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제도가 없어졌다고? 이걸 봐도 그럴까

[서평] 5천년 노예제도를 말하다 <끝나지 않은 노예의 역사>

등록 2012.12.27 16:39수정 2012.12.27 17:24
0
원고료로 응원
a

<끝나지 않은 노예의 역사> 겉표지 ⓒ 스마트 주니어

프랜시스는 엄마가 동네 형과 시장에 나가 삶은 달걀과 땅콩을 팔라고 하는 말을 듣는 순간 약간의 설렘과 함께 자부심까지 느꼈다.

이제 겨우 여덟살에 불과하지만 자신이 어른들 없이 시장에 갈 수 있을 만큼 많이 컸다는 것, 가난한 엄마와 가족을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프랜시스는 엄마가 동네 형에게 맡긴 들통 두 개를 빼앗아 들고 시장으로 갔다.
시장은 수많은 사람들과 온갖 물건들, 맛있는 냄새, 흥정하는 소리와 주고받는 농담들로 활기를 띠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평화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아 깨지고 말았다. 어느 순간 인근 마을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그와 동시에 말을 탄 남자들이 나타나 총을 쏘고 칼을 휘둘러 시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 느닷없는 사태에 어른들은 물건을 급히 챙겨 도망가기 바빴다. 남은 것은 어린 아이들 뿐. 아이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주춤거리고 있었다. 프랜시스도 그 중 하나. 남자들은 프랜시스와 아이들을 붙잡아 당나귀에 매달린 바구니 등에 넣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이후 프랜시스와 아이들은 먼저 붙잡혀 와 있던 다른 아이들과 낯선 곳으로 팔려 나갔다.

수단의 한 가난하고 평범한 가정의 천진난만한 소년인 8세 프랜시스는 이렇게 누군가의 노예가 된다. 그리하여 무려 10년 동안이나 가축 우리에서 가축들과 잠을 자며 착취당한다. 가축이나 물건처럼 취급당하며. 두 번이나 탈출을 했다가 붙잡혀 죽도록 맞았음에도 자유인의 희망을 놓지 않고 17세(1997년)에 다시 탈출을 시도해 우여곡절 끝에 성공할 때까지.

돈만 있다면 노예를 사들이는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리스 노예는 고기, 채소, 치즈 같은 음식들과 함께 시장이나 아고라에 전시되었다(…)상인들은 판매할 포로(기자 주: 로마군대가 노예상인에게 판 전쟁포로)들을 사슬로 함께 이어 묶은 채로 열린 시장에 내어 팔았다. 구매자들은 가축을 살 때처럼…. - '고대 그리스와 로마' 편에서

수입하는 노예는 주로 그리스, 러시아, 터키, 슬라브, 크레타, 아랍, 에티오피아의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마치 옷 뭉치나 올리브기름통 같은 화물과 함께 짐작처럼 배에 실렸다. 1396년에 루마니아를 출발한 어떤 배는 '순례자 의복 17뭉치, 납 191조각, 노예 80명'이라는 물표를 가지고 있었다.

티푸 팁은 잔지바르 섬에서 온 아프리카-아랍계 상인이었는데 악명 높은 노예상인이기도 했다. 한 크리스트교 선교사가 티푸 팁의 마차 대열을 발견했을 때 그들은 노예들을 끌고 가고 있었는데, 그 노예들은 이미 상콩고에서부터 1600km를 걸어온 상태였고 해안가에 닿기 위해 다시 400km를 더 걸어야 할 참이었다. 목에 쇠사슬을 채워 한 줄로 묶인 노예들은 노예상인의 채찍질로 상처투성이였고 몸은 온통 더러워져 있었다. 그들 중에는 아기를 업은 여자들도 많았다. - <끝나지 않은 노예의 역사>에서 


<끝나지 않은 노예의 역사>(스마트 주니어 펴냄)는 프랜시스처럼 어느 날 갑자기 인신 약탈범(인신매매범)들에게 납치되거나 혹은 돈벌이에 속아, 혹은 전쟁터에서 포로로 잡히거나, 혹은 빚이나 생계 때문에 부모나 가족에게 팔려, 혹은 어떤 권력이나 정책 등에 의해 노예로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책은 평범한 한 가정의 아들인 프랜시스가 어떻게 노예가 되었는지를 시작으로 고대부터 중세 그리고 현대까지, 세계 각지의 (노예로 팔기 위한) 인신약탈 방법과 노예들의 처참한 실상, 노예제 관련 제도와 법, 노예제 폐지와 관련된 일련의 사회 운동들과 노예제 폐지에 앞장섰던 인물들 등, 인류 역사와 함께 해온 노예 5천년의 역사를 르포 형태로 들려준다.

