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래 맛본 '그것'... 아내에게도 말 못한 비밀

[불혹 배낭여행기 ⑦] 이란 사람들이라고 일탈 욕구가 없을까

등록 2012.12.27 09:01수정 2013.03.22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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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과 배려는 이란 사람들의 일상인 것처럼 보였다. ⓒ 홍성식


테헤란 버스터미널에서 만난 알리라는 이름의 청년이 써준 '쪽지'를 보물처럼 챙겨 거리로 나섰다. 그리고 출근을 서두르는 듯한 착하게 생긴 아저씨 앞에 다짜고짜 그걸 내밀었다. 내가 찾는 숙소와 그 숙소가 위치한 거리 이름이 페르시아어로 적힌.

놀라워라. 그는 제 가던 길을 포기하고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는 것은 물론, 경찰에게 길까지 물어가며 내가 테헤란에서 묵을 호텔 바로 앞까지 바래다줬다. 자신의 아까운 시간을 1시간 넘게 뺏겼으면서도 귀찮다거나 싫어하는 기색 하나 없이.


무슬림들은 타자에게 베푼 친절과 자비가 자신의 덕으로 쌓인다고 믿는다는 걸 익히 들은 바 있다. 하지만 말이 그렇지 현실에서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고맙기 짝이 없었다.

테헤란 관공서 벽엔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무슬림은 형제다.

허나 그 아저씨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종교를 가지지 않았기에 이교도와 다름없는 나까지 형제로 대해준 것이다.

사례를 거부하고 총총히 제가 가야 할 곳으로 돌아가는 그 사람을 불러 세워 내 이름을 말해줬다. 영어를 알아듣지 못했지만 웃음 가득한 얼굴로 자기는 "후세인"이란다. 소리 없이 새겨지는 조용한 미소가 살아생전 내 아버지의 그것과 닮았다.


그때였다. 나는 지레짐작 이란에 관해 느꼈던 선입견과 두려움을 남김없이 털어낼 수 있었다. 이처럼 터무니없이 착한 사람들이 사는 땅이라면 어떤 어려운 상황이 닥치건 무슨 걱정이 있을까 싶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란 여행이 끝날 때까지 내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수많은 알리와 후세인, 그리고 모하메드가 증명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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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사막 한복판에 위치한 페르세폴리스. 제국을 호령한 황제들의 여름 별궁이었다고 한다. 수천 년 전 번성했던 왕조를 증명하듯 남아있는 기둥들의 크기가 어마어마했다. ⓒ 홍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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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300>에 등장하는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와 그의 아버지 다리우스는 바로 이 페르세폴리스에서 인도와 이집트에서 온 사신들을 맞았다고 한다. ⓒ 홍성식


이란, 순진하고 선량한 사람들의 나라   

약간의 과장을 보태자면 이란에선 남자에게 이름을 따로 물어볼 필요가 없다. 사내 10명 중 7명의 이름이 모하메드, 알리, 후세인 중 하나이기 때문. 이들 모두는 가족 관계로 엮인 초기 이슬람교의 지도자다. 이란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그들과 동일화함으로써 존경과 흠모를 바치고 있는 듯 보였다.

이란을 떠돈 2주 넘는 기간 동안 100명에 가까운 후세인, 알리, 모하메드를 만났다. 그처럼 똑같은 이름을 사용하는 이들의 또 다른 공통점 하나가 있다면 열 중 아홉이 수십 년 전 한국 시골의 할아버지 할머니처럼 순박하고, 순진하다는 것. 그들의 조건 없는 친절과 배려 덕택에 섭씨 40도를 넘나드는 살인적인 무더위와 차가운 맥주 한 잔 구할 수 없는 스트레스, 입에 맞지 않는 음식도 기꺼이 참아낼 수 있었다.

이란 사람들의 웃음엔 설명하기 힘든 기품과 힘이 담겼다. 수천 년 전 한때 인도에서 아프리카 서부까지를 아우르는 '페르시아'란 이름 아래 세계의 문화와 정치를 주도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그 영광은 이미 오래전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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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서 만난 이란 청년들. 이들은 지금 자신들이 처한 고립의 상황과 그 옛날 페르시아 제국의 영광 사이에서 무슨 생각을 하며 살까? ⓒ 홍성식


이젠 지구 위에서 가장 강력한 물리력을 가진 미국과 맞섬으로써 겪고 있는 고통만이 그들의 몫. 하지만 이것 역시 운명처럼 받아들이며 묘한 매력의 미소를 짓는 나라.

남녀와 노소를 가리지 않고 환하게 웃는 얼굴로 여행자를 대하는 이란 사람들을 볼라치면 "이란 여행이 아름다운 건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의 만남 때문"이란 말이 그저 입에 발린 공치사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이란의 매력이 '사람'에게만 모두 집중돼 있는 건 아니다. 볼거리 역시 만만찮다. 버스를 타고 달리는 내내 끝없이 펼쳐지는 아득한 사막 풍경은 노스탤지어를 절로 불러일으키고, 매혹적인 도시 이스파한에 그림처럼 들어선 이맘광장의 황금빛 모스크는 이슬람 건축예술의 한 절정을 보여준다.

2500여 년 전 아케메네스 제국의 황제 다리우스와 크세르크세스의 여름 별궁으로 사용된 페르세폴리스의 장엄한 폐허 역시 부연이 필요 없을 정도로 근사하다. 서방세계가 악의적인 선전을 계속해온 탓에 '모래바람 부는 허허벌판에 코란과 폭탄을 든 사람들'만 있는 것처럼 오해되고 있는 이란.

