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지 않는 남자 홍명보, 그가 좋아집니다

[서평] 10만인클럽 출간 <홍명보>

등록 2012.12.30 13:19수정 2012.12.30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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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6월 22일 한일월드컵 8강전, 대한민국과 스페인은 90분 전후반과 30분 연장전 혈전을 펼쳤지만 0-0 무승부를 기록했습니다. 결국 승부차기로 이어졌습니다. 대한민국 킥커로 나선 '황선홍-박지성-설기현-안정환 선수'는 다 성공했습니다.

상대팀인 스페인은 이에로-바라하-샤비 선수가 성공했지만 호아킨 선수가 실축을 하는 바람에 대한민국 마지막 선수가 성공하면 4강에 진출할 수 있습니다. 한 선수가 뚜벅뚜벅 걸어나왔고, 공을 살포시 내려놓았습니다. 광주월드컵 경기장과 대한민국 하늘 아래는 '환호'와 '흥분' 그 자체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냉정했고, 발을 떠난 공은 1초도 되지 않아 골그물은 출렁했습니다. 대한민국이 월드컵 4강에 오르는 순간이었습니다.


승부차기를 성공한 순간 그는 두 손을 번쩍 들고 세상에서 가장 환한, 그 어떤 배우도 흉내낼 수 없는 함박웃음을 지어면서 내달렸습니다. 광주월드컵 경기장만 아니라 대한민국은 떠날듯한 환호가 휘감에 돌았습니다. 월드컵 축구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이었습니다. 그 선수는 '홍명보'였습니다.

홍명보 함박웃음, 기쁠 때 웃어야 함을 보여줘...

옛 어른들은 남자는 평생 세 번 운다고 했습니다. 태어났을 때,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그리고 나라가 망했을 때만 울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경상도 남자는 웃지도 말아야 했습니다. 남자는 울지도, 웃지도 말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았던 저로서는 홍명보 선수 웃음을 보면서 그래 사람은 기뻐할 때 웃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습니다. 물론 요즘 이런 가르침을 주는 어른들은 없습니다.

'홍명보'라는 이름을 빼면 1990년대 이후 대한민국 축구를 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홍명보를 좋아하고, 훌륭한 선수였다고 평하는 이들은 많지만 그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분석한 이들은 드뭅니다. 저 역시 2002년 후 10년만이 지난 8월 일본을 누르고 올림픽 동메달을 땄다는 것만 기억할 뿐, 그의 진가를 제대로 아는 것은 없습니다. 홍명보에 대한 갈증을 해갈해 줄 작은 책(87쪽)이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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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세대의 맏형: 홍명보를 읽다 ⓒ 10만인클럽

이 책은 기존에 출간된 '홍명보' 자서전 류와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홍명보 감독을 취재해온 언론인들이 일정한 거리를 유치하며 읽어낸 인물 탐구의 글과 '홍명보'라는 인물에게 투영된 한국 사회의 '쌩얼'을 조명한 평론가의 글을 담은 전방위적 인물비평서라 할 만한다. 특히 손기정 선수에서 시작된 한국 근현대 스포츠사 속에서 홍명보의 위치를 가늠해 보고자 하는 스포츠 사회학의 관점을 담고 있다-<새로운 세대의 맏형: 홍명보> 정윤수.이태웅,손병하 공저 | 10만인클럽


그냥 그런 자서전이 아니라고 합니다. <오마이뉴스> 10만인 클럽이 내놓은 세 번째 책인 <새로운 세대의 맏형: 홍명보>은 홍명보를 무조건 칭송하는 책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쌩얼) 홍명보를 '축구'만 아니라 스포츠 사회과학 측면에서 홍명보를 다뤘다는 점에서 주목받기 충분합니다.

히딩크는 홍명보를 믿었다

2002년 홍명보는 우리나라 나이로 34살(1969년생)이었습니다. 2001년에는 부상도 당했습니다. 히딩크 당시 감독도 그런 그런 바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언론들은 홍명보를 '한 물간' 선수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히딩크는 홍명보를 불렀다. 그는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홍명보에게 전술적 지시를 내리지도 않았다. 홍명보는 그라운드의 독전관이었다. '감독이 두 명 있다'는 힐난도 있었다. 그럼에도 히딩크는 홍명보를 믿었다"고 저자 정윤수는 말합니다.

히딩크가 누구입니까? 대한민국을 월드컵 4강에 올렸다는 것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도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감독입니다. 그가 홍명보를 믿었습니다. 히딩크 감독은 한국축구의 학연과 지연이라는 고질적 문제를 단박에 무너뜨리고, '이름값'만 있는 선수를 철저히 배제했고, 군대같은 선후배간 규율을 깨뜨림으로서 한국을 4강에 올렸습니다. 그가 홍명보를 믿었습니다.

"어려울 때 히딩크는 홍명보에게 의지했는데, 바로 그 운명의 폴란드 전에서도 히딩크는 홍명보에게 '경기 시작 2분 안에 상대 공격수 움직임을 보고 바로 수비형태를 지시하라'고 말했다. 사실상 수비라인 전권을 홍명보에게 준 셈이다."(본문 중에서)

'신뢰받은' 선수 홍명보, 지도자가 되자 선수들을 '믿었다'

폴란드 전에서 대한민국은 월드컵 역사상 첫승을 거둡니다. 첫승은 4강 진출보다 더 감동이었습니다. 히딩크 감독에게 신뢰를 받은 홍명보 선수는 자신이 지도자가 되었을 때 선수들을 믿었습니다.