프랜시스는 14세가 되던 해 두 번이나 탈출을 시도한다. 그러나 그때마다 붙잡혀 한번 내리칠 때마다 살갗을 파고들 정도인 채찍으로 죽도록 맞거나 묶였다. 두 번째 잡혔을 땐 어찌나 세게 묶었던지 피가 철철 흘러 발밑에 피가 흥건히 고일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프랜시스의 이런 고통은 다른 노예들이 당한 것에 비하면 미약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a

클라크슨이라는 노예제도 폐지 운동가가 모은 노예들을 유린했던 도구들 일부다. 수갑과 족쇄, 엄지손가락을 죄는 도구, 자살을 시도하는 노예의 입을 비틀어 여는 장치, 커다란 쇠구슬 등이다. ⓒ 출판사 제공


a

잔인한 처벌을 받는 노예 소년(왼쪽)과 처벌로 손을 잘린 노예들(오른쪽) ⓒ 출판사 제공


왼쪽의 사진(1890년경. 잔지바르) 속 어린 노예가 머리에 이고 있는 것은 15kg짜리 목재다. 노예주가 목재를 쇠사슬로 소년에게 묶어 놓는 벌을 줬기 때문에 소년은 이동할 때마다 이처럼 목재를 머리에 이는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오른쪽은 고무농장의 노예들이다. 19세기, 콩고 노동자들은 고무 수확에서 벨기에 고무회사가 정해준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잔인하게 처벌받았다. 몰라(왼쪽)의 손은 너무 꽉 묶였기 때문에 괴저(혈액이 공급되지 않거나 세균으로 비교적 큰 덩어리의 조직이 죽는 현상)에 걸려 두 손을 잃어버렸다. 그 옆의 소년 요카는 벌로 한쪽 손을 잘려버리고 말았다.

중세 이전에는 부나 명예를 과시하고자 많은 수의 노예를 거느리는 귀족들도 더러 있었으나 대부분의 노예주들은 부를 쌓는 용도나 자신의 편안한 생활을 위해 노예를 샀다. 그와 함께 노예는 사람과 다른, 감정조차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사람을 위해 무거운 물건을 실어 나르는 가축이나 쓰다가 고장 나면 버리는 물건처럼 생각했다.

인식이 이렇다보니 1년만 써먹어도 본전을 뽑는다는 생각으로 밤낮없이 혹사하기 일쑤였다. 그리하여 어떤 노예들은 하루 20시간의 노동에 시달리는 등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노동으로 착취당했다. 때문에 몰라와 요카처럼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팔이 잘리거나 눈이 파이는 등 신체 일부가 훼손당하거나 죽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책에는 <톰 아저씨네 오두막>(해리엇 비처 스토 씀)과 같은 문학작품이나 미국의 남북 전쟁, 알류트인들의 미국 정부를 상대로 한 임금체불 소송(1951년), 초콜릿 회사와 의원들이 발표한 카카오 의정서(2001년) 등을 통해 조금씩 알려진 노예들의 실상과 그에 얽힌 다양한 측면의 이야기들이 망라되어 있다.

"2000년 6월 7일 나는 팔룬공에 대한 나의 견해를 표명하기 위해 베이징의 탄원국에 편지를 제출했다는 이유로 체포됐습니다.(…)그곳(기자 주:광둥성의 감옥)에서 나는 장난감이나 쇼핑백 같은 수출품을 제작하는 일을 보수도 없이 강제로 해야 했고요.(…)우리는 감방에서 일도 하고 잠도 잤습니다. 때로 일정을 맞추고자 새벽 2시까지 일하기도 했지요.(…)배고픔속에서 하루 15시간 이상을 일했던 거죠. 일을 잘 하지 못하거나 일정을 맞추지 못하면 경찰은 전선채찍으로 때렸습니다." - 중국인 '삼루'의 증언에서

오늘날 중국 전역에 천개가 넘는 라오가이(기자 주: 노동개조란 뜻으로 강제노동수용소)가 있다. 중국 정부는 팔룬공 수행자뿐 아니라 크리스트교도와 반체제인사 같이 권력을 유지하는데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가두고 있다. 노동수용소에서는 크리스마스 전구, 봉제 동물인형, 뜨개 스웨터, 장갑 같은 상품을 제조하여 낮은 가격에 전 세계로 수출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 '특가품'에 매료되고 있다. - <끝나지 않은 노예의 역사>

