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많은 할망당 있는 마라도... 잠수 타고 싶으면 와

[서울처녀 제주착륙기⑩] 마라도, 애기업개 할망당 이야기

등록 2013.01.09 18:35수정 2013.03.18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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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도로 가는 배위에서 보이는 모슬포항 ⓒ 조남희


"내일 못 나올 수도 있습니다."


모슬포항 대합실의 직원이 하는 말이다. 새해 둘째 날, 나는 마라도 가는 표를 끊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설마 못 나오기야 하겠어?' 이게 내 생각이었다.

모슬포항에서 마라도까지는 여객선으로 불과 삼십여 분 거리다. 선상에서 보이는 선명한 산방산과 한라산의 모습을 넋 잃고 바라보다 보니 금세 내릴 때가 됐다. 배 안에는 우리 일행 여자 셋 이외에 남자 셋이 있어서 안심이었다. 그러나, 마라도 선착장에 도착했을 때, 내린 일행은 우리뿐이었다. 알고 보니 남자 셋은 직원들.

살짝 불안한 느낌이 왔다. 배에서는 불과 세 명이 내렸지만 타는 사람은 150여 명은 되어 보였다. 우리 배는 섬에 있는 사람을 싹 다 긁어서 멀어져갔다.

배에서 내려 금빛 잔디의 마라도를 걸어가는데,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한 중국음식점이 8개 정도 있었다. 민박도 있고, 최근에 생긴 듯한 게스트하우스, 펜션도 있었다. 편의점도 하나 있다. 

그런데 가만보니 무엇 하나 문을 열지 않았고, 사람 하나 없다. 관광객들을 가득 태운 마지막 배가 떠난 순간, 마라도는 절간이 됐다. 이럴 줄은 몰랐는데, 그 유명한 마라도 짜장면 한 그릇 먹을 수 없다니.


"근데 우리 오늘 묵을 곳은 어디예요?"

일행에게 물었다.

"기원정사라는 절이야."

이럴수가. 나는 심지어 절간 속의 절간으로 걸어 들어가야 했다. 우리가 묵을 곳은 마라도 끝 언저리에 있는 기원정사라는 절. 기원정사에는 '자발적 유배의 시간, 마라도 창작 스튜디오'라는 건물이 있다. 외부와 단절된 섬에서 창작에 매진하려는 작가들이 주로 머무르는 곳이다.

'자발적 유배의 시간'이라는 건물 간판의 문구를 보는 순간, 생각했다. 내게는 비자발적 유배의 시간이 될 수도 있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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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도 창작 스튜디오의 모습 ⓒ 조남희


창작 스튜디오에 들어서자 한기가 느껴졌다. 묵고 있는 작가는 없었다. 한동안 사람이 머물지 않은 느낌이었다. 뭔가 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짜장면 한 그릇 나가서 사 먹을 수 없고, 딱히 할 일이 없었던 우린 공양간이 있는 갤러리에서 귤을 까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마라도에는 할망당이 있다. 애기업개 할망당이다.

'전설이라는데, 사실 실화야. 150여 년 전에 해녀들이 모슬포에서 배를 타고 마라도에 물질을 하러 들어왔지. 먹고 살긴 힘들고, 물질은 해야 하고 우는 애도 봐야 하니, 물질 하는 동안 애를 봐 줄 열네살 짜리 '애기업개' 여자아이도 같이 태워서 들어왔어. 그런데 며칠째 풍랑이 너무 세서 섬을 나갈 수가 없는 거야. 상군 해녀가 꿈을 꿨는데 애기업개를 제물로 바쳐야만 바다가 잠잠해져 나갈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모두 죽을 거라는 거야. 결국 사람들은 마음이 아프지만 그 열네살 짜리 애기업개를 두고 가기로 했어.

"느가 려강 저 지성귀 거뒁 오라"(네가 달려가 저 기저귀 거둬 오렴) 바위에 걸린 기저귀를 가지러 애기업개가 간 사이에 사람들은 애기업개가 목놓아 부르는 소리를 뒤로 하고 노를 젓고 떠나버렸어. 풍랑은 과연 잠잠해져서 해녀들은 나갔지. 계절이 바뀌어 봄이 되어 사람들은 다시 마라도로 갔어. 그리고 모슬포가 보이는 언덕에 앉은 자세로 뼈만 남아 죽은 애기업개를 발견했지….'

어느 섬에나 있기 마련인 이야기긴 하다. 그러나 마라도 해녀들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수시로 애기업개 할망당에 가서 제를 올린다. 섬에는 절도 있고 교회도 있지만 말이다. 그들이 주로 할망당에 가서 비는 건, 아마도 효과가 제일 컸기 때문일 듯싶다.

