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질한 '공주병' 게임은 그만 하고 싶었는데...

[어느 불량한 부부의 불량한 여행⑤] 변덕쟁이의 최후

등록 2013.07.23 15:53수정 2013.07.31 16:04
0
원고료로 응원
지난해, 9개월 동안 남편(미국인)과 인도, 네팔, 동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다녀왔습니다. 한국에서만 평생 살아온 여자와 미국에서만 평생 살아온 남자가 같이 여행하며 생긴 일, 또 다른 문화와 사람들을 만나며 겪은 일 등을 풀어내려고 합니다. - 기자 말

a

팡코르의 석양. 더스틴이 그린 그림. ⓒ 이수지


페낭을 떠나기로 했다. 문제는 출발은 하는데 도착지가 없다는 거였다. 인도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까지는 아직 열흘 정도가 남아 있었다.


이렇게 큰 나라를 여행하는데 열흘이라니. 갈 곳이 너무 많아 어디를 가야할지 골머리를 싸매야 할 것 같지만 웬걸, 말레이시아의 전 국토는 설 연휴를 앞둔 휴가 분위기로 들끓고 있었고 어디를 가든 관광객으로 꽉 차 있을 것이었다.

우기라는 것은 여름에 있는 게 보통이지만 하필이면 우리가 지금 체류하고 있는 말레이시아는 겨울이 우기다. 덕분에 더스틴이 가고 싶다던 동부의 해변들은 아예 출입이 금지된 상태였다. 

설 연휴를 가족과 함께 보내지 않고 온 죗값이다.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은 타만 네가라(국립공원), 랑카위 섬, 태국 남부 섬 정도였다. 하지만 그곳들이라고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었다. 타만 네가라를 간다면 설 연휴로 몰려든 관광객들과 우기로 불어난 거머리들 때문에 발 디딜 틈이 없을 것일 뿐더러, 디딜 틈이 있다 하면 거머리를 밟게 될 것이었다.

태국 남부 섬도 말레이시아에서 가는 관광객들로 복작댈 것은 마찬가지였다. 랑카위 섬은 면세 쇼핑을 하기에 좋은 곳이라는, 우리한테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장점 말고는 볼 만한 게 없는 섬 같았다. 에라이. 세 군데 다 문제가 있다면 그냥 가고 싶었던 데를 가면 그만이다. 타만 네가라로 간다.

조지 타운의 버스 정류장은 꽤 커서 10개 정도의 버스 라인 사이로 차와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는 분주한 사람들 가운데 멍청히 서서 타만 네가라로 가는 버스를 찾아보았다. 한참을 서성이다 근처에 있는 여행사 사무소에 물어보았다. 여행사는, 타만 네가라로 가는 버스는 페낭 섬의 반대편에서 타야 하는데 이곳에서 차를 타고 30분 걸리는 거리라고 했다.


"팡코르 어때?"

반대쪽까지 또 언제 가느냐는 귀찮음에 금세 좌절된 나는 책을 뒤적이다 본 섬의 이름을 불쑥 내뱉었다. 누군가에게는 평생 살았을 고향이었을 곳을,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채 살다가 이렇게 불쑥 찾아가기도 한다. 뭐가 들었을지 모르는 땅을 조금씩 밟으며 넓혀 나가는 지뢰 찾기 게임을 하는 기분이랄까.

"팡코르가 어딘데?"
"…나도 잘 모르는데 말이지. 일단은 섬이야.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석양을 보고 너무 아름다워서 눈물을 흘렸다는 곳이라나."

루치아노 파바로티는 성악가이고 예술가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감정이 풍부할 것이고, 그런 사람이 눈물을 흘리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혹은 석양을 보고 있었던 그 시점에 어렵고 힘든 일이나 기쁜 일이 연상되어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눈물을 흘렸건 말건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고 솔직히 별로 관심도 없지만, 당장 어디로 갈지 결정을 해야하는 지금 이 상황에서는 진로를 정하기에 충분한 변명거리였다.