워낙 무거운 주제지만 청소년을 주 독자로 하는 책인지라 이처럼 문장도 쉽고, 최근에 일어났던 관련 사건들도 연관 지어 이야기하고 있는데다가 훨씬 이해하기 쉬울 것 같다. 게다가 좀 더 알아야 할 것이나 연관된 것들은 박스 형태로 관련 페이지에 넣었기 때문에 보다 폭넓은 책읽기를 할 수 있을 것도 같다.

a

노예제도는 사라졌지만 노예는 여전히 존재한다. ⓒ 출판사 제공


또, 관련 사진들도 많이 넣었기 때문에 주제의 무게에도 아랑곳없이 책의 울림은 훨씬 큰 것 같다. 위 사진은 책을 덮고도 아른거렸던 몇 장의 사진 중 하나.

많아봤자 예닐곱 살 정도일 사진 속 마크 과두는 5세 때 그의 부모가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한 어부에게 팔아버렸다. 이처럼 부모에 의해 노예가 된 아이들 중 마크 과두처럼 어리면 통나무배에서 배가 가라앉지 말도록 물을 퍼내는 일을 하지만 좀 더 나이가 많은 아이들은 물 속으로 들어가 어망을 정리하는 일을 하거나 좀 더 위험한 일을 하다가 익사하는 경우가 흔하다고 한다.

외에도 카카오 농장이나 토마토 농장에서 착취당하거나 군사노예로 살아가는 아이들은 우리에게 많이 알려졌다. 책을 통해 알게 된 중국 라오가이의 실상도 쉽게 머릿속을 떠나지 않을 것 같다. 아마도 라오가이에 강제수용된 사람들이 만든 물건일지도 모를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싼 중국산 물건'들이 우리 주변에 넘쳐나고 있기 때문이다.

함께 읽으면 좋을 책
<보이지 않는 사람들>(E. 벤저민 스키너 지음)(2009. 난장이 펴냄)은 노예제도기 사라졌음에도 엄연히 존재하는 현대판 노예에 관한 책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 어떤 경로를 거쳐 노예가 되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추적했는데, 달러를 벌고자 미국으로 향하는 우리나라의 젊은 여성들의 이야기 등 우리나라와 관련된 부분도 제법 실려 있다.

인권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이 종종 언급하는 책이기도 하다. (김현자)
현대에 노예제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엄연하게 사라졌다. 하지만 사진 속 마크 과두처럼 어린 나이에 돈 때문에 팔리거나 빌려져(심지어는 1년에 고작 20달러를 받고) 하루 15시간씩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아이들이나 인신매매범에 납치되거나 돈벌이에 속아 노예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한다고 한다. 다만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 우리가 보지 못할 뿐이다.

마크 과두는 미주리의 한 여성이 신문에 실린 사진을 보고 구해냈다고 한다. 누군가에게, 혹은 사회의 부당한 어떤 사실에 관심을 두고 보자 관심을 두지 않았을 때는 결코 보이지 않던 마크 과두의 비참한 현실이 비로소 보였던 것이다.

엄연히 사라졌음에도 우리 속에 여전히 존재하는 노예 혹은 노예제도가 사라지게 하는데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끝나지 않은 노예의 역사>, 이 책의 취지다.
덧붙이는 글 <끝나지 않은 노예의 역사>ㅣ마조리 간·재닛 윌렌 씀| 전광철 옮김| 스마트주니어 펴냄|2012-12-10 |정가 15,800원

끝나지 않은 노예의 역사 - 5천 년 노예제도를 말하다

마조리 간.재닛 윌렌 지음, 전광철 옮김,
스마트주니어, 2012


#노예 #인신매매 #인신약탈 #노예선 #라오가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검찰 급했나...'휴대폰 통째 저장', 엉터리 보도자료 배포
  2. 2 재판부 질문에 당황한 군인...해병대 수사외압 사건의 퍼즐
  3. 3 "명품백 가짜" "파 뿌리 875원" 이수정님 왜 이러세요
  4. 4 '휴대폰 통째 저장' 논란... 2시간도 못간 검찰 해명
  5. 5 김종인 "윤 대통령 경제에 문외한...민생 파탄나면 정권은 붕괴"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