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가면 나는 '술꾼'도 되고 '불자'도 된다

순박한 불교도들의 나라 라오스 여행기

등록 2012.12.31 12:30수정 2012.12.31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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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어라오(Beer Lao)를 아시는가? 우리에게는 친숙하지 않은 맥주 이름이지만, 라오스 사람들에게는 자랑스러운 몇 안 되는 국가대표이다. 라오스 사람들에게 비어라오는 맥주와 거의 동의어이다. 라오스에 다녀오기 전에는 그런 맥주가 있는 줄도 몰랐는데. 얼마 전 맥주집 메뉴판에서 비어라오를 보았을 때의 그 반가움이란 좋아하는 사람을 뜻밖의 장소에서 만났을 때의 반가움과 같았다. 이런 것이 바로 그곳을 다녀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느낌인가 보다.

지난 여름 15일간 다녀온 라오스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첫 해외 배낭여행이었지만 과감하게 혼자 가는 쪽을 택했다. 한국의 정신없는 세상만사로부터 조금 벗어나고 싶었던 나에게 라오스라는 나라 이름 앞에 붙는 '조용한 불교의 나라'라는 타이틀은 매혹적이었다. 가까운 동남아 나라들 중에서 배낭여행지를 생각하고 있던 차에 우연히 라디오에서 그 문구를 듣는 순간 사실 마음으로는 바로 결정해 버렸다. 바로 여기다!


소승불교와 사회주의가 동거하는 땅

라오스는 사회주의 국가이면서 전국민의 95%가 소승불교를 믿는 독실한 불교도들의 나라이다. 사회주의와 불교의 이 특이한 조합은 이 나라의 독특한 분위기와 특징들을 만들어낸다. 라오스를 여행하면서 이곳이 사회주의 국가라는 것을 상기할 수 있는 장소는 혁명 과정을 전시해 놓은 박물관뿐으로, '여기가 정말 사회주의 국가인가?'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그러나 이는 타인의 시선에서는 그럴 뿐, 어느 체제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고와 삶에 일정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라오스의 많은 여성들이 경제생활을 하고,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높은 것은 아마도 사회주의의 영향이 아닐까.

불교는 라오스 사람들의 삶과 매우 밀착되어 있다. 어디에 가나 불교 사원을 찾을 수 있고 주황색 승복을 입은 승려들의 무리를 만날 수 있다. 매일 아침 승려들의 탁발 행렬에 공양을 드리는 것은 이들의 일상이다. 사람이 죽으면 거의 당연히 사원에 묻힌다. 라오스 사람들이 격한 감정표현을 잘 하지 않는 것도 소승불교의 영향일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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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 루앙프라방의 탁발. 새벽 다섯 시쯤 승려들의 탁발 행렬이 시작된다. 탁발이 끝나고 기도를 올리는 모습이다. 관광객들의 참여도 보인다. ⓒ 류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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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 루앙프라방의 사원 왓 씨앙통. 곳곳에서 오래 되거나 새로 지어진 사원들을 만날 수 있다. ⓒ 류소연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라오스 북부를 일주하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사람을 만나러 가듯, 첫 배낭여행의 두근두근 주체할 수 없는 마음을 안고 비엔티안국제공항에 내리는 나를 맞이한 것은 쏟아지는 비였다. 좀 무안해졌으나, 그 비는 나를 반겨 주는 것이었나 보다. 여행은 순조로웠고, 우기 철에 방문했음에도 중요한 때에 비를 만난 적은 거의 없었다.


수도 비엔티안부터 시작해서, 옛 왕조의 수도인 고도 루앙프라방, 구름에 뒤덮인 시골마을인 농키아우, 농키아우에서 보트를 타야 들어갈 수 있는 꼭꼭 숨겨진 예쁜 마을 므앙응오이느아, 라오스에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는 중국인들의 거주지가 되어 가는 우돔싸이, 북라오스의 거점인 루앙남타까지를 돌아보았다. 15일 동안 산악지대인 라오스 북부를 한 바퀴 돈 셈이다.

지역에서 지역으로 버스나 미니밴으로 이동할 때에는, 분명히 포장도로이고 굴곡이 없어 보이는데도 차가 덜컹거리는 이상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차가 덜컹거려서 머리가 차 천장에 닿을 정도로 튀어올라 '아오!' 하고 아픈 비명을 질러야했다. 그런 나를 보면서 미니밴 안의 현지인들은 재미있다는 듯 소리없이 웃기만 했다. 아무리 익숙하다고 해도, 그들은 아프지 않은 걸까.