파바로티가 눈물 흘렸다는 섬으로 무작정 '고'!

a

팡코르 배에서 바라본 팡코르 ⓒ 이수지


그렇게 우리는 타만 네가라도 아니고, 랑카위 섬도 아니고, 태국도 아닌 팡코르로 갔다. 알고 보니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눈물을 흘렸다는 곳은 우리가 내던져진 배낭여행객들의 소굴과는 멀리 떨어진 고급 리조트 동네였다. 그처럼 석양에 눈물을 흘려보고자 온 건 아니었기 때문에 상관없긴 하다만.

날씨가 가장 뜨거운 시간에 도착한 우리는 무거운 짐을 지고 숙소들이 몰려 있는 곳으로 갔다. 다행히 숙소는 많았고 아직 설 연휴가 시작되지 않아서 그런지 관광객들로 복작대지도 않았다. 우리는 저렴해 보이는 숙소 몇 군데를 돌아보았다.

처음에는 여행객이 많을 테니 방이 비어 있는 곳이 있기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지만, 숙소들을 돌아보자 하니 그 마음에 점점 욕심의 꽃이 피어났다. 그러자, 모든 숙소가 마음에 들지 않기 시작했다. 조금 전 확인한 숙소에 비해 가격이 비싸다거나, 화장실이 더럽다거나, 해변에서 너무 떨어져 있다거나 하는 등 모든 숙소가 저마다의 작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두 바퀴 정도를 돌아 모든 숙소에 퇴짜를 놓고 결국 원점으로 돌아왔다.

a

팡코르의 코뿔새 팡코르의 코뿔새 ⓒ 이수지


더위보다 내 변덕과 고집에 더 지친 더스틴이 으름장을 놓았다.

"이 숙소에 들어가자. 여기 들어가서 큰 문제가 없고 가격이 적당하면 군말 없이 들어가는 거야, 알았지?"

숙소는 문제가 없었고 가격도 적당했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우리가 돌아본 숙소보다 괜찮은 것도 아니었다. 더스틴이 으름장을 놨을 때 동의를 했던 나였지만, 어두침침한 방에 놓인 축축한 침대에 앉아 있자니 골이 났다.

"마음에 안 들어. 조금더 돌아볼 걸 그랬나봐. 아니면 아까 봤던 그 방갈로 있지, 돈을 더 주더라고 거기에 묵을 걸 그랬어. 침대도 좀 축축한 거 같지 않아?"
"날씨가 이렇게 습한데 침대는 당연히 축축하지. 그리고 아까 숙소들이 다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나온 거잖아. 이 정도면 이 가격에 만족스러운데 뭘. 여기서 1년 2년 사는 것도 아니고 고작 2, 3일 묵는 건데 왜 그렇게 집착을 하는 거지?"

변덕이 심한데다 선택장애에 원망병까지 있는 나는 더스틴의 비판에 토라져 밖으로 나와 샤워를 하러 갔다. 이 숙소를 온몸으로 싫어하기로 마음을 먹은 이상 샤워실도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나는 더스틴이 싫어하는 줄 알면서도 참지 못하고 샤워실에 대한 불평을 다시 한번 늘어놓았다.  

"옷을 걸 데라곤 고리 하나밖에 없고, 모기가 많아서 계속 물어. 물도 바닷물이 섞였는지 이상하다고."
"됐다. 계속 숙소나 싫어하고 있어. 나는 나가서 혼자 놀게."

더 이상 나의 변덕과 후회와 원망의 치근덕함을 참지 못한 더스틴은 숙소를 나가버렸다. 커다란 실링팬이 천장 위에서 휘휘 돌고 있는 어두침침한 방에 홀로 누워 있자니 팬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나의 찌질함이 온몸을 감싸는 듯했다. 왜 작은 선택에 목을 매는가. 선택했으면 됐지 왜 자꾸 그 선택이 나의 인생을 바꾸고 온갖 운명을 결정할 것처럼 후회하는가. 그리고 선택은 내가 해 놓고 왜 다른 사람을 원망하는가.

