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다 보니 외롭더라고"... 나 혼자 만족해서 무엇하랴

[나와 함께 걷는 산티아고 길 36] 레이-아르수아

등록 2013.01.27 16:20수정 2013.01.27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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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쁜 걸음으로 모두 떠난 카미노에 가장 늦은 속도로 걷고 있는 문군. 로이를 만나 그나마 외롭지는 않았다.
바쁜 걸음으로 모두 떠난 카미노에 가장 늦은 속도로 걷고 있는 문군. 로이를 만나 그나마 외롭지는 않았다. 문종성

카미노에서 만나는 이들은 크게 부르주아 순례자와 프롤레타리아 순례자로 나뉜다. 전자는 하루 한 끼 이상 순례자 식단을 주문하며 가격보다 편의에 우선순위를 두어 알베르게를 선택한다. 후자는 대개 빵이나 간단한 먹을거리로 끼니를 해결하고, 저녁 식사는 웬만하면 재료를 구입해 직접 요리해 먹는다. 알베르게를 고르는 우선순위는 당연히 가격이다. 혹 무료 알베르게가 있다면 무리는 아닐까 하는 거리까지 불타는 집념으로 걸어간다.

문군은 당연히 후자다. 오늘 루트의 절반을 갓 넘은 멜리데(Melide)까지 올 동안 그가 먹은 건 빵 쪼가리 뿐. 이 지역 명물인 문어 요리로 충만한 미각의 기쁨을 누릴 만도 한데 끝까지 고집이다. IMF 파고에 혼쭐이 난 가난한 대학 새내기 시절부터 몸에 밴 절약정신은 어지간한 배고픔에도 배는 물로 채우고, 가슴은 꿈으로 채우는 회의적 낭만주의를 견지해 왔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하루 한 끼에도 제법 잘 견디는 체질이란 걸 알았던 게. 그럼에도 엥겔계수는 속절없이 높다는 걸 깨달았던 게.


걸음을 재촉한 다른 순례자들은 이미 앞서 가 있는 상태다. 혼자 남은 문군은 산 페드로 교회 맞은편에 위치한 빵집 간판을 힐끗 쳐다본다. '빵을 먹을까 말까, 먹는다면 어떤 걸 선택할까' 시답잖은 고민만으로도 횡단보도 색깔이 몇 차례나 바뀐다. 결국 루비콘 강을 건넌 줄리어스 시저의 결연한 심정으로 보무도 당당하게 빵집 문을 열어젖힌다. 바깥과는 다르게 덥혀진 온기가 훅 끼친다. 순례자를 알아본 점원의 상냥한 물음에 그는 긴장을 풀며 나지막하게 속삭인다.

"바게트 하나요."
"바게트 하나요?"

가청주파수를 훌쩍 넘는 친절함으로 주문을 확인하는 점원의 상냥한 태도가 문군은 자못 당혹스럽다. 그리고 이어지는 질문, 

"또 다른 건요?"
"아…. 없어요."

이럴 땐 꼭 크게도 들린다. 문군은 괜히 민망하다. 그는 이제 갓 구워 나온 따끈따끈한 바게트를 두 손으로 넙죽 받아들고 교회 앞 스톤 벤치에 앉는다. 겨우 바게트 하나 먹는 문제로 내적 요란을 떨더니 추위에 바들바들 떨고, 빵가루까지 흘려가며 먹는 모습이 청승이다.


"좋아하는 여자애가 있어"... 20대에 사랑이 빠지면 무슨 재미인가

 필리핀계 스위스인 로이가 두 번째 산티아고 순례 중에 처음 만난 순례자는 필자다.
필리핀계 스위스인 로이가 두 번째 산티아고 순례 중에 처음 만난 순례자는 필자다. 문종성

찬바람 맞은 바게트는 금세 타이어처럼 질기고 딱딱해진다. 오만인상을 찌푸리며 송곳니로 갈기갈기 찢어 겨우 반쯤 억지로 배에 밀어 넣었을 때, 그의 앞으로 한 영혼이 천근은 되어 보이는 그림자를 끌고 간다. 가방을 보아하니 분명 순례자 차림인데 처음 보는 얼굴이다. 어쨌거나 반가운 순간, 문군은 격려의 말을 인사로 갈음한다.


"부엔 카미노."
"아, 안녕하세요."

그저 인사 한 번 건넸을 뿐인데 처져 있던 어깨가 들썩, 흐려있던 눈망울엔 생기가 돈다. 마치 누군가의 부름을 기다렸다는 듯 가던 걸음이 문군 앞에 멈춰 움직일 줄 모른다. 다시 통성명을 나누고 찬찬히 훑어보니 겨울바람이 때리고 간 얼굴엔 지친 표정이 역력하다. 로이(Loy), 스물다섯의 필리핀계 스위스 친구다. 이번이 두 번째 산티아고 순례로 작년에 중단한 레온부터 다시 여정을 시작하는 중이란다.

