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관 출신' 총리 발탁, 박수칠 일일까

[역사에세이 55] 경륜·리더십 겸비한 적임자 찾아 믿고 맡겨야

등록 2013.01.18 14:07수정 2013.01.18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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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의 초대 국무총리로 조무제(72) 전 대법관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다. 조 전 대법관은 '청백리의 상징'으로 불리는 분으로 그는 퇴임 후 전관예우를 거부하고 모교인 부산 동아대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조 전 대법관이 총리로 적절한 인물인지 여부를 떠나 그의 이름이 거명되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기는 견해도 있다.

조 전 대법관 이외에도 하마평에 오르는 인물들이 몇몇 더 있다. 첫 여성 대법관 출신인 김영란 전 국민권익위원장, 최근 중앙선관위원장직을 사임한 김능환 전 대법관, 인수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용준 전 대법관, 새누리당 정치쇄신특위위원장을 지낸 안대희 전 대법관, 그리고 헌재 소장으로 조만간 임기가 끝나는 이강국 전 대법관 등도 총리 후보로 거명되고 있다. 

'민생 살리기'를 대표적 공약으로 내건 박근혜 정부의 첫 국무총리는 경제전문가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다. 그러나 최근 발표된 정부조직 개편안에서 '경제부총리제'가 부활하면서 총리는 '관리자형 인물'로 방향이 전환됐다는 후문이다. 그러면서 각계에서 존경받는 원로급 인물들이 총리 후보로 하마평에 오르고 있다는 것이 대체적인 분석이다.

영욕의 세월 보낸 사법부 그리고 대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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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초구 대법원 청사. ⓒ 권우성


대법관은 최고법원인 대법원의 법관으로, 대법원장을 포함해 전체 14인으로 구성된다. 대법관의 자격은 15년 이상 판사·검사·변호사 또는 법률이 정하는 '이에 준하는 직'에 있던 40세 이상의 자이며, 대법원장 제청으로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 임기는 6년. 자격요건 등으로 보면 대법관은 법관 중의 법관이요, 우리 법원의 상징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 독재정권 하에서 사법부는 독자적인 영역과 권능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했다.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독재 권력자들은 사법부까지 장악해 법정의 권위마저 깔아뭉갰다. 그로인해 조작간첩사건 등 수많은 시국사건에서 재판부는 권력자의 입맛에 맞는 판결을 내렸다. 때문에 '사법살인'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한때 우리 사법부는 '권력의 거수기'라는 오명과 함께 따가운 비판을 감수해야만 했다.

독재 권력의 사법부 농단은 '대법관'도 예외가 아니었다. 대법관의 격무를 덜어주기 위해 1959년 1월 대법관 아래 '대법원 판사'를 뒀다. 그런데 박정희 쿠데타 세력은 쿠데타 3개월 뒤인 1961년 8월 법원조직법을 개정해 '대법관'의 명칭을 '대법원 판사'로 바꿨다. 말하자면 대법관을 하향·격하시켜 대법관의 권위를 깎아내렸으며, 유신 시절 이후로는 재임용 제도를 만들어 권력의 입맛대로 임명하기도 했다.


비록 퇴임한 전직이라고 해도 법조인의 정계(행정부 포함) 진출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 대법원장이나 대법관 출신이라면 더욱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이는 3권 분립을 강조하고 있는 대한민국 권력체계에서 사법부의 독립성과 권위를 훼손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국민의 대의기구인 입법부는 상대적으로 문제가 적은 편이나 이 역시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약력 첫 줄이 '대법원장', 정치 근처 가지 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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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 오전 서울 삼청동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김용준 인수위원장 주재로 전체회의가 열리고 있다. 김용준 위원장이 회의도중 안경을 고쳐쓰고 있다. ⓒ 인수위사진기자단


인수위원장 발표가 있은 지난해 12월 27일 한인섭 서울대 법대 교수는 트위터에 올린 글을 통해 "약력의 첫 줄이 '대법원장' '헌법재판소장'인 분은 정치의 근처로 발 디디지 않았으면 한다"며 "사법부의 독립성·중립성을 위한 장기적 신뢰를 축적하기 위해서는 '전직'도 가치 있게 기여해야…. 그들이 있을 곳은 소수자 옹호와 교육적 봉사일 것"이라며 김용준 인수위원장 임명을 겨냥해 따가운 비판을 가했다.

