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나그네의 풍찬노숙, 그 20년의 방랑을 내려놓다

[국제나그네의 독일아리랑(마지막회)] 그물에 걸리지 않은 바람의 자유인

등록 2012.12.27 11:20수정 2012.12.27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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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구름 따라 삶이란 한조각 구름이 일어남이요 죽음이란 한조각 구름이 스러짐이다. ⓒ 조영삼


             


주유 20년, 그 방랑의 편린

'삶이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남이요. 죽음이란 한 조각 구름이 스러짐이다. 구름은 본시 실체가 없는 것, 죽고 살고 오고 감이 모두 그와 같도다.'

격동의 2012년이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지는 마지막 날, 들풀 하나도 파란으로 뒤엉켰던 20년의 국제나그네 생활을 완전히 청산하고 그리웠던 나의 황토에 뜨거운 입맞춤을 할 것입니다. 오는 12월 30일 독일 현지 시각으로 오후 7시 경에 프랑크푸르트 공항 활주로를 톺아 올라, 우리 시간으로 12월 31일 오후 한 시 반 경에 인천공항 활주로에 안착할 것입니다.

지난 20년이 잔재 영상으로 기억의 망막에 맺혀 지나갑니다. 때론 선명하게, 한 편으론 흩어지는 한 조각구름으로 꿈결처럼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흐물거립니다. 연결고리가 잘 이어지지 않은 기억의 편린도 있는 것 같습니다. 뇌수술의 후유증인 듯싶지만, 이것도 누구나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삶과 죽음 사이의 한 조각이라 여기며 덤덤히 받아들입니다.

우리와 계절이 정반대인 '거꾸로 나라' 아르헨티나에서 한여름밤의 성탄절에 비 오듯 땀을 쏟아내며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주는 산타할아버지와 말춤 아닌 '제멋대로' 탱고를 추었던 일, 이인모 선생을 만나러 가는 길에 험산준령의 안데스산맥을 넘으면서  인디언들과 부대끼며 생사를 넘나들었던 일... 함께 '마떼'를 마시며 팔씨름도 하고 때론 천길 벼랑에 매달려 염라대왕과 담판도 지어보고...  평양에서 여운형 선생의 따님인 여연구씨와  짝이  되어 아리랑 춤을 흐드러지게 추었던 일, 망명수용소 시절 아프리카 난민들과 유럽 난민들의 양 대륙의 명예(?)를 건 축구시합에서 심판을 보았던 일, 당시 그들은 나그네를 '여명의 블루스 리'라고 불렀습니다.


무엇보다 생사를 넘나들었던 '사망유희'의 뇌수술을 받았음에도 다행히 기억의 고삐가 조금도 늘어지지 않고 생생히 남아 있는 퍼즐조각의 한 귀퉁이는 지금은 하와이대학교 법대교수로 있는 백태웅씨와의 편지왕래입니다. 당시 백태웅 교수는 고국의 원주교도소에서 장기 징역을 살면서 강원도의 힘을 만끽(?)하고 있었고, 나그네는 독일의 망명수용소에서 조국의 쪽빛하늘을 그리워하는 그리움의 애절양이었습니다. 우리는 먼 대륙과 대양을 건너 조국의 교도소와 이국의 수용소에 수용된 수감자로서 동병상련의 아픔을 주고받았습니다.

