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가 360만 명 정도인 알바니아. 수도인 티라나 도심을 조금만 벗어나면 대부분의 거리가 한산하다.
홍성식
타국에서는 처음 만난 이들의 인상과 태도가 그 나라에 대한 느낌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알바니아에 들어온 지 1시간 남짓. 가게 주인과 경찰관, 숙소 주인들까지 웃는 얼굴이 보기 좋았다. 어린 시절 내가 살던 동네와 다를 바 없는 거리 풍경도 편안함을 줬다. 때 묻은 배낭을 내려놓고 그늘 아래 정원 테이블에 앉아 티라나 한 병을 더 청해 마셨다.
미-소 냉전시대. 폐쇄적인 독재자의 장기집권을 겪어야 했던 알바니아. 그 여파 때문일까. 아직도 경제적 측면에선 열악함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보기에도 흐뭇한 미소를 만면에 머금은 사람들의 표정과는 달리 수도인 티라나의 건물들은 페인트칠이 벗겨져 을씨년스럽게 보였고, 대중교통 시스템도 열악했다. 깔끔하게 청소된 거리 역시 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내부와 외부가 두루 완벽하고, 정신과 물질 모두에서 행복한 나라가 지구 위에 얼마나 있을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내부'와 '정신'에 방점을 찍고 싶다. 알바니아 사람들도 그런 것처럼 보였다. 가난 속에서 웃을 수 있는 것,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제아무리 종교에 모든 것을 기대어 사는 사람들일지라도.
스칸데르베그 광장, 미국인에 대한 편견을 깨다알바니아는 아직까지 여행자가 그다지 많지 않은 나라. 내가 머문 호스텔의 손님은 10여 명 남짓이 전부였다. 대부분이 독일이나 슬로베니아, 몬테네그로와 오스트리아 등 인근 유럽 국가에서 온 청년들. 20대 초반인 그들은 내 옆 테이블에서 콜라와 주스를 나눠 마시며 그간의 여행 경험들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 청년들과 조금 떨어져 발코니 의자에 혼자 앉아 책을 읽는 한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훌쩍 큰 키에 갈색 장발. 호감이 느껴지는 인상이다. 게다가 나이가 나와 비슷해 보여 더욱 친근감이 생겼다. 마흔 살 '나홀로 여행자'는 젊은 친구들 사이에서 가끔 외로운 법이다. 다가가 먼저 인사를 했다.
미국 워싱턴에서 왔다는 그는 정치인들의 연설문을 대필해주는 것이 직업이라고 했다. "어떤 정치인들의 연설문을 대필해주느냐? 공화당 쪽이냐, 아니면 민주당이냐"고 물었다. 웃는 얼굴로 그가 답했다.
"내가 조지 부시를 좋아할 사람으로 보이나? 공화당은 아니고 민주당 쪽 정치인을 돕는다."내 서툰 영어와 그의 매끄러운 영어가 오가며 대화가 이어졌다. 이라크에서의 미군 철수 문제와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파키스탄에서 사망한 오사마 빈 라덴과 친이스라엘로만 내달리는 미국의 중동정책까지 화제가 자못 심각했다.
한국말로 한다고 해도 결코 쉽거나 가볍지 않은 주제. 엉터리 외국어로 단어만을 조합해 의견을 말하는 나야 남들 보기에 우스웠겠지만, 그걸 귀 기울여 들어주고 가장 쉬운 단어와 문장으로 자기 의견을 피력하는 그의 배려는 대단했다.
"내 영어가 형편없어서 이해하기 힘들지 않냐"고 물으니 돌아오는 답이 근사하다. "괜찮다. 남의 나라 말 아닌가. 네가 나보다 낫다. 나는 한국어를 한 마디도 못 한다." 내가 품고 있던 선입견 중 하나가 '미국인은 오만하고,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이었다. 그 선입견의 한 귀퉁이가 무너지던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