동화속 나비가 날고 차가 다니지 않는 곳, 므앙응오이느아

여행 중 둘러본 곳들 중 가장 시골마을인 므앙응오이느아는, 농키아우에서 보트를 타야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몇 년 전부터 관광이 이 곳 사람들의 주된 수입원이 되었지만 그 전까지는 이들은 강에 의존한 생활을 했다. 공해가 없으면 그렇게 많은 나비가 날아다닐 수 있다는 것을 그곳에서 처음 알았다. 여러 크기의 갖가지 색깔의 나비가 날고, 오리떼가 줄지어 동네를 행진하고 있었다. 나는 사실 나비를 무서워한다. 일종의 나비공포증 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데 이곳에 와서 너무 많은 나비들을 접하다 보니 오히려 점점 무감각해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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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앙응오이느아의 마을 풍경. 멀리에 누워서 쉬고 있는 여인의 모습을 닮았다 해서 'restinglady'라 불리는 산이 보인다. ⓒ 류소연


라오스의 시골마을이 으레 그렇듯 이 동네도 집집마다 오리와 닭을 키우고, 샤워도 몸에 살롱이라는 천을 두른 채로 마당에서 한다. 사람들이 사는 방갈로와 관광객을 위한 작은 식당들이 줄지어 있고, 동네 끝에는 작은 사원이 있다. 학생들은 보트를 타고 나가야 학교를 다닐 수 있다. 마을 입구에 있는 'Lao Youth Travel'이라는 현지인이 운영하는 생태관광업체를 통해 보트를 타고 옆 마을까지 가 볼 수 있었다. 그 마을 사람들은 관광수입에 거의 의존하지 않는데, 이 사람들은 수공업을 통해 생계를 꾸리고 있었다. 이렇게 시골 각지에서 생산된 직조물들이 도시의 시장으로 운반되어 거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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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 전통 방식으로 천을 직조하는 모습. 이렇게 직조된 수공예품들이 도시의 시장으로 운반되어 팔린다. 도시에서 대학을 다니는 딸이 방학을 맞아 고향에 내려와 어머니의 일을 돕고 있다. ⓒ 류소연


아이들이 많다는 점이 한국의 시골풍경과는 퍽 달랐다. 아이들이 뛰놀고, 닭들과 오리들이 제멋대로 쏘다니고, 동화 속에나 나올 나비들이 날아다니고, 강이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이 동네에서 시간만 허락된다면 한동안 머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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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앙응오이느아의 우 강과 현지인 여행가이드의 뒷모습. ⓒ 류소연


맨손으로 밥먹기, 라오스인 되기의 첫걸음!

여행에서 가장 매력적이었던 경험들 중 하나는 라오스 사람들과 함께 밥을 먹어본 일이었다. 라오스도 한국처럼 주식이 밥인데, 밥 종류가 다르다. 이들은 찰밥을 손으로 뭉쳐서 반찬을 함께 집어서 먹는다. 보통 식당에서는 포크와 스푼을 주기에 그것들을 사용해서 먹었는데, 라오스인들에게 초대받은 저녁식사에서는 진짜 라오스 식으로 밥을 먹게 되었다. 므앙응오이느아라는 작은 마을에서 정말 작은 카페에 들렀다가 그곳을 운영하는 청년과 이야기를 하게 되어 그들로부터 저녁식사에 초대받을 수 있었다. 나에게는 어색하지만 그들의 몸에는 깊이 배었을 그들의 일상생활의 문화에 동참하게 되니 라오스인들의 문화 속에 더 깊이 들어가 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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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의 한 식당에서의 식사. 찰밥에 쇠고기 볶음이 나왔다. ⓒ 류소연


해피워터 '라오라오'와 '한국인의 자존심'

라오스 동부의 폰싸완(씨앙쿠앙이라고도 불린다.)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구불구불한 길들 저편으로 널려 있는, 고대인들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항아리들을 보러 간다. 폰싸완에서의 여행은 개인 오토바이가 없다면 투어프로그램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데, 한국인 사진작가 아저씨, 프랑스 의대생인 같은 이름의 두 명의 마리, 그리고 현지인 가이드 한 명과 가이드의 친구, 그리고 나까지 여섯 명이 함께하게 되었다.

두 명의 마리와 한국인 아저씨는 투어 코스를 정할 때부터 서로 잘 맞지 않는 것 같아서 내가 중간에서 어렵게도 중재를 해야 했는데, 여러 곳을 단시간에 보자는 한국인 아저씨와 몇 곳만을 여유있게 둘러보고 싶다는 두 명의 프랑스인 마리는 정말 힘든 조합이었다. 그런데 투어프로그램 중에 양조장, 즉 술 빚는 동네를 들르는 시간이 있었다. 거기서 40도가 넘는 라오스식 위스키인 라오라오를 두 잔씩 원샷한 후에야 우리 투어 팀의 분위기는 급반전되어 그 날 저녁까지 즐거운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현지인 가이드가 말하길 라오라오는 '해피 워터'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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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싸완의 항아리고원에서 ⓒ 류소연