우리의 인연은 고국 땅에서의 감방 동기로 인연을 맺었더랬지요. 만감이 교차하는 그때의  감회를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한국 교도소 당국의 '검열필' 낙인이 선명히 찍혀 있는 파란 색깔의 교도소 전용 얇디얇은 종이엽서를 이국의 망명수용소에서 받아본다는 경이로움을 어찌 몇 마디 어쭙잖은 말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백태웅 교수도 당시 나그네와 비슷한 경이로움의 포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한국의 감옥에서 머나먼 이국땅 망명수용소에서 온 편지를 읽는다는,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현실이 잘 믿기지가 않았겠지요. 백태웅 교수는 짬짬이 텃밭을 가꾸는 교도소의 정경을 담아 나그네의 안부를 염려했고 나그네 역시 망명수용소의 이국적 정취를 실어 백태웅 교수의 장기 징역을 염려하는 글들을 보냈습니다. 우리는 전서구, 즉 국제 비둘기를 띄운 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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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가리의 기도 게르만 나라와 마지막 이별여행 중에 어느 시골성당에 들러 나그네의 완쾌를 비는 붕어빵 아들 똥가리 ⓒ 조영삼


파란으로 얼룩진 3년여의 망명수용소 생활을 거쳐 동가식 서가숙하면서 풍찬노숙하다가 가까스로 전자회사에 취직을 했고, 당시 동료중 한 사람인 아프리카 콩고 출신 안드레이의 권유로 아프리카로 진출(?)할 뻔한 일도 있었습니다. 안드레이는 아프리카 거리의 아이들을 위한 후원 일을 독일 인도주의 단체와 연합하여 수십 년 동안 해 오고 있으며 토속 아프리카 북춤의 대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두고 온 고향이 그리울 때면 북을 두드리면서 춤사위와 함께 노래를 부르곤 했었습니다.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 오곡백화가 만발하게 피었고  종달새 높이 떠 지저귀는 곳. 이 늙은 흑인의 고향이로다..."

안드레이는 이곳 독일에서 해마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아프리카 페스티벌에 아프리카 대표주자 중의 한 사람으로 열성적으로 참가하고 있습니다. 아마 나그네도 현재 고국에서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붕어빵 아들 똥가리가 없었다면 지금쯤 아프리카 어느 오지에서  거리의 아이들과 뒹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지나간 일들에 대해서 만약이란 단어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의미는 우연이란 말 만큼이나 공허로울 것입니다. 나그네는 이미 행해져 버린 일이나 결과로서 보이는 현상들이 어느 하나도 '우연히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결과물들은 반드시 그에 합당하는 원인과 동기가 있게 마련입니다. 길을 가다가 '우연히 만난 사람' 조차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어딘가에 우연한 만남이 아닌 필연적인 원인이 숨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나그네도 아주 가끔 '만약과 우연'을 화두로 소설을 써 보곤 합니다.

만약에 내가 십대 중반에 집을 떠나 군대 갈 때까지 '김삿갓' 흉내를 내지 않았다면, 군 제대 후 대학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만약에 내가 길신 좆아 전국을 주유하다가 우연히 이인모 선생을 만나지 않았다면, 만약에 내가 아르헨티나에서 그냥 머물러 형님과 사업을 계속하고 있었다면, 만약에 내가 안데스의 인디오들과 계속 생활을 했었다면...

만약에 내가 평양에서 '늑대와 함께 춤을'이 아닌 '여연구씨와 함께 춤을' 추지 않았다면, 만약에 내가 안드레이의 권유를 받아 아프리카에 갔다면, 만약에 내가 중국이나 베트남에 이주할 제의를 사양하지 않았다면, 만약에 내가 본격적으로 그린피스 운동에 몰두했다면, 만약에 내가 엄지엄마와 똥가리를 만나지 않았다면, 만약에 내가 사고 전에 고국에 돌아갔다면, 만약에 내가 지금도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뇌를 다친 대형사고를 당하지 않았다면...

이중 하나라도 '만약이란 놈'이 친절히 안내해준 길을 갔었다면  아마도 지금의 나는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만약을 변명삼은 소설에 불과한 넋두리일 뿐이지만 말입니다. 이젠 다가오는 연말 정산과 더불어 곡절 많고 파란으로 점철된 나그네의 길도 서서히 정산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내나라 내땅, 무엇이 나그네를 기다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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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나그네 사고 후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한 힐링의 여정에서 ⓒ 조영삼


지난 11월 30일 엄지엄마와 붕어빵 아들 똥가리가 독일에 왔습니다. 지금은 상당히 회복되었고 또 백퍼센트 회복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지만 사고로 인해 말과 행동이 예전 같지가 않은 나그네를 견인(?)해 가려고 온 것입니다. 물론 학기 중이었던지라 '해외현장체험'의 실습생 자격인 셈이지요.