내가 거길 가겠다고 하니, 대부분의 지인들이 걱정하며 말렸다. "다른 좋은 나라도 많은데, 왜 하필 거기냐"고. 실체를 볼 수 없는 사람들에게 악의적 선전의 효과는 이렇듯 큰 편견을 가져다준다. 하지만, 직접 가보라. 그 편견은 아주 쉽게 깨진다.

이제부턴 나 역시 가지고 있던 이란에 관한 선입견과 편견을 불식시킨 사람들과 풍광에 관한 소소한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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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파한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건축물은 도시 곳곳에 산재한 다리다. 해가 지면 오렌지빛 등 아래 더위를 식히며 홍차를 마시는 사람들과 만날 수 있다. ⓒ 홍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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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파한의 이맘광장. 세밀하게 만들어진 모스크의 황금빛 지붕이 햇살 아래 빛난다. 맞은편엔 알리 카푸 궁전이 있다. ⓒ 홍성식


종교에 의지한 삶, 그러나 왜 일탈 욕구가 없을까

테헤란에서 이틀을 머물고 찾은 곳은 '이란 최고의 관광지'로 불리는 이스파한이었다. 수백 년 전 만들어진 여러 개의 멋진 교량과 프랑스 시인에 의해 "세상의 절반"으로 명명된 이맘광장으로 유명한 곳.

해질 무렵, 이맘광장 안에 있는 이슬람 예배당(이맘 모스크) 앞에서 덩치가 코끼리만 한 사내를 만났다. 커다란 몸피와는 전혀 딴판으로 부끄러움을 타는 그의 이름 또한 이란에선 흔하디흔한 모하메드. 외국계 기업에서 일한다는 그와 단박에 친구가 됐다.

이란식 물담배인 '갤리언'과 설탕 듬뿍 넣은 홍차를 파는 가게로 나를 안내한 그는 한국에서의 내 생활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경험해본 외국이라곤 회사일 때문에 이틀 출장 다녀온 독일이 전부인 모하메드는 이란 외부의 상황을 몹시 궁금해 했다.

내 여행 경험을 들려줌으로써 작은 부분이지만 궁금증을 해소해준 게 고마웠던지 "내일은 내 친구들과 함께 만나자"고 청한다.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다음 날 악수를 나눈 그의 친구들 역시 순진하고 외국인에게 우호적이기는 마찬가지.

한국에서라면 당연지사 다 함께 술잔을 들어야 했으나, 이란 어디에도 술집이 없는 터라 아쉽게도 찻집에서 밤늦게까지 '수다'만 떨어야 했다. 영어와 몸짓을 섞어 더듬더듬 이야기를 주고받던 어느 한순간 모하메드가 조심스런 고백을 했다. "독일에 가서 맥주를 딱 한 모금 마셔봤는데,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것도 있구나"라며 놀랐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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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맘광장에서 만난 이란 청년 모하메드와 그의 친구. 처음 보는 나를 이란식 찻집으로 데려가 홍차와 물담배를 대접하는 친절을 보였다. ⓒ 홍성식


서른에 가깝도록 술을 한 번도 마셔본 적이 없는 사람에겐 맥주 한 모금의 취기도 그렇게 느껴질 수 있었을 것이다. 덧붙여 그가 말했다. "이 사실을 아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고. 갑자기 웃음이 터질 것 같아 참느라 혼났다.

맞다. 종교적 신념을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기며 사는 이들이라고 왜 일탈 욕구가 없겠나. 결국 인간은 자신이 체험하지 못한 것들을 끝없이 욕망하는 존재에 불과한 것인데. 우리들에겐 일상인 음주가 모하메드에겐 자신의 종교를 정면에서 부정하는 일탈이었고, 아내에게조차 말할 수 없는 비밀이 될 수도 있는 게 세상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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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의 사막도시 야즈드에서 본 그림. 카펫에 그려진 불로 미루어 보면 아마도 조로아스터교와 관련된 것 같다. ⓒ 홍성식


알리의 조심스런 고백과 질문에 답하다

이런 내밀한 고백을 들어줘야 했던 때가 한 번 더 있었다. 이란 중부 사막도시 야즈드를 여행할 때 머물던 숙소에서였다.

거기서 매니저로 일하는 잘생긴 스물여섯 살 청년(그의 이름도 알리였다)은 아무도 없는 곳으로 은밀히 나를 불러 "여행 중인 네덜란드 여자와 데이트를 하기로 했는데, 나는 어떻게 하면 여자를 기쁘게 해주는지 모른다. 당신의 조언을 듣고 싶다"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아, 이런 질문엔 뭐라고 답을 해줘야하나. 너무나 진지한 그의 태도에 농담을 할 순 없어 "아마도 그 여자애는 데이트 경험이 너보다 훨씬 많을 거다. 그러니, 그녀가 리드하는 대로 따르면 되지 않겠나"라는 내 대답에 얼굴이 환해지는 알리.

너무나 닳고 닳은 세상을 살아온 터라, 여자를 즐겁게 해주는 방법을 처음 본 사람에게 묻는 그의 대책 없는 순박함이 감동적이기까지 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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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 앞에 서기가 부끄러웠는지 차도르를 입은 엄마에게 달려가 안긴 이란의 꼬마숙녀. 이 아이가 살아갈 앞날이 보다 자유롭고 행복하기를. ⓒ 홍성식


남자들보다 더욱 혹독한 이슬람율법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이란 여성들도 다르지 않았다. 그녀들 또한 사소하고 소박한 일탈을 꿈꾸고 있었다. 히잡과 차도르에 갇혀 사는 이란 여성들이 꿈꾸는 일탈이 어떤 것인가 궁금하신지? 코미디 프로그램에선 "궁금하면 500원"이라는데, 돈은 받지 않고 다음 편에서 들려드리겠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계간문예지 <문학의오늘>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2011년에 다녀온 여행기입니다.
#이란 #이스파한 #차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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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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