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26년>에 후원금을 보낸 대견한 딸

딸 이름은 찾지 못했지만 마음은 마냥 흐뭇했습니다

등록 2012.12.29 21:02수정 2012.12.29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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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 19일 대통령선거일 아침에 아내랑 영화 <26년>을 보러 극장에 갔습니다. 미리 친구와 그 영화를 본 딸이 우리에게 평을 좋게 했으며, 자기의 이름도 끝에 나온다고 해서 가게 된 것입니다.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 영화의 예매권을 두 장 받았다고 딸이 말했습니다. 웬 것이냐고 물으니까 그 영화 만들 때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았는데 자기도 그 취지에 공감해서 후원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혜택으로 예매권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딸이 그런 데에 관심을 갖고 많지 않은 자기 용돈에서 후원금을 냈다는 게 말할 수 없이 대견스럽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그 영화를 봐야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그 영화를 보러 간 가장 중요한 이유는 대견한 딸의 이름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보고 와서 딸은 영화 끝에 그 영화를 만드는 데 도움을 준 사람들의 명단이 10여 분 동안 스크린에 소개된다고 했습니다.

딸은 올해 대학교 2학년입니다. 각종 사회 문제에 관심은 조금 갖고 있지만 직접 가서 강의를 듣거나 집회에 참가하지는 않습니다. 몇 차례 내가 같이 동참하자고 권유했지만 그럴 때마다 대부분 거절했습니다. 지금까지 그런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이번 일은 내 눈을 의심할 만한 획기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딸은 영화 <26년>에 후원하게 된 동기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게 말해주었습니다. 언젠가 신문에서 영화를 만들기 위해 모금운동을 한다는 기사를 봤다고 합니다. 그래서 도대체 그 내용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컴퓨터를 켜고 <26년> 만화를 봤습니다. 아마 그 만화가 그에게 큰 영향을 끼쳤던 것 같습니다. 만화를 집중해서 본 다음에 그 기사가 실린 신문을 다시 찾아봤습니다.


그 후 모금과 관련된 홈페이지에 들어가 가입하고 2만원을 후원했는데, 여러 가지 혜택을 준다고 해서 후원을 한 것이지 만약 혜택이 없었으면 후원을 안 했을 것이라고 말해서 우리 부부는 한바탕 웃었습니다.

딸의 말을 듣고 아내는 "그 아빠에 그 딸이네." 라며 한 마디 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내의 말이 틀렸습니다. 이번에는 딸이 나보다 훨씬 장하고 뜻 깊은 일을 한 것입니다. 나는 모금운동에 대해 한 귀로 듣고 흘려버렸고, 딸은 그 기사 내용에 관심을 갖고 직접 몸과 마음을 움직여 참여했기 때문입니다.

딸이 간단히 이야기한 대로 영화는 흥미진진했습니다. 1980년 5월에 일어난 광주민주화운동의 아픔이 생생하게 그려졌습니다. 계엄군에 의해 희생당한 보통의 시민들이 피해자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하지만 상부의 명령에 따라 현장에 직접 투입해서 무고한 시민들을 무참하게 살상했던 계엄군들도 그에 못지않은 피해자임을 영화는 장면 곳곳에서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다 알고 있습니다. 광주민주화운동의 최고책임자가 어떻게 살아왔고 지금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도 우리나라와 같을까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마음씨가 비단결같이 곱고 착해서 아무리 큰 죄를 져도 용서해주고 더불어 살아가는 것일까요? 아니면 법이 관용의 정신을 유감없이 잘 보여주어서 그 사건에 책임 있는 사람들도 떵떵거리고 잘 살고 있는 것일까요?

2시간이 넘는 긴 영화가 끝났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딸이 말한 엔딩 크레딧이 시작됐습니다. 그러자 관객들은 여기저기에서 일어나 나갔습니다. 스크린에는 영화를 만드는 데에 도움을 준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올라가는데 관객들은 그에 아랑곳없이 나가버렸습니다. 

시간이 좀 지나니 극장 안은 우리 부부만 남았습니다. 극장의 종업원 두 명이 계속 번갈아서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했습니다. 우리가 나가야만 극장 안을 청소할 수 있기 때문이겠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나갈 수는 없었습니다.

마침내 딸의 이름이 시작되는 부분에 왔습니다. 아내와 두 눈을 뜨고 스크린을 뚫어지라 응시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요? 딸 이름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너무 빨리 올라가서 우리가 미처 발견을 못했을 거라고 아쉬워하며 엔딩 크레딧이 다 끝난 다음에 일어나 나왔습니다.

영화는 뜻 깊게 많은 생각을 하며 잘 봤지만 딸 이름을 확인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워 집에 와서 컴퓨터를 켰습니다. 혹시나 해서 여기 저기 살펴보니 다행히 그 영화를 후원한 사람들의 명단이 있는 엔딩 크레딧이 있었습니다. 빨리 그 부분을 클릭해서 다시 꼼꼼하게 봤습니다. 아, 이번에도 없었습니다. 극장에서 우리 부부가 잘못 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몇 시간이 지난 후 딸이 들어오고 나서야 그에 관한 궁금증이 풀렸습니다. 영화를 친구와 볼 때에 엔딩 크레딧을 끝까지 다 보지 않았고, 자기의 이름도 정확하게 확인하지 않고 본 것 같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후원 가입도 실명이 아니라 다른 아이디로 했을 가능성도 있는데 뭐라고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딸이 실명으로 하지 않은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다른 아이디로 가입했을 것입니다. 엔딩 크레딧에도 실명이 아닌 다양한 아이디가 많았습니다. 정말 아쉬웠습니다. 그거라도 생각난다면 다시 컴퓨터를 켜고 확인할 수가 있었을 텐데…….

영화 <26년>에서 딸의 이름은 확인을 못했지만 그렇다고 딸의 갸륵한 뜻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신문에서 기사를 보고 만화를 보고 자신의 용돈에서 거금 2만원이나 후원한 딸의 고귀한 마음은 나와 아내의 가슴 한가운데에 소중하게 간직되어 있습니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한 가지 소망을 가져봅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다음에 이와 비슷한 일이 있으면 가족이 한 자리에 모여 의견을 나눈 다음에 다함께 적극적으로 후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날이 꼭 올 거라고 나는 믿습니다.
#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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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요즈음 큰 기쁨 한 가지가 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마이뉴스'를 보는 것입니다. 때때로 독자 의견란에 글을 올리다보니 저도 기자가 되어 글을 쓰고 싶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우리들의 다양한 삶을 솔직하게 써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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