, 이렇게 먹으면 아무 소용 없어요
  3. 3 버스 앞자리 할머니가 뒤돌아 나에게 건넨 말
  4. 4 "김건희 여사 라인, '박영선·양정철' 검토"...특정 비서관은 누구?
  5. 5 죽어라 택시 운전해서 월 780만원... 엄청난 반전이 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