"좋아하는 여자애가 있어. 우린 둘 다 에니메이션에 관심이 많거든. 에니메이션에 대해 얘기하다 정이 들었지 뭐야. 물론 예쁘기도 하지. 그 친구는 아직 내 마음을 잘 몰라. 걘 필리핀에 살고 나는 스위스에 살잖아. 거리가 머니까 보고 싶을 땐 괴롭기도 해. 2년에 한 번 보는 걸론 충분하지 않아. 가끔 스카이프(인터넷 전화)로 연락하는데 어떻게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야 할지 고민이야. 올 여름에 필리핀에 갈 텐데 진지하게 대화해 보려고."

로이는 지갑 속에 고이 접어둔 사진을 꺼내 문군에게 보여준다. 사진 속엔 그보다 다섯 살 어린 여대생이 발랄하고 귀여운 표정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는 사랑에 빠져 있다. 이십 대의 화두에 사랑이 빠지면 그게 무슨 인생의 재미인가. 하지만 너무 먼 거리 때문에 고민은 더욱 깊어진다. 

"그녀 혼자 스위스로 오기는 힘들어. 이민을 올 수 있을 만큼 부유하지 않고, 온다 해도 할 일이 많지 않아. 더군다나 영어가 서투르니 제약이 많지. 그에 반해 난 가족 모두 스위스로 이민 왔지만 여차하면 내가 필리핀으로 갈 수 있어. 적응할 필요가 전혀 없으니까. 필리핀에서 에니메이션과 관련된 일로 먹고 살만하면 결심을 실행하는 건 문제가 안 될 거야."

그는 진지하다. 처음 만난 문군에게 속말을 털어놓는다. 누군가의 얘기에 마음을 열고 귀를 쫑긋 세워주는 길, 카미노를 한 번 걸으면 수십 가지 인생을 경험하고 이해하게 된다. 좋아하는 숙녀가 있는 게 어디냐며, 자신은 서른이 넘도록 기댈 마음 하나 없는 외로운 솔로란 문군의 푸념 섞인 한 마디에 입 다물지 못한 로이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위로한다. 그리고 더 이상 사랑 얘긴 스톱.

작은 마을 보엔테(Boente)에 도착한 건 오후 2시가 넘어서다. 아직 점심을 먹지 못한 로이를 위해 문군이 작은 카페로 인도한다. 순례를 하며 받기만 한 사랑,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니 발걸음이 가볍다. 바에 들어가자마자 거침이 없는 문군, 로이를 위해 케이크와 콜라를, 자신을 위해 콜라를 주문한다.

 레온 이후 처음으로 콜라를 마신다는 로이. 아는 사람만 아는 중독성 강한 콜라의 희열.
레온 이후 처음으로 콜라를 마신다는 로이. 아는 사람만 아는 중독성 강한 콜라의 희열. 문종성

"오, 문! 나 레온 이후 처음으로 맛보는 콜라야! 정말 마시고 싶었다고!"
"그 심정 내가 잘 알지. 세상에서 제일 쩨쩨한 게 목말라 죽겠는데 옆에서 혼자만 콜라 마시는 거거든. 콜라 없었음 카미노고 뭐고 다 때려 치웠을지 몰라. 고단함을 풀어주기 위해 마시는 포도주? 아니지, 새 힘, 새 느낌을 공급하는 청량감은 콜라밖에 줄 수 없거든. 로이, 목 타면 한 캔 더 따도 돼."

영혼을 힐링시키는 마법의 음료로 목을 축이고 잠시 산티아고 교회에 들어간다. 가톨릭 신자인 로이도 따라 들어와 마음의 안식을 기도한다. 별 뜻 없이 떠들어 본 방명록엔 앞서 간 반가운 글이 보인다.

 “나 지나감. 얼른 오삼. 돈까스 해놓고 있겠음.” 산티아고 성당 방명록에 남긴 반가운 글귀.
“나 지나감. 얼른 오삼. 돈까스 해놓고 있겠음.” 산티아고 성당 방명록에 남긴 반가운 글귀. 문종성

"나 지나감. 얼른 오삼. 돈가스 해 놓고 있겠음."

오호, 평소에도 맏언니처럼 순례자들을 잘 챙기던 재희가 반가운 메시지를 남겨두고 간 모양이다. 그녀는 뒤따라오던 순례자가 이 글을 읽으리란 걸 어떻게 확신했을까?