박주영 선수가 군면제로 올림픽 대표팀 발탁 논란이 일 때 홍명보 감독은 박주영에게 "너는 대표팀에 꼭 필요한 선수"라고 말했고, 박주영 선수와 회견장에 같이 나와 "박주영이 (군대를) 안 간다면 내가 대신 군대가겠다"는 말로 거센 비난 여론을 단박에 잠재웠습니다.

박주영 선수는 런던올림픽 일본과 동메달 결정전에서 첫골을 터뜨렸음을 다 알고 있습니다. 선수를 믿은 결과입니다. 같은 한일전에서 박종우 선수가 그 유명한 '독도는 우리땅' 세리머니 때문에 동메달 박탈 논란과 대한체육회가 환영만찬에 참석을 불허하자 홍 감독은 박종우 선수에게 전화를 해 "만찬에 참여"하라고 했습니다. 이런 홍 감독을 좋아하지 않을 선수와 팬들이 없을 것입니다.

홍명보의 이러한 모습은 '불확실한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청년들에게 강력한 이미지로 다가간다. 요즘 청년들에게는 스승도 부재하고 선배도 부재하다. 모두가 힘들고 모두가 어렵기 때문에 그저 자연사적인 나이가 많을 뿐, 진정한 스승 노릇이나 선배 역할을 하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 각 분야의 '멘토 희구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젊은 축구 팬들이 홍명보에게 열광하는 것은 단지 그의 뛰어난 경기력이나 지도력 때문만은 아니다. 홍명보가 자신의 선수들에게 보여준 신뢰, 거의 무한한 애정처럼 보이는 존중의 태도가 스승이 부재하고 선배가 부재한 세대의 공감을 얻는 것이다.(본문 34쪽)

하지만 여기서 머문다면 한국축구는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할 것입니다. 스포츠를 비평적 해석이 필요한 현대문화의 중요한 현상으로 보고, 21세기 다양한 모순과 욕망이 광기어린 경기장 안에 농축되어 있음을 입증해온 정윤수 스포츠 평론가는 지금까지 홍명보 신화를 새로 쓰야 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휘트니 휴스턴을 좋아한 홍명보, 알고보니 '빈틈'있는 남자...

선수, 행정가, 지도자로서 홍명보는 많은 것을 이뤄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축구를 포함한 한국 스포츠의 낡은 전근대성, 폭력과 비리와 파벌에 의해 각 지역의 뛰어난 경기장과 유능한 선수와 열혈 팬들이 있음에도 여전히 답보 상태에 머물고 있는, 권위적인 위계질서에 의해 퇴행하고 있는, 이 낡은 시스템을 개혁하기 위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이제는 차분히 자문해볼 때가 되었다. 지금 한국 축구계서 그만한 결단과 능력과 권위를 가진 사람은 홍명보 외에 달리 없다. 그것이 한국 축구의 불운이며 또한 행운이다.(본문 49쪽)

저는 한 번씩 이런 말을 합니다. 한국 축구가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월드컵에 한 번쯤 나가지 못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럼 난리가 납니다. 하지만 한국 축구가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뼈를 깎는 각성과 개혁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 축구는 아시아 맹주는 될지언정, 세계 일급 반열에는 오르지 못할 것입니다.

2002년 스페인전 승부차기 성공 후 함박웃음을 지었던 홍명보, 하지만 이후 그가 웃는 모습은 거의 볼 수 없었습니다. 선수들에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습니다. 술도 맥주만 마신다고 합니다. 내기도 지지 않습니다. 골대 맞히는 아이스크림 내기 게임, 식판 정리 가위바위보 경기도 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방을 나지 않을 냉정한 인간상입니다. 하지만 홍명보도 '사람'으로 빈틈 있는 남자였습니다.

"축구 외적인 측면에서 인간 홍명보의 '틈'을 엿볼 수 있었던 것은 의외의 대화를 통해서였다. 올림픽 진출이 결정된 후 한국에서 스태프들끼리 자축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맥주를 많이 마시고 취기가 오른 홍 감독은 자신에 대한 여러 가지 틈을 살짝살짝 보여주었다. 다양한 주제의 대화가 오갔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자기가 선수 시절 휘트니 휴스턴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또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싶을 정도로 그녀의 죽음을 얼마나 안타까워했는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일반인들에게 휘트니 휴스턴을 좋아하는 것은 그다지 특별한 취향이 아니지만 자신의 취향에 대해 이야기하는 스포츠인은 거의 처음 만나본 것 같다."(본문 66쪽)

빈틈 있는 남자 홍명보. 점점 그가 좋아집니다. 우리에게 이런 축구 감독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대한민국 축구 미래는 밝습니다.
덧붙이는 글 새로운 세대의 맏형: 홍명보를 읽다 ㅣ정윤수.이태웅,손병하 공저 | 10만인클럽 ㅣ 9000원

새로운 세대의 맏형 - 홍명보를 읽다

정윤수.이태웅.손병하 지음,
10만인클럽, 2012


#홍명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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