이튿 날 아침이 밝았다. 모슬포항에 전화를 해봤지만 역시 종일 결항이다. 이렇게 되면 마음을 접는 것이 낫다. 고요한 가운데 책을 보며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다 밖에 나가보니 마라도의 바람 세기는 본 섬에서 맞는 바람과 또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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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마라도 ⓒ 조남희


섬 전체가 텅 빈 것 같다. 아무도 없고 나 홀로 있는 섬. 대한민국 최남단 마라도는 30여가구 80여 명이 사는 섬이라는데, 주민들은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크지 않은 섬이기에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한 시간 정도를 머무르며 짜장면을 먹고 다시 배를 타고 떠난다. 

인적을 찾을 수 없는 섬은 비할 바 없이 적막하고 고독하다. 조금 쓸쓸하긴 하지만 눈 앞에 펼쳐진 금빛 잔디와 해안가 절벽의 절경, 무한한 망망대해를 전세낸 듯이 감상하는 시간이 좋다. 나는 어느 새 애기업개가 된 듯이 사방팔방 섬을 헤매고 있었다.

애기업개당에 환타라도 하나 사서 바쳐야겠다고 생각해 편의점에 들렀지만 문을 두들겨도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열네 살 아이였기 때문에 술을 바치면 안 되고 단 것을 바쳐야 한다는데 말이다.  

결국 빈 손으로 찾은 할망당에서는 산방산이 선명히 바라다보였다. 모슬포가 눈에 들어온다. 눈 앞에 잡힐 듯이 펼쳐진 곳에 살던 마을이 있는데 섬을 나갈 수 없었던 애기업개의 안타까움이 전해져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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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기업개 할망당의 모습 ⓒ 조남희


열네 살 짜리 아이를 혼자 남겨두고서라도 섬을 나가야했던 사람들. 모질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했을까. 150년 전 일이란 말도 있고, 수백년 전이란 말도 있다. 전설이란 본디 이렇게 언제 일어난 일인지 정확하지는 않을테다. 하지만 모질었던 사람들의 마음은 당시 섬 사람들의 모진 삶을 반영하는 것 같았다.

화산섬이기 때문에 제주도의 땅은 농사에 적합한 비옥한 땅이 못된다. 섬 사람들의 생활은 항상 넉넉지 않았다. 해녀들은 농사를 지으면서 또 차디찬 물에 들어가 소라, 전복, 톳을 채취하며 가정 경제를 책임지는 가장 역할을 해야했다.

조선시대에는 관리들의 수탈에 시달려 이재수의 난을 비롯 생존권을 위한 민란이 줄지어 일어났다. 해녀들은 어떻게든 섬을 나가야했을 것이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며 적막한 섬에서 다시 하루를 보냈다. 

"사람들이 이렇게 왔다가 나가면, 더 쓸쓸해지지 않으세요?"

절을 지키는 보살님에게 물었다. 그는 그저 헛헛한 웃음을 짓고 만다. 묻는 내가 괜히 머쓱하다. 다시 다음 날 아침, 일행의 외침 소리에 눈을 떴다.

"고깃배가 하얗게 떴져!"(고깃배가 하얗게 떴어!) 

고깃배가 떴다면 우리가 나갈 배도 틀림없이 들어올테고, 관광객은 다시 구름처럼 몰려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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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정사의 불상들이 배들을 바라보듯 섰다. ⓒ 조남희


밖에 나가보니, 절 앞 바다에 하얗게 뜬 배들이 반갑다. 크고 작은 불상들이 바다에 뜬 배를 축복하는 듯하다.

절 입구의 불상들은 절에 들어서는 사람들을 맞이하기 위해 서 있는 줄만 알았는데. 마치 모진 풍랑 속의 뱃사람들을 걱정하고 지켜보기 위해서 서 있는 것 같았다. 우리가 무사히 섬을 나갈 수 있도록 지켜봐 줄 부처님과 불상들을 뒤로 하고 절 밖을 나섰다.

환타 하나 단에 놓지 못해 미안했던 애기업개 할망에게도 마음속으로 안녕을 고했다.

'다음에 올 때는 바로 나가게 해주세요.'

배가 사람들을 가득 채우고 와서 마라도에 쏟아놓는다. 사람들은 한 시간 정도를 머무르며 짜장면을 먹고 섬을 나갈 것이다. 어쩌면 애기업개 할망은 외로움때문에 우리에게 좀 더 머무르라고 한 것 같다. 마라도는 작은 섬이지만 천천히 돌아보며 사색을 하기에 좋은 곳이다. 한 시간만 머무르고 떠나버리기보다는 하루이틀 정도 자발적 유배의 시간을 갖는 것도 나쁘지 않을 성 싶다.

함께 나가려던 보살님은 망설이다 끝내 나가지 않는다. 혼자 돌아오는 길이 쓸쓸하다며.

"잠수 타고 싶을 때 와."

그러겠다고 약속하며 모슬포로 가는 배를 탔다. 배는 물살을 가르며 잘도 간다. 
#제주도 #마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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