김용준 인수위원장은 법조계의 상징적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어릴 적 소아마비로 지체장애 2급 판정을 받은 장애인 출신으로 1957년 제9회 사법시험에서 최연소 수석합격에 서울대 법대 수석졸업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인물이다. 서울고법 부장판사·서울가정법원장을 거쳐 1988년 대법관에 임명됐고, 1994년에는 다시 헌법재판소장에 임명돼 2000년 9월 6년 임기를 마치면서 법조인 생활을 마감했다.

보수성향의 김 전 대법관은 지난해 박근혜 캠프에 영입돼 새누리당 중앙선대책위 공동위원장을 맡았다가 이번에 다시 인수위원장에 발탁됐다. 그의 인수위원장 발탁을 두고 앞서 한인섭 교수가 제기한 비판과는 또 다른 측면에서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새누리당 유승민 의원은 "(김 인수위원장은) 무색무취하다, 인수위를 너무 친정 체제로 끌고 가면 잘못된 방향으로 가더라도 충언을 할 참모가 없게 된다"고 지적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영남일보> 1월 1일 치 인터뷰).

'정치 초년생'인 김 전 대법관은 박근혜 선대위 해단식에서 "평생 동안 정치에는 전혀 관여할 일이 없었고, 또 관여하리라고 꿈에도 생각한 일이 없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박근혜 당선인의 권유로 선거대책위원장직을 맡게 됐다"며 "전혀 모르던 정치판에 관여를 하면서 여러분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고 앞으로 남은 삶이 얼마가 될지 모르지만 제 삶에 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고 소회를 밝힌 적이 있다. 그는 현재 총리 후보로도 거명되고 있다.

박근혜 당선인은 김용준 인수위원장 말고도 또 한 명의 전직 대법관을 곁에 두고 있다. 검사 출신으로 참여정부 시절 대검 중수부장을 지낸 안대희 전 대법관이 바로 그다. <중앙일보> 네트워크 분석에 따르면, 안 전 대법관은 전원합의체에서 가장 많은 보수적 의견을 낸 대법관으로 꼽혔다. 2006년 대법관에 임명돼 2012년 퇴임한 그는 지난해 새누리당 정치쇄신특위위원장을 맡아 검찰개혁 등 정치개혁을 주도하고 있다.

'방탄 총리'로 불렸던 총리... 아닌 예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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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 선생 생전의 모습 ⓒ 가인연수관

물론 대법관이나 대법원장 출신 가운데 정계로 진출한 사람이 전혀 없진 않았다. '법조인의 표상'으로 불리는 가인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도 말년에 잠시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한 적이 있다.

1957년 정년퇴임한 가인은 재야 법조인으로 활동하면서 이승만 독재정권과 각을 세우며 싸웠다. 법관회의에서 대법원장 제청권을 없애려는 이승만 정권을 규탄했으며, 1959년 이승만 정권이 <경향신문>을 폐간시키자 비판 글을 쓰기도 했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가 발생하자 박정희의 민정 참여를 반대하는 글을 발표했으며, 야당 지도자들과 함께 군정의 종식을 촉구하기도 했다. 급기야 가인은 정치일선에 직접 나서기도 했다.

1963년 민정당(民政黨) 대표최고위원과 '국민의당' 창당에 참여해 대표최고위원을 지냈으며, 당시 야권의 윤보선·허정 등과 함께 야권통합 및 단일후보 조정에 나서기도 했다. 가인의 이같은 정치활동은 권력욕보다는 반독재 투쟁으로 보는 게 오히려 타당할 것이다.