독일에 오기 전 엄지엄마와 잔잔하고 감동스러운 논쟁을 벌였던 나의 분신 똥가리,

"학교 공부 쪼매 못하는 게 그리 중요하나. 우리 아빠가 훨씬 중요하다 아이가"

당연히 나그네는 커다란 감동을 먹었고요. 물론 녀석의 속셈은 학교를 '땡땡이 깐다'는데 더 큰 방점이 있겠지만 말입니다. 지금 엄지엄마는 부지런히 이사짐을 챙기고 싸고 있습니다.

지난 독일 생활 동안 손때 묻은 모든 것을 가져 가겠다는 듯 맹렬한 손놀림과 다부짐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법정스님의 '버리고 떠나기'가 아니더라도 예전같으면 나그네도 '다 버리고 빈 몸뚱이만 고국으로 돌아가자'고 했겠지만, 지금은 엄지엄마의 의중에 모든 것을 맡기고 방관모드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숟가락 하나는 물론이고 똥가리가 유치원 시절 끄적거렸던 그림낙서까지도 버리기 아까워 몇 번을 망설이다 엄지엄마는 기어이 챙겨 넣고 맙니다. 때때로 애잔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아! 여자는, 아니 엄마들은 아빠들과 많이 다른 정서를 가지고 있구나'하는 깨달음을 가지게 됩니다.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님'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엊그제는 어쩌면 영영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를 게르만나라와의 이별여행을 했습니다. 탐구심과 호기심이 많은 똥가리를 위한 특별여행이었습니다. 똥가리는 신비한 우주와 과학세계, 그리고 자동차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기차와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고 골동품 자동차와 비행기들이 전시되어 있는 박람회 구경을 갔습니다. 똥가리의 탄성은 하늘을 찌를 듯했습니다.

그 넓은 전시장을 다 둘러보고 나서도 무슨 아쉬움이 그리 많은지 입맛을 쩍쩍 다셨습니다. 그런 똥가리의 호기심이 장래 희망으로 이어질 지는 아직 미지수지만 나그네와 엄지엄마는 오래전에 의견일치를 보았습니다. 녀석이 좋아하고 재미있어하는 일이 험한 세상 헤쳐나갈 다리가 될 수 있도록 키우는 것이지요. 오로지 성적순에만 매몰되는 그런 아이로는 키우지 말자고 말이지요.

지천명을 오래전에 넘어서고 이순으로 향하는 꺾어진 절반으로 달음박질 하는 나이에 이제 겨우 초등학교 2학년에 다니는 아이를 둔 나그네에게 최 우선 순위의 희망이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당연히 어린 아들을 잘 키우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아이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걱정도 많이 됩니다.

힘의 원천인 머리털이 깎인 삼손은 시간이 흐른 후 다시 원래의 강인함을 되찾았지만, 나그네는 똥가리가 기억하고 있는 예전의 강한 아빠로 되돌아 가기에는 나이를 너무 먹어 버렸고 사고로 인한 트라우마가 복병으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무책임한 아빠가 되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한 노력은 해 보아야 겠지요.

그물에 걸리지 않은 바람의 자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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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만나라와 이별여행 중에 독일 테크닉 박물관에서 방랑삿갓 대신 철모를 쓴 똥가리. 종군기자라도 되려나? ⓒ 조영삼


며칠 남지 않은 이국의 마지막 날들이 흘러갑니다. 마인 강의 잔물결 따라 거리의 캐롤송도 서서히 잦아들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 연휴가 끝나고 동네 조무래기들의 새해맞이 폭죽놀이가 까만 밤하늘을 간간이 수놓기 시작하면 나그네는 일어나서 주섬주섬 단봇짐을 가방에 챙겨 넣을 것입니다. 그리고 똥가리와 엄지엄마와 손잡고 애증이 교차하는 게르만나라와 이별의 마지막 키스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유인, 그물에 걸리지 않은 바람의 자유인이 되어 돌아갈 것입니다.

