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밤 찾아오는 할머니 "우리 아들 언제 만날껴?"

[서울처녀 제주착륙기 11] 할머니의 아들 장가 보내기 프로젝트

등록 2013.01.29 10:09수정 2013.03.18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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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나가기만 해도 한라산이 이렇게 보인다. ⓒ 조남희


제주에 독감이 유행이라더니, 몸도 무겁고 머리도 아픈 늦은 저녁. 누군가 우리 대평리 집 문을 쾅쾅쾅 부서져라 두들긴다. 이상하다. 우리집 대문을 두들기는 사람은 택배 아저씨가 유일한데, 이 시간에?


금방 인터넷으로 지른 밥상이 벌써 육지에서 바다를 건너 왔을 리도 없는데 말이다. 화들짝 놀라 문을 빼꼼히 열어보니 웬 할머니가 서 계신다. 농사일에 까맣게 탄 주름진 얼굴. 그렇지만 왠지 귀엽고 사람좋은 인상을 하신 얼굴의 할머니다. 문제는, 처음 보는 할머니다.

"여기 혼자 살아?"
"네. 그런데 무슨 일이신지…."

뭐라고 말씀을 하시는데 잘 알아들을 수가 없다. 아, 어르신들이 하는 제주말은 아직 어렵다. 춥다며 안으로 밀고 들어오시는데 아차 진작 안으로 모실 걸 싶다가도 당황스럽다. 며칠 치우지 않아 엉망인 집안이 부끄럽다. 보일러를 꺼 둔 터라 전기장판에라도 들어와 앉으시라 했는데 됐다며 그냥 문간에 앉으신다. 나는 왠지 모르게 죄송스러워서 그 옆에 무릎을 꿇고 있다.

"어디서 왔어?"
"서울에서요…"  
"여기서 뭐하는데?"
"그냥 이것저것 하는데요."
"나이는 몇이고?"
"올해 34살이 됐는데요."
"아버지는 계시고? 형제는?"  
"서울에 계시고요. 어머니도 계시고요. 오빠랑 저랑 있는데…. 오빠는 결혼해서 애가 있고요."
"우리 아들이 39살인데… 여기 (주인집)아줌마가 그러는데 처녀가 있다 그래서. 한번 만나봐. 수학 가르치러 다녀. 농사도 짓고. 땅도 있고. "

"남자가 성격이 요망져야지..." 할머니의 선자리 제안


이게 대체 무슨 대화란 말인가.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이 밤에 앞 집 사시는 할머니가 아드님을 소개하기 위해 오신 것이다.

"얼굴을 볼 게 아니라 남자가 성격이 요망져야지(제주말로 요망지다는 말은 똑똑하고 야무지다는 뜻이다.) 그럼 여자는 따라가면 되는거야."
"아, 예…;;;;;" 
"오빠한테 커피 한잔 사주세요 하고 당장 내일이라도 만나봐. 몇 시에 시간되는데?"
"아…. 그게요…."

성격 참 급하시다. 아, 이것참. 이걸 어떡해야 하나. 어쩔줄 몰라하다가 할머니 면전에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닐 것 같아 우선 오마이뉴스 명함을 주섬주섬 꺼내 건네드렸다.

"여기로 연락주시라고 해주세요."

할머니가 알겠다며 명함을 들고 들어가신 뒤, 갑자기 벌어진 황당한 상황에 헛웃음이 났다. 마을에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일까. 교회 집사이신 엄마가 물고 오는 선자리와는 정말 다른 접근방식이구나 싶다. 혼자 알고 있기엔 너무 재밌는 일이라고 생각해 당장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그래서 만날 거야?" 
"응, 연락오면 그냥 만나보지 뭐, 동네에 아는 총각 하나 있음 좋잖아, 가끔 명물식당 가서 소라구이에 한라산도 한 잔 하고. "

그리고 호되게 혼이 났다. 말하자면 이건 일종의 선자리인데, 진지하게 만날 생각도 없으면서 만나는 건 그 총각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 더불어 할머니에 대한 예의도 아니라는 것.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잘 한번 생각해봐."

친구의 목소리가 차갑다.

"그게 그렇게 심각한 만남은 아니잖아. 그냥 가볍게 만나서 술 한잔 하고 친구먹을 수도 있는 거지."
"그건 네 생각이지."

그렇게 항변하다 너 정말 실망스럽다며 욕만 먹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화가 치밀어 집에 있는 한라산 소주와 맥주를 섞어 소맥을 연거푸 석잔 원샷했다.

'내가 정말 잘못하는 건가.' 

쓰린 속보다 더 쓰린 건 인정해야 할 나 자신이었다. 그래, 인정할 건 인정하자. 진지한 생각은 없이, 그저 재밌다는 생각으로 사람을 만나고, 할머니의 진지한 마음을 우습게 만들 뻔 했다는 걸. 재미있는 얘깃거리 하나 건졌구나 싶었던 마음을 말이다. 만나지 말아야겠다. 그것이 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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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차려주신 저녁상. 이웃집 할머니도 마침 오셔서 함께 나를 '검증'하셨다. ⓒ 조남희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다음날 저녁 또 누군가 문을 쾅쾅 두들긴다. 어제 오신 할머니가 서 계신다. 이번엔 신발 벗고 성큼 안으로 들어오셔서 자리를 잡으신다. 귤을 한아름 안겨주신다.

"저녁 먹었어?"
"아뇨, 아직."
"우리 집에 가서 비빔면에 소주라도 먹어."
"… 지금요?"

망설이다 결국 따라나섰다. 들어서보니 아늑한 농가주택이다. 그런데 아뿔싸. 아들로 보이는 총각이 누워있다가 날 보고 황급히 일어나더니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고 밖으로 나간다. 서로 예상치 못한 어색한 눈인사. 할머니가 주방으로 들어가시더니 비빔면에 아강발(족발의 일종)에 한라산 소주로 한 상 내오신다.

또 다른 안주는 마을 돌아가는 이야기다. 마을 바닷가 포구에 들어온다는 가두리양식장 주민반대 이야기, 마을에 외지인들이 들어와 사는 것에 대한 이야기 등 마을 돌아가는 일들을 안주삼아 염치불구하고 할머니와 소주 반병을 비웠다.

마침 마을의 다른 할머니도 방문하시어 함께 나를 '스캔'하셨다. 이웃 할머니가 더욱 매서운 매의 눈으로 '검증'을 들어가셨구나, 생각했다. 이젠 안 오시겠지. 소주를 한 병 확 비워버릴 걸 그랬나.

하지만 할머니는 어김없이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오셨다. 손에 한라봉을 들고, 떡을 들고.

"우리 아들 언제 만날거야?" 
"아, 그게요." 

할머니의 아들 장가보내기 프로젝트는 진행 중이다. 꾸준하고 성실하게. 정작 본인들은 제대로 얼굴 한 번 마주해보지 못했는데 말이다. 아들 되는 분은 별 생각이 없는 것 같지만, 어쨌든 예상치 못하게 시작된 할머니의 밤마실은 내가 총각을 만나봐야 일단락 될 것같다.  

별로 결혼 생각 없는 나, 결론 없는 만남이 되겠지만 할머니의 좋은 말벗으로는 남고 싶은데, 고민이다. 쾅쾅쾅, 할머니의 문 두들기는 소리는 오늘 밤도 나를 놀라게 할 것 같다.
#제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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