출신(전직)을 떠나 역대 총리 가운데 국무위원 임명제청권을 실지로 행사하고 내각을 장악한 '총리다운 총리'는 참여정부 시절의 이해찬 전 총리 정도를 꼽는다. 대다수의 총리들은 정권의 국면 전환용 '방탄 총리'거나 아니면 일회용 '얼굴 마담'이 대부분이었다. '1인지하 만인지상'으로 불리는 총리가 하는 일이라곤 대통령의 연설문을 대독한다고 해서 '대독 총리'라는 말까지 생겨났던 걸 보면 과거 역대정부에서 총리의 위상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김황식 현 총리 역시 대법관 출신으로 광주지법원장·대법원 행정처 차장을 거쳐 2005년 11월부터 대법관을 지냈다. 이후 곧바로 감사원장에 발탁돼 만 2년간 근무한 뒤 김태호 내정자의 낙마로 2010년 10월 제41대 국무총리에 올랐다. 전형적인 관료 출신 이미지의 김 총리는 전남 장성 출신으로 소위 '호남 총리'다. 그러나 그가 호남 지역을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보는 사람은 별로 없다. 박근혜 당선인이 내걸었던 '호남총리론'은 '정치적 수사'에 불과할 뿐이다.

김 총리와 비슷한 경력의 소유자로 한나라당 대표와 2002년 한나라당 대선후보를 지낸 이회창 전 총리를 들 수 있다. 서울민사지법과 서울고법 부장판사를 거쳐 1981년 최연소 대법원 판사('대법관' 전신)으로 임명된 그는 1988년 대법관에 임명돼 사실상 대법관을 두 차례나 지낸 셈이다. 이 전 총리는 법관 재직 시절 독재정권의 입맛에 맞지 않는 이른바 '소수의견'을 많이 낸 걸로 유명한데 이 때문에 '대쪽 판사'라는 별명을 얻게 됐다.

한편, 이 전 총리는 문민정부 출범 직후인 1993년 3월 감사원장을 맡게 됐다. 취임 후 그는 그간 '성역'으로 일컬어지던 청와대 비서실은 물론 '율곡사업' '평화의 댐' 등과 관련해 국방부에 대한 감사를 강행했으며, 심지어 전두환·노태우 전직 대통령에 대해 서면조사를 벌이기도 했다. 1993년 12월 국무총리에 임명된 그는 역시 '법대로'를 주장하면서 헌법에서 위임된 총리의 권한을 행사하려고 노력했다.

이 때문에 그는 김영삼 측근들과 갈등을 빚게 되었고 심지어 김영삼과도 수시로 충돌했다. 결국 김영삼 조차 이 전 총리를 부담스러워하게 됐고, 사임 형식으로 해임하려 했다. 그러자 그런 분위기를 감지한 이 전 총리는 "법적 권한도 행사하지 못하는 허수아비 총리는 안 한다"며 국무총리 취임 127일만인 1994년 4월 사표를 내고 말았다. 이로써 이 전 총리는 '대쪽'이라는 이미지를 국민들에게 다시 한 번 각인시켰으며, 동시에 큰 인기를 끌었다.

박근혜, 이미지만으로 정치개혁 이룰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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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지난 16일 서울 통의동 금융감독원 연수원 내 집무실에서 커트 캠벨 미국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 등 미 대표단를 접견하기 위해 들어오고 있다. ⓒ 인수위사진기자단


박근혜 당선인은 '책임총리제'를 수차례 공약한 바 있다. 박 당선인이 이 약속을 제대로 지키려면 적임자를 뽑아 관련법을 제대로 지키기만 하면 된다. 저명한 명망가나 대법관 출신 등 소위 기존 정치에 물들지 않은 사람이 총리가 돼 분위기를 바꿀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지만으로 정치개혁을 이뤄낼 수는 없다. 문제는 좋은 사람을 뽑아 그를 믿고 내각을 맡기는 게 중요하다. 이회창 전 총리의 예가 반면교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총리는 '정치인'이라기보다는 '행정가'라고 할 수 있다. 박근혜 정부에서 기대되는 총리의 역할이 '관리형'이라면 더더욱 그렇다고 본다. 그렇다면 '총리감'으로서의 경륜과 리더십을 겸비한 인재를 널리 구해야 한다. 법치와 이미지를 앞세워 '대법관 출신'을 선호하다가는 자칫 '허수아비 총리'를 탄생시키고 말지도 모른다. 겨우 1~2년 정도 하게 될 총리를 뽑기 위해 사법부의 독립성을 저해하는 행위는 마땅히 자제돼야 할 것이다.
#국무총리 #책임총리제 #대법관 #조무제 #이회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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