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풍경이 그리워 낙안읍성 다시 왔습니다"

국립낙안민속자연휴양림, 낙안읍성, 뿌리깊은나무박물관

등록 2012.12.29 17:00수정 2012.12.29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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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경 그리워 낙안읍성 다시 왔습니다” ⓒ 김종길


길 위에서 어둠이 내렸다. 하루의 여로에 지친 몸을 달래려 낙안읍성 근처 온천을 잠시 들르기로 했다. 시설은 열악했지만 미끈미끈한 온천물은, 피부에 좋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는 듯했다. 온천 주인이라는 사내의 말도 그러했다. 

비 내리는 휴양림, 고요한 산책


순천 낙안읍성은 꽤나 알려진 관광지다. 그러나 낙안읍성 인근에 아주 그럴싸한 휴양림이 있다는 걸 아는 이는 드물다. 낙안읍성에서 버스로 한 구간, 걸어서도 10여 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에 휴양림이 있다. 국립낙안민속자연휴양림이다.

조정래의 <태백산맥> 무대인 벌교에서도 857번 지방도를 따라오면 휴양림이 지척이다. 낙안민속자연휴양림은 해발 591m인 오봉산과 더불어 낙안의 2대 진산으로 꼽히는 금전산(668m)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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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읍성 가까이 있는 국립낙안민속자연휴양림 ⓒ 김종길


엎어지면 바로 코 닿을 거리에 낙안읍성이 있는 것은 물론이고 벌교, 선암사, 순천만도 자동차로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어 하룻밤 묵기에는 이만한 곳도 없다.

게다가 등산로 겸 산책로가 잘 정비되어 있고, 휴양림을 찾은 이들에게 숲 해설사가 동행하여 숲을 탐방하고 체험할 수도 있다. 여행자가 찾은 날도 휴양관 앞에서 10시 30분에 모여 숲 해설사를 따라 숲과 자연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산책을 하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었다. 숲 해설프로그램은 매년 3~10월 사이에 운영한다.

이외에도 각종 야영시설과 체육시설 등이 잘 되어 있어 누구나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1박 2일에 3~5만 원 정도면 이용할 수 있으니 이만한 호사도 없다. 다만 산림청에서 운영하는 자연휴양림은 이용일 6주 전 매주 수요일 9시에 선착순으로 예약하기 때문에 바짝 신경을 쓰지 않으면 이용하기가 쉽지 않다는 단점이 있다.


어둠이 내린 휴양림의 밤은 고요했다. 밤새 보슬보슬 내리던 비는 이튿날 더욱 굵어졌지만 깊은 산중의 정취는 깊고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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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냄새 폴폴 나는 낙안읍성의 초가들 ⓒ 김종길


낙안읍성 시간여행

다음날 휴양림에서 지척인 낙안읍성을 갔다. 동문인 낙풍루로 읍성에 들어갔다. 이곳을 찾는 이가 대개 그렇듯, 동문에서 출발하여 임경업장군 비각, 객사, 낙민루, 동헌, 내아, 자료관, 서문, 성벽, 남문, 옥사, 대장간을 거쳐 다시 동문으로 관람 동선은 돌아오게 된다.

그 동선에서 조금이라도 비켜서고 싶었는지 여행자는 읍성 안 중앙 대로를 버리고 골목으로 들어갔다. 두 갈래의 길은 오태석 명창의 생가로 이어졌다. 인기척을 내고 마당에 들어서자 안주인인 듯한 이가 나왔다. 이영애 선생의 제자인 김재희씨였다. 주말에는 객사에서 공연하는데 오늘은 비가 와서 공연이 취소되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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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석 명창의 생가에서 가야금을 듣다. ⓒ 김종길


아이를 마루에 오르라 하더니, 냉큼 방에 들어가서 가야금을 내어온다. 가야금 앞에 아이를 앉히고 사랑스러운 제자를 가르치듯 아리랑 한 곡조를 함께 연주한다. 아이는 신기한 듯 어색한 듯 그저 생글생글 웃기만 하는데 선생님은 진지하다. 마침 한 무리의 사람들이 마당에 들어서서 이 광경을 보고 박수를 보낸다. 아이는 여전히 쑥스럽고 선생님은 여전히 자애롭다.

오수관, 오태석 부자에서 시작되는 낙안읍성 가야금 병창은 박귀희, 정달영, 장월중선을 거쳐 오갑순, 안숙선, 강정숙, 이영애, 주영희에 이르는 계보다. 가야금 산조의 창시자인 김창조 선생으로부터 가야금 산조와 병창을 배워 대성한 명인 오수관의 장남인 오태석은 유명한 국창 송만갑으로부터 판소리를 사사 받고 오수관과 박덕기에게 가야금 산조와 병창을 배운 당대 가야금 병창의 최고봉이자 중시조였다.