"혼자다 보니 외롭더라고"... 나 혼자 만족해서 무엇하랴

로이네 가족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비롯해 형까지 모두 간호사다. 필리핀 월급에 비해 40배를 더 받는 까닭에 다른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단다. 로이는 다르다. 그는 애니메이션이란 장르를 통해 다른 꿈을 꾸고 싶다. 낯설고 물 설은 땅에 와서 끊임없이 진로를 고민한 건 이민 1.5세대들이 겪는 공통된 성장통일 것이다. 카미노는 그에게 던져진 질문에 어떻게 반응해 주고 있을까?

"레온부터 여기까지 혼자 걸어왔어. 알베르게에서 매일 혼자 잤지. 먹는 것도, 자는 것도 혼자다 보니 외롭더라고. 춥기는 또 얼마나 춥던지. 가끔은 너무 무서워서 불 켜고 자기도 했다니깐.

 산티아고 성당 낮은 담벼락에서 따사로운 햇살 아래 잠시 오침을 취하는 로이
산티아고 성당 낮은 담벼락에서 따사로운 햇살 아래 잠시 오침을 취하는 로이 문종성

그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만약 내가 하려는 일이 스스로 고립된다면 큰 의미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 내가 애니메이션을 하려는 이유는 소통을 위한 거지 나 혼자만의 만족을 위해서가 아니야. 애니메이션은 큰 장점이 있어. 음악, 그림, 컴퓨터 등의 장르와 자유롭게 결합해 독창적인 메시지를 만들어낼 수 있지. 각 분야 전문가가 같이 만들어 내는 종합 예술작이 바로 애니메이션이거든. 그걸 만들어 웹에 올렸을 때 사람들의 공감을 얻으면 몹시 뿌듯해지지.

카미노에서 영감을 얻고 싶어. 생각하는 것들 중에 확실하게 정해진 것이 없어. 뭔가 확신을 얻을 계기가 필요해. 작년에 중도에 그만 둔 이 길을 다시 찾은 이유지. 그나저나 작년엔 순례자들을 제법 많이 만났는데 말이야. 네가 이번 카미노에서 만난 첫 카미노 친구야. 쑥스럽군."

오늘 목적지인 아르수아(arzua)에 도착할 때까지 둘의 대화가 끊이지 않는다. 들려줘야 할 얘기가 많고, 들어줘야 할 얘기가 많다. 해님만 알아채고, 달님만 몰래 엿들을만한 비밀도 서슴없이 나눈다. 물리적 생활권이 겹치지 않고, 새어나갈 염려가 없다. 오늘 깊은 정을 나누고 내일은 무엇도 기억하지 않을 테니까. 가끔 성기는 타이밍엔 낙엽 밟는 소리가 단단하게 여며준다. 첫 만남에 마음이 통하는 건 단지 같은 아시아인이어서 뿐만은 아닐 것이다.

 카미노는 많은 얘기를 들려주고, 많은 얘기를 들어준다. 함께 걷다 혼자 걷고, 혼자 걷다 함께 걷는다. 가장 중요한 건 나 자신과 함께 걷는다는 사실.
카미노는 많은 얘기를 들려주고, 많은 얘기를 들어준다. 함께 걷다 혼자 걷고, 혼자 걷다 함께 걷는다. 가장 중요한 건 나 자신과 함께 걷는다는 사실. 문종성

"와,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재희는 정말로 돈가스를 튀겨 놓고 있었다. 넉넉하게. 덕분에 로이는 산티아고 두 번째 순례 중에 처음으로 다른 이들과 함께 식사를 한다. 정말 외로웠었나 보다. 식사보다 한 마디 관심어린 질문에 뜨겁게 반응한다. 순례자들은 새롭게 합류한 로이를 카미노 동지로 기탄없이 환영한다. 함께 걷지만 혼자 걷고, 혼자 걷지만 함께 걷고 있는 이 길에서 다들 외롭고, 외로운 이들끼리 서로 위로하고, 그러면서 한 달을 버티어 오고 있다. 로이는 마지막 친구가 될 것이다.

식사 후 샤워를 마친 로이가 문군 옆 침대에 눕는다. 불 꺼진 숙소, 두 남자의 속삭임.

"처음으로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했어. 처음으로 사람들과 함께 잠을 자네? 고맙다."
"나한테 고마워 할 이유가 있어? 그냥 만난 건데 뭘."
"아니 그냥, 고마워. 모든 것이 고마워. 너도, 오늘 만난 사람들도, 지금 이 순간도…."

생각해 보면 문군도 모든 것이 고맙다. 로이가 고맙다는 말을 하니 더욱더 고맙다. 고마움을 잊지 않고 걸어가고 있어서 또 고맙다. 고마운 걸 생각하니 괜히 뭉클하다. 단 하나 고맙지 않은 건, 이 고마움을 곧 끝내야 한다는 것. 별을 보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향해 걸어온 길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덧붙이는 글 2012년 2월 8일의 기록입니다.
#산티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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