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패배의 아픔 위로하는 정태춘의 노래

북한강에서

등록 2012.12.30 18:07수정 2012.12.30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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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이 노래가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나 2012년 지금이나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한결 같은 세상에 대한 우리의 모습과 생각은 놀랍게도 많이 변했다. 어쩌면 그 시절의 그 마음으로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지도 모른다. 아니 돌아갈 수 없다. 우리가 현재 점유하고 있는 이 공간은 이미 회귀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에 의해 떠밀려 왔고 동시에 어디론가 떠밀려 가고 있다.


북한강은 한강의 두 갈래 중 위쪽 금강산에서 발원하여 강원도와 경기도를 거쳐 경기도 양평 두물머리에서 남한강과 합류하는 강이다. 그 북한강이 정태춘이 노래한 북한강인지 혹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북한강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그 강 어드메쯤 정태춘이 가 보았을 것이고 그 강물에서 이렇게 깊은 노래를 건져 올렸을 것이다.

<해가 뜨는 새벽 강>

저 어둔 밤하늘에 가득 덮인 먹구름이
밤새 당신머리를 짓누르고 간 아침
나는 여기 멀리 해가 뜨는 새벽 강에
홀로 나와 그 찬물에 얼굴을 씻고
서울이라는 아주 낯선 이름과
또 당신이름과 그 텅 빈 거리를 생각하오.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가득 피어나오.

밤새 복잡한 꿈 때문에 어지러워진 머리는 아마도 우리들의 머리요 마음일 것이다. 정태춘 역시 그 어지러운 맘으로 해가 떠 올라오는 새벽 강에 홀로 서 있다. 1987년의 대한민국은 민주화의 용광로였다. 이한열의 죽음으로 세상은 민주화의 거센 흐름으로 가득했고 당시 우리들은 새로운 시대를 꿈꾸며 뜨거운 가슴으로 세상과 마주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빨리 식어가는 민중들의 열기를 틈타 다시 비민주적 세력이 득세하였고 군복을 벗고 양복으로 옷만 갈아입은 군사정권이 다시 이 땅위에 서는 부조리한 광경을 우리는 목도하고 말았다. 우리는 다시 절망과 혼돈에 빠져들고 말았다. 바로 그 즈음 정태춘은 북한강에서 불투명한 안개를 통해 이 절망과 혼돈에 빠진 우리의 마음을 노래로 보듬고 있다.

안개가 강위에 피어오르는 계절은 가을부터이다. 노태우의 6.29선언으로 그해 가을 그는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그 참담함은 민주화를 외치던 우리 모두의 가슴에 불화살처럼 꽂혔던 아픈 기억이 생생하다. 바로 그때, 정태춘은 북한강에서 아침 안개를 본다. 실체를 가리는 안개는 희망도 절망도 아닌 불투명이다. 그 불투명은 그 이후 오래 우리들을 괴롭혔는데 그 불투명의 안개가 천천히 피어오르는 북한강에서 정태춘은 몽환적 기타반주에 맞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


흐름

짙은 안개 속으로 새벽 강은 흐르고
나는 그 강물에 여윈 내손을 담그고
산과 산들이 얘기하는 나무와 새들이 얘기하는
그 신비한 소리를 들으려 했소.
강물 속으론 또 강물이 흐르고
내 맘 속엔 또 내가 서로 부딪치며 흘러가고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또 가득 흘러가오.

그래도 강은 흐름을 멈추지 않는다. 아무리 안개가 짙어도 강은 모든 것을 이끌고 바다로 바다로 향해 흘러간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흐름'이라는 단어와 마침내 정상화 혹은 제 모습이 되고 말 것이라는 강력한 믿음을 등치시키곤 한다. 그 흐름 속에 내 여윈 손을 담근다는 것은 현실에의 개입이다. 국외자로서 사태를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사태에 개입하는 것은 엄청난 위험과 고통을 수반하기도 한다. 그 고통의 소리와 그 엄청난 위험을 정태춘은 산과 산의 이야기, 나무와 새들의 이야기라는 말로 순화하고 있다. 이 부분을 혹여 세상으로부터 멀어지려는 정태춘의 마음으로 해석할 수 있으나 그의 이 후 행보가 그것보다는 여윈 손을 담그는 것을 세상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임을 시사 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편이 더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갈등이 없을 수 없다. "내 맘 속엔 또 내가 서로 부딪치며 흘러가고"라는 가사를 보라! 그 많은 고통과 위험으로부터 수반되는 갈등과 번민과 회한이 그를 이렇게 노래하게 했다. 그렇다. 이런 갈등과 번민과 회한이 없는 개입과 투쟁은 사실 진정성이 없는 기계적 움직임일 수 있다.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으로서 역사와 현실의 문제를 가슴으로 안아야 하기 때문에 그 모든 갈등을 하게 되고 그로부터 언제나 새로운 에너지가 뿜어져 나옴을 우리는 지나온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여전히 강물은 흐르고 있는 것이다.

희망을 위해

아주 우울한 나날들이 우리 곁에 오래 머물 때
우리 이젠 새벽 강을 보러 떠나요
강으로 되돌아가듯 거슬러 올라가면
거기 처음처럼 신선한 새벽이 있소
흘러가도 또 오는 시간과
언제나 새로운 그 강물에 발을 담그면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천천히 걷힐 거요

우울한 시대 탓에 우리도 점차 우울해졌다. 그 빛나던 6월도, 그 힘찬 투쟁도 동력과 에너지를 잃어버렸고 가을 강가 안개처럼 우리는 점차 우울 속으로 빠져 들었다. 그래서인가? 정태춘은 스스로와 우리 모두를 위로하듯 새벽 강으로 떠나자고 권유한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거기서 다시 출발하고픈 것이다. 여전히 그곳에는 신선한 생명력으로 우리를 맞이할 새벽과 "처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시간은 언제나 현재와 과거가 공존한다. 지금 내가 보내버린 시간에 집착하지 말고 새롭게 다가오는 시간을 위해 다시 힘을 내고 희망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간은 언제나 새롭고 또 새롭다. 그 새로운 시간의 흐름을 느끼는 순간 우리는 새로운 희망을 본다. 그리하여 모든 불투명은 사라지고 더불어 우울함도 사라지고 강렬하고 아름다운 아침 햇빛을, 그 빛나는 희망의 삶을 보게 되는 것이다. 정태춘은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음의 고저가 거의 없는 노래를 조용히 읊조리고 있는 것이다.

대선 패배의 정신적 충격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진보세력들과 순수한 이 땅의 기층민중의 삶에 남부지방, 특히 내가 살고 있는 진주와 사천에 폭설이 내렸다. 눈은 이 모든 가슴 아픈 실체를 덮어버리는 하얀 마법이다. 순간이나마 우리는 그 순결함에 정신이 마비되어 버리지만 햇빛이 나타나는 순간 그 마법의 추잡한 실체를 보게 된다. 지금 온 세상을 흰 눈처럼 덮고 있는 저 당당해 보이는 마법이 언젠가는 빛나는 햇살에 녹으리니...

그렇다. 우리는 여전히 살아있고, 여전히 강건하며, 여전히 빛나는 진보의 기치로 살아갈 것이다. 그 험난한 여정에 정태춘의 1987년 노래는 깊은 마음의 위안으로 다가온다.
#정태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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