20년만의 귀향! 두고 온 들풀들, 이름없는 풀꽃들, 개여울 졸졸 흐르는 냇가의 못생긴 돌멩이들, 예전의 그것들이 아니겠지만, 여전히 그 씨앗의 자식들로 제자리에 남아 있어서 지친 나그네를 힘껏 포옹해 주리라 믿어 의심치않습니다. 나그네가 20년 전 '내나라 내 땅'을 떠나올 때 태평양 상공에서 끄적거렸던 낙서장의 기억을 힘겹게 더듬어 반추해 봅니다.

'처연하게 피어나는 민꽃들아. 이름없는 들풀아. 냇가의 돌멩이들아. 내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어이 하시라도 너희들을 잊을쏘냐. 잘있거라. 한강물아. 다시 보자 한라산아...'

훗날의 기약이 어언 20년이 흘렀습니다. 이렇게 길어질 줄은 하마 당시에는 짐작도 못 했습니다. 길어도 5년 정도를 예상하고 떠나온 여정이었기 때문이지요. 아르헨티나의 형님에게도 분명히 못을 박았었지요. 5년 후에는  반드시 내나라 내 땅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그랬던 것인데 길신의 유혹에 빠진 나그네는 강산이 두 번 바뀌는 세월 동안 세상 언저리를 주유하며 떠돌았습니다.

이젠 정말로 내려 놓아야겠습니다. 20년 만의 귀향은, 그리고 모든 게 많이 변해버렸을 내나라 내 땅의 풍속도는 나그네에겐 또 다른 낯설음으로 다가올지도 모릅니다. 아니 분명히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이 또한 죽고 살고 오고 가는 구름의 한 조각이기에 운명으로 덤덤히 받아들여야겠지요.

12월 31일 오후 1시 반!  내나라 내 땅에 발을 딛는 순간 긴긴 여정의 '국제나그네 길'에 비로소 마침표를 찍을 것입니다. 그 순간부터 나그네는 더 이상 나그네가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 어떤 일들이 전개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긴 세월 동안 나그네를 바람결 따라 타들어 가는 촛불이 되어 애타게 기다리셨던 '엄니, 아부지'를 뵙고 큰 절을 올리고 죽비의 회초리를 맞겠지요. 그리고 여건이 허락된다면 엄지엄마와 똥가리가 터를 잡고 살고 있는 시골에 허름한 농가 하나 구해서 마인 강변의 들풀이 아닌 내나라 내 땅의 '들풀하나' 되어 남은 생애를 살아갈 것입니다.

한 자연인의 한평생을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나눌 수 있다면 나그네의 삶의 궤적은 생물학적 시간으로만 따진다면 가을의 한복판 쯤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언젠가는 나그네의 가을나무에도 서서히 단풍이 들겠지요. 그리고 벌레먹은 잎, 모진 풍파에 찌든 잎들은 앞당겨 시들어 떨어지겠지요. 여름의 뜨거운 태양에 단련되고 풍찬노숙의 세파에 살아남은 잎은 늦가을 어느날 처연하게 황홀한 단풍의 파노라마를 연출할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자연의 순리를 따라 낙엽되어 떨어지겠지요. 행운이 있어  선택된 가을 단풍 하나되어 어느 꿈동이의 책갈피에 '메뚜기 한 철'이라도 소중히 보관된다면 가문의 영광으로 여길 것입니다. 지친 그대들이여! 힐링올레 합시다.
#나그네의 여정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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