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쓰는가

소설가의 각오-마루야마 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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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람(rkfka4964)등록 2013.07.22 09:04
어쩌다보니 소설가가 된 남자가 있다. 어쩌면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운명이었을까. 나는 그 물음에서부터 이 책을 풀어나간다.

나는 왜 글을 쓰는가. 그 질문은 수없이 반복해도 항상 다른 답을 주었다. 이 시대에서 천대받는 인문학을 살리기 위해? 아니다. 내가 그렇게 큰 사명감을 갖고 글을 쓴 거 같진 않다. 그러나 이것만은 확신한다. 나는 항상 나 자신에게 솔직해지려는 노력을 했다. 그렇게 노력하며 글을 썼다. 때론 글을 좋아했기 때문에 많이 아팠다. 그것은 비단 주위의 만류 때문만은 아니다. 나약했던 내 자아와의 싸움이었다. 어릴 적 내가 생각했던 '장래희망'이라는 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생각은 틀렸다는 확신만 들었다. 작년, 그러니까 고등학교 3학년 때다. 선생님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대학 진학은 우리의 인생에 있어 내 스스로 개척해야 할 첫 번째 관문이라고 말씀하셨다. 사실 웃기지 않은가. 대학 그까짓 게 뭐라고. 물론 선생님들은 수능 때까지 우리를 공부시켜야 할 의무가 있기에 그 말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학은 선택이지 의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게 내 생각이다.

'다들 대학 가니까 나도 가는 거지!' 이런 식의 생각은 결코 옳지 않다. 우리나라 대학 진학률이 80%를 넘어섰다고 한다. 진정한 고학력 시대다. 자부심을 가질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비정상적인 현상이며, 엄청난 인력 손실을 가져온다. 국가적 차원의 해결책이 시급한 실정이다. 과거, 대학의 역할은 학문의 배움터였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소위 말하는 '취업이 잘 되는 과'가 있다. 그런 과는 매년 높은 경쟁률을 자랑한다. 내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이들 모두가 적성에 따라 과를 결정한 건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런 관심도 흥미도 없는데 그저 안정적이니까, 부모님이 원하니까 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미래를 결정해버리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안타깝다. 부모들이 자식에게 우리가 다 이루지 못한 꿈을 네가 이루어야만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부정돼야 하는 사실이다. 물론 내가 그들의 선택에 왈가왈부 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물론 이런 말도 있다. 정말 좋아하는 일은 직업으로 삼지 말라고. 그래서 나는 그들과 다른 이유로 아팠다. 문학을 택했기 때문에 버려야만 하는 게 너무나 많았다. 나는 내 꿈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앞서 말한 고3 때 얘기를 다시 하자면, 문예창작학과에 가지 마라……글이 밥을 먹여주냐고 말하는 친구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흔들렸다. 그런 나를 잡아준 건 온전히 부모님의 지지였다. 나는 내 딸을 믿는다는 그 분들의 말 한마디가 내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그래서 나는 마루야마 겐지의 문장에서 조금의 불편함을 느꼈다. 하지만 글이란 건 살아온 날들에 대한 차이기 때문에 나와 다르다 해서 그 글의 가치에 대해 논하진 않겠다.

내가 마루야마 겐지보다 나은 게 있다면, 나는 20살의 시작을 내가 하고 싶은 것과 함께 했다는 것이다. 처음엔 잘 몰랐지만 지금와선 큰 행운이라고 느낀다.

"가장 쓰고 싶은 이야기, 이것을 쓰지 않고는 못 견디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는가. 이것은 나 말고는 누구도 쓸 수 없다, 이 문제에 나보다 더 절실하게 부딪쳐 본 사람이 없을 것이다……."

사실, 소설을 쓰는 이에게 소설가의 각오라는 거창한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모든 글이 그렇다. 또한 모든 문학인이 그렇다. 이것을 쓰지 않고는 못 견디겠다고 생각한다면 글을 쓰면 된다. 다른 건 필요치 않다. 그 글이 비로소 내가 되고, 아울러 우리의 삶이 되는 것이니깐. 나도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글'이 있었다. 2년 전, 독도사랑 글쓰기 공모전에서 동상을 수상했다. 수상자 전원에게 울릉도, 독도 탐방의 기회가 주어져 4박 5일간의 여행길에 올랐다. 마지막 날 들어간 독도가 그 결심의 계기였다. 그 아름다운 섬이 너무나 외로워 보였다. 쓸쓸하고 안돼 보였다. 집에 돌아와서도 오랫동안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마음이 편치 않았기에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내 글이 무언가 변화를 이룰 수 있을거라 생각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저 그 때의 내가 가장 쓰고 싶은 이야기였기에 그랬다.

지금, 젊은이들 앞에 가로놓여 있는 것은 다른 누구의 인생도 아니다. 다른 누구의 시간도 아니다. 다른 누구의 공간도 아니다. 그건 온전히 내가 겪어나가야 할 모든 것이다. 많이 고민했고, 도망도 다녔지만 나는 결국 '글쟁이'다. 그리고 여전히 글 쓰는 게 즐겁다. 나에게 왜 쓰냐고 묻는다면 나는 나를 위해 쓴다고 말할 것이다. 베베 꼬아가며 말하지 않겠다. 거창하게 멋진 말로 포장하고 싶지도 않다. 이게 사실이다. 글을 쓸 때 가장 행복하기에 펜을 잡는다.

2012년이 벌써 2달 밖에 남지 않았다. 나의 20살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딱 9년 정도 남은 20대. 나의 20대는 무엇보다 열정이었으면 한다. 많이 도전하고, 때론 실패하고 싶다. 그 과정을 통해 성장할 것이다. 여전히 이렇게 말하고 싶다. 훗날 후회하게 되더라도 일단 부딪쳐 보자고. 도전해보지 않는 삶은 후회를 남기지만, 도전한 삶은 혹 실패하더라도 후회를 남기진 않는다. 만약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확실한 보장이라도 있다면, 이번 인생은 이 정도로 해두고, 두 번째 세 번째 인생을 마음껏 누리자고 느긋한 태도를 취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생이란 한 사람에게 한 번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언제나 우물 안 개구리고 싶다. 웬 우물 안 개구리? 무슨 말인지 다들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말뜻은 즉 뭐냐면, 1등급을 받아야 기뻐하는 학생이 있는 반면 3등급을 받아도 기뻐하는 학생이 있다. 목표집단의 차이 때문이다.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언제나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자는 뜻이다.

문학을 좋아하던, 특히 시를 좋아해 연습장에 매일 시를 끄적이던 여중생이 문예창작학과에 오게 된 과정은 특별치 않다. 처음 내 돈을 주고 산 시집을 잊을 수가 없다. 류시화 시인의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이라는 작품집. 그게 시작이었다. 나의 삶에 무언가 과제가 던져진 시작. 과거, 현재, 미래 모든 것은 내 글에 담겨져 있다. 왜 쓰는가의 해답은 앞으로도 내 글이 던져줄 듯하다. 많이, 깊게 써야겠다. 적어도 시간이 흘러 아쉽지 않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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