정해진 길에서 비켜났음에도 다시 길은 중앙대로로 연결된다. 낙안군수를 지낸 임경업 장군의 선정 비각이 은행나무 아래 고즈넉이 자리하고 있다. 낙안읍성은 처음 이 고장 출신 김빈길 장군이 의병을 일으켜 토성을 쌓았다가 조선 인조 때 임경업 장군이 토성을 석성으로 다시 쌓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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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아한 듯 엄중한 낙안읍성 객사 ⓒ 김종길


객사도 비에 젖고 있었다. 비 내리는 객사는 한층 운치가 있다. 우산을 벗어던지고 마당에 깔린 박석에 튀기는 빗방울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낙안객사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70호다. 객사는 지방에 출장 온 관리가 흔히 머물기도 했고 임금을 상징하는 궐패를 모셔두었기 때문에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고을의 관리와 선비들이 모여 망궐례를 올리는 장소이기도 했다.

낙안객사는 1900년대 초까지 잘 보존되었다가 1909년 이후에 낙안초등학교 건물로 사용되면서 모양이 많이 변조되었으나 1982년에 보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양쪽 날개를 단 객사 건물은 단아한 듯 엄중하다.

객사 뒤를 돌아가니 소담한 풍경이 사람의 혼을 빼놓는다. 앙증맞은 굴뚝도 그러하거니와 담장 너머로 오랜 노거수들의 옅은 단풍이 설렌다. 붉디붉어 사람을 쉬이 지치게 하는 그런 단풍이 아니라 은은하고 또 은은한... 있는 듯 없는 듯한 색색 단풍이 곱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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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읍성 객사 뒤 굴뚝과 노거수 ⓒ 김종길


낙민루 옆 고목은 제법 기운차다. 생을 다한 나뭇잎이 떨어진 게 아니라 나뭇가지의 기운을 이겨내지 못해 잎이 스스로 떠난 듯하다. 밑동부터 튼실한 노거수의 기운은 하늘을 이고 있는 듯 장하다.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는 흔한 잔디밭에 검은 비석 하나가 비를 맞고 서 있다. 3.1독립운동기념비다. 기단은 비를 맞아 반질반질한데 비신은 글자마저 감추고 싶은지 어둡기만 하다.

비도 바람도 거세진다. 잠시 비바람을 피할 겸 자료관에 들렀다. 낙안읍성의 이모저모를 어떻게 살필 건지 이곳에서 다시 생각을 가다듬어야 했다. 여태까지의 이동이 예행연습에 불과했다면 이곳에서 전열을 다시 정비하여 읍성을 샅샅이 훑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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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자 가옥의 굴뚝과 초가지붕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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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민속자료 제95호 김대자 가옥은 건물의 앞 중앙에 마루를 둔 한 일자 모양의 4칸 전퇴집이다. ⓒ 김종길


읍성 안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오랜 가옥들이 많다. 이곳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아무래도 초가다. 기와집이야 굳이 이런 민속마을이 아니더라도 종종 볼 수 있지만, 초가는 원체 보기 어려운 옛집이 되어버렸다. 초가 끝에 매달린 굴뚝과 가지 끝에 매달린 홍시가 옛 풍경을 넌지시 불러온다.

중요민속자료 제95호 김대자 가옥은 건물의 앞 중앙에 마루를 둔 한 일자 모양의 4칸 전퇴집이다. 특이한 것은 중부지방의 오래된 민가에서 보이는 앞 처마 밑에 토담을 둘러쳐서 한 칸 반의 부엌을 만들었다. 반 칸은 후대에 넓혔다고 한다. 부엌 중간쯤에 조왕신을 모시던 자리와 관솔불을 켜던 선반이 있다고 하나 분주히 움직이며 주인이 불을 때고 있어 볼 수가 없었다.

"이 풍경 그리워... 낙안읍성 다시 왔습니다."

서문에서 성벽을 올랐다. 성벽을 오른다는 건 묘한 쾌감을 몰고 온다. 마치 전쟁의 승리자라도 된 듯 의기양양하게 성위를 걷는다. 울창한 대숲이 성벽에 갈리고 하늘로 점점 오르던 성벽이 크게 휘어지는 곳에서 왼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끝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열 지어 있었다. 저마다 손에는 카메라를 들고 있었는데 모두 한 방향만 뚫어지라 내려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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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경 그리워 낙안읍성 다시 왔습니다”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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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경 그리워 낙안읍성 다시 왔습니다” ⓒ 김종길


하마터면 나도 모르게 소리 지를 뻔했다. 낙안읍성이야 한때 제집 드나들듯 자주 온 곳이지만 늘 이곳에 서면 타임 슬립을 경험한 듯 깊은 감동에 빠지게 된다. 시간이 멈춘 듯하다는 말이 이곳에선 얼마나 진부한 표현이라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한참을 그렇게 서성이다 손가락으로 액자를 만들어보다 문득 우산으로 풍경을 가렸다. 우산에 후드득 떨어지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서다. 눈으로 본 풍경을 귀로 다시 담으니 제법 근사한 영화의 한 장면이 오버랩 된다. 성벽 아래는 유자가 황금빛이다. 절로 침이 고인다. 바람이 분다. 비에 젖은 흙내가 풍겨온다. 이로 인해 이곳에선 시각·청각·미각·촉각·후각의 오감이 모두 움직이기 시작했다. 절정의 감정을 모두 맛보았으니 이제 내려갈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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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 아래의 유자가 황금빛이다. ⓒ 김종길


옹성의 모습이 제법 잘 갖춰진 쌍청루는 멋들어진 남문이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남도 들녘의 풍광은 시원하기 그지없다. 눈 맛이 좋으니 고개를 돌려도 산세가 빼어나다. 비를 머금은 산세가 시간마저 잡고 있다.