그런데, 내가 술을 가장 처음 받았는데 정말 너무 독한 것이다! 독하다고 생각하면서 겨우 마셨는데 그 다음 차례인 마리와 마리는 너무 아무렇지 않게 술을 음미하는 것이었다. 그 다음 차례인 이 한국인 아저씨께서는 술을 잘 하지 못하셨다. 술 하면 한국사람도 어디 가서 빠지진 않는데. 정말 순간적으로, 프랑스 학생들 앞에서 한국인이 얼마나 술을 잘 마시는지를 보여줘야겠다는 위기감(?)이 들어서 나는 다음 잔을 정말 그냥 소주인 양 한번에 마셔 버렸다. 라오스 사람들도 한국인 못지않게 술을 좋아한다. 현지인 가이드와 두 명의 마리도 나에게 정말 술을 잘 마신다고, 어려서 그런가 보다며(그들은 나보다 너덧 살 위였다.) 칭찬세례를 했고 나는 정말 이상하지만 왠지 모를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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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싸완 '위스키 빌리지'의 양조장 내부 모습. ⓒ 류소연


의심많은 나를 가르친 순박한 불교도들의 나라

해외 배낭여행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지만 국내로는 여기저기 안 가본 곳이 별로 없는 나는 왠지 해외여행이라고 해서 어려울 것은 없을 것 같은 좀 오만한 생각을 가졌다. 출발할 때에는 패기를 부렸으나, 막상 현지에 도착해서는 만나는 모든 사람을 의심하고 또 의심하고 있는 나를 곧 발견할 수 있었다. 게다가 내가 사는 세상이 좀 흉흉한가! 적어도 한국에서 온 나는 모든 낯선 것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라오스 사람들의 그 어쩔 수 없는 순박함은 나의 의심들을 무안한 것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한국에만 나쁜 사람들이 있고 라오스라고 해서 나쁜 사람들이 왜 없겠는가. 그러나 라오스에서의 경험들은 내가 사는 세상만이 전부가 아니고 내가 사는 세상에서의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어디서나 맞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합장하며 "싸바이디(안녕하세요)" 하는 인사를 처음에는 어설프게 따라 하기 시작했지만, 이 불교식 인사법 자체가 나를 그들의 욕심 없고 소박한 삶으로 이끄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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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 폰싸완의 시장 풍경 ⓒ 류소연


내가 먼저 인사를 하면 밝은 미소를 지으며 화답해주는 시골 사람들, 예쁘다는 칭찬에 수줍게 웃던 17살 소녀 메이, 라오스 젊은이들도 클럽 같은 데에 가서 노냐는 나의 질문을 받고 '조용하게 술을 마시기 위해' 비엔티안의 시끄러운 클럽에 데려다준 친구 캄, 내 엽서에 우표를 같이 붙여준 우체국 아저씨, 루앙프라방의 크지도 않은 시가지에서 밤에 길을 잃은 나를 숙소까지 데려다 준 식당 종업원, 동아시아에서 온 외국인 여자를 '뚝뚝(라오스의 택시)'이라는 자산으로 꼬셔보려다가 퇴짜맞고 부끄러워하며 멀어져간 뚝뚝 기사 청년, 그리고 소박한 살림살이로 길가에 집을 짓고 살아가던 많은 라오스 사람들. 이들 모두가 나를 부끄러울 만큼 마음 따뜻해지게 만들었다. 세상에는 의심과 계산을 잘 하는 것이 삶을 잘 살아가는 방법으로 통용되지 않는 사회도 존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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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콩 강의 야경. ⓒ 류소연


짧아서 아쉬웠던, 15일간의 만남

라오스 사람들이 많이 쓰는 말 중에 '보펫 냥(괜찮습니다)!'이라는 말이 있다. 빠르고 각박하게 돌아가는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온 나에게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괜찮은, 느리고 시간관념 없는 이 사람들의 삶이 처음에는 불편했다. 그런데 웬걸, 나는 어느새 그 속도에 적응하고 있었다. 여행에서 돌아와서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보이는 사람들의 움직임부터, 이곳의 모든 것이 너무 빠르게 느껴졌다. 고작 보름을 머물렀을 뿐인데 말이다.

그럼에도 시간 자체는 너무도 빨리 지나갔다. 웃음도 소리없이 얼굴로만 웃고, 감정표현이 적은 이 사람들에게는 '마음을 읽을 충분한 시간'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더 허락되었더라면 더 많이 가까워지고 싶었는데. 15일이라는 시간은 너무 짧았다. 지구상에 그리워할 장소가 하나 더 늘었다는 것은 설레는 사실이다. 한 가지 소망이 있다면, 다시 만날 때의 라오스가 '개발'로 망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난한 나라인 라오스는 지금 관광산업으로 급속한 개발의 노정에 있는데, 그것이 자연과 사람을 망가뜨리는 슬픈 일이 없기만을 바란다.
#라오스 #루앙프라방 #폰싸완 #씨앙쿠앙 #므앙응오이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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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관심이 많고 알고 싶은 것도 많은 대학생입니다. 항상 여행을 꿈꾸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 대학생기자단 오마이프리덤 1기로 활동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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