'찌질이'로 남긴 싫었는데... 왜 모기까지 공격이냐

더는 '찌질이'로 남고 싶지 않았던 나는 숙소 밖으로 나왔다. 마을이 넓지 않은지라 더스틴을 찾기란 어렵지 않았다.

"나는 내 선택에 따라, 저기 저 언덕에 올라갈 거야. 너는 네 선택대로 마음대로 해. 그럼 나를 원망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러더니 더스틴은 관광객들이 흘리고 간 쓰레기가 잔뜩 흩뿌려진 언덕으로 올라갔다. 아니 왜 하필 이런 순간에 저렇게 더럽고 마음에 들지 않는 언덕으로 올라가는 걸까. 나는 더스틴의 마음이 풀릴까 하여 언덕을 조금 올라가보았다. 그 순간, 사방으로 모기떼가 나를 덮치더니 나의 양다리를 물어대기 시작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던 나는 다시 언덕 아래로 내려왔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왼쪽 다리만 세어봐도 모기에 물려 부어오른 자국이 스무 방은 되어 보였다. 길 한쪽에 앉아 일단 더스틴이 오기를 기다렸다. 모기에 물린 다리는 계속 부어올랐고, 참을 수 없이 간지러웠다. 애초에 모기 알레르기가 있어 모기가 물면 심하게 부어오르고 간지러운 편인데, 이번에는 한꺼번에 너무 많이 물려서 그런지 그 간지러움의 고통이 심각했다.

언덕에서 더스틴이 내려왔다.

"이것 좀 봐. 저 언덕에 올라갔다가 다리에 모기를 50방 정도는 물린 거 같아."

a

팡코르섬의 숲 팡코르섬의 숲 ⓒ 이수지


너 때문이라고 말하는 건 아니었다. 내가 올라가기로 한 것이기 때문에 더스틴을 원망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 마음에 쏙 드는 선택을 누군가 해주어야 하고, 어떤 문제라도 생기면 애초에 결정에 조금이라도 연루된 사람을 찾아내 원망을 해대는, 찌질한 공주병 게임은 이제 그만하고 싶었다.

모기약을 사서 몇 번을 뿌렸지만 간지러움은 약을 뿌리는 찰나에만 조금 나아질 뿐 점점 심해져 갔다. '이렇게 모기 공격을 당할 줄 알았으면 그냥 페낭에 머물러 있는 건데'라는 후회를 다시 한번 잠재우며 부어오르는 다리를 이끌고 숙소로 돌아갔다. 모기에 물려 코끼리 같이 부은 다리란, 나 같은 변덕쟁이에게 정말이지 너무나도 어울리는 최후였다.

부은 다리를 이끌고 팡코르의 한적한 해변을 거닐며 며칠을 보냈다. 눈물을 흘릴 정도는 아니지만, 석양도 꽤 멋있고 음식도 입에 맞았다. 밥을 먹을 때마다 '조금이라도 훔쳐 먹을 수 있을까' 지붕 위에서 내 밥을 바라보는 꼬마 원숭이들도 귀엽고.

"오늘은 설 연휴에 예약한 손님들 때문에 방이 없어요. 나가주셔야겠는데…."

설 연휴가 시작되기 전날, 우리는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숙소에서도 쫓겨났다. 배낭을 꾸려 짊어지고 해변으로 나왔다. 우리는 배낭을 의자 삼아 말레이시아의 드넓은 바다 앞에 앉았다. 그리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가지?"

a

팡코르의 석양 팡코르의 석양 ⓒ 이수지


#팡코르 #팡코르섬 #말레이시아 #동남아 #여행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불량한 부부의 히말라야 여행,' '불량한 부부의 불량한 여행 - 인도편'을 썼습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아니, 소파가 왜 강가에... 섬진강 갔다 놀랐습니다
  2. 2 "일본정치가 큰 위험에 빠질 것 우려해..." 역대급 내부고발
  3. 3 시속 370km, 한국형 고속철도... '전국 2시간 생활권' 곧 온다
  4. 4 두 번의 기회 날린 윤 대통령, 독일 총리는 정반대로 했다
  5. 5 '김건희 비선' 의혹, 왜 자꾸 나오나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