우물을 디자인하라!

예전 이곳에 오면 늘 찾곤 했던 우물을 찾느라 몇 번 허탕을 쳤다. 비가 그치자 바람이 심해지고 갑자기 추워졌다. 고샅길을 몇 번이나 헤맸지만 우물을 찾을 수 없었다. 인근 민가에 들러 길을 물어서야 겨우 찾을 수 있었다.

이 우물을 꼭 찾아야 하는 이유는 우물에 가보면 알게 된다. 세상에 이처럼 아름다운 우물이 있을까. 마치 바닥에 도형을 그린 것 같은 이 우물의 조형미에 흠뻑 빠져 이곳에 올 때마다 매번 찾게 된다. 누군가 명령했다. '우물을 디자인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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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샘'으로 불리는 읍성 안 아름다운 우물 ⓒ 김종길


풍수지리에 따르면 낙안읍성은 배가 떠다니는 행주행(行舟形)으로 우물을 깊이 파는 걸 금했다. 대신 낮은 곳에서 나오는 우물을 길러 쓰도록 했는데 이는 우물을 깊게 파면 배 밑이 뚫리어 배가 가라앉아 고을이 쇠하고 낮은 우물을 길러 쓰도록 한 것은 배안에 고인 물을 퍼낸다는 의미가 있다. 옛날 고을 수령이 이 물을 먹었다 하여 '큰샘'으로 불리는 이 우물물을 마시면 마음이 착해지고 미인이 된다고 한다.

다시 골목길... 토담과 시멘트길이 공존하는 이 읍성은 아무래도 좋다. 무슨 세트같이 을씨년스런 다른 읍성보다 사람 냄새 풀풀 나는 이 읍성이 아무래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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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읍성의 고샅길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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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읍성의 고샅길 ⓒ 김종길


낙안읍성에는 오래된 나무가 성안에 심어져 있다. 수령이 300년 이상 된 푸조나무와 팽나무가 각 1그루씩, 은행나무가 2그루이고 나머지 11그루는 200년 이상 된 것으로 보인다. 인조 4년(1626)에 낙안읍성이 석성으로 축성될 때에 심었다고 한다. 이 노거수들은 모두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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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읍성에는 200년 이상 된 노거수만 15그루가 넘는다. ⓒ 김종길


한 시간 남짓한 관람은 다시 동문으로 돌아오면서 끝이 났다. 성을 빠져 나와 <뿌리깊은나무박물관>으로 향했다. <뿌리깊은나무박물관>은 고 한창기 선생이 생전에 수집했던 유물을 기탁 받아 순천시에서 건립한 박물관이다. 읍성 동문으로 나와 주차장을 지나 남쪽으로 얼마간 가면 나온다.

소설가 조정래는 한창기 선생을 일러 '멋쟁이 지식인'이라 했다

그이는 하늘을 나는 새처럼
얽매임 없이 살았던 자유인이었고,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여러 가지 개성으로
스스로의 삶을 다양하게 가꾸며
한평생을 흐드러진 멋으로 살고 간
우리 시대의 최고의 멋쟁이였고,
모범적 지성인이었다.

한창기 선생은 한글사랑으로 유명한데, 한글 전용체의 가로쓰기를 <뿌리깊은나무>의 출간을 통해 실천했다. 이곳에는 그가 모은 한글소설, 역사서, 한글 목판 등 한글류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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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깊은나무박물관 내부 전경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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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깊은나무박물관에 전시된 홍길동전 ⓒ 김종길


바람이 거세졌고 온몸이 얼 정도로 추워졌다. 여행자는 이날 감기에 걸려 한동안 기차를 타지 못했다.

☞ 송광사에서 낙안읍성 가는 버스는 8시 55분, 11시 5분, 오후 3시 5분, 5시 35분에 있다. 반대로 낙안읍성에서 송광사 가는 버스는 8시 10분, 10시 10분, 2시 10분, 4시 40분에 출발한다. 순천역에서 낙안읍성 가는 버스는 1번, 16번, 63번, 68번 등 자주 있으며 소요시간은 약 40분 정도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코레일과 블로그 '김천령의 바람흔적'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낙안읍성 #뿌리깊은나무박물관 #낙안민속자연휴양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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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의 미식가이자 인문여행자. 여행 에세이 <지리산 암자 기행>, <남